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6/02 21

동춘당 송준길, 편지를 쓰다 II

동춘당 송준길, 편지를 쓰다 II -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춘선생수찰(同春先生手札)』의 글씨에 대하여 - 송준길 글씨의 명성은 당대에 이미 높았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성가 높은 글씨는 수요가 많게 마련이었다. 그에게는 글씨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필적을 남겼으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글씨 또한 적지 않다. 특히 대학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비문(碑文)은 인기가 높아 많은 수가 제작되었다. 충청도 보은의 〈성운 묘비(成運墓碑)〉, 청주의 〈송상현 신도비(宋象賢神道碑)〉, 경기도 남양주의 〈민광훈(閔光勳) 신도비〉 등 묘비가 많이 있으며, 묘도문 외에 논산의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院庭碑)〉, 전주의 〈화산서원비(華山書院碑)〉 등 기념비 성..

고전 2026.02.28

틈/강여울

틈 강여울 멀리 소백산 꼭대기에 흰 눈이 보이기도 했지만 들판은 아직 황금빛으로 눈부셨고, 가로수의 단풍은 설익어 버짐처럼 번지는 중이었다. 먼 길 차멀미가 있었으나 단양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절경에 취하여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건강하다가 자신하는 사이 몸은 정작 그렇지 않다고 일찍부터 균열의 조짐을 보였음에도 나는 애써 모른척했다. 멀미 또한 몸의 습성으로만 여겻다. 그러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결국은 몸이 견디지 못하였다. 손목에 주삿바늘의 흔적을 달고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남편은 염려와 잔소릴 주저리주저리 엮어 흉을 봤지만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이미 우리가 살아내는 힘은 틈에서 생기는 것임을 단양의 사인암舍人巖에서 더 깊이 읽었던 때문이다.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비바람이 시나..

좋은 수필 2026.02.25

89세, 고운 손/노정숙

89세, 고운 손노정숙 광역버스를 탔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분이 나를 옆에 앉으라고 이끈다. 자리에 앉고 보니 곱게 모은 손에 메니큐어가 예사롭지 않다. 보라색에 은빛 반짝이가 도드라져 눈길을 끈다. 손톱 손질 어떻게 하셨냐고 물으니 심심해서 직접 했다고 한다. “멋지세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하니 손을 모아주신다. 가운뎃손가락에 보라색 빨간색 보석이 줄줄이 박힌 반지도 반짝인다. 보라색을 좋아해서인지 외롭게 살았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모자도 코트도 보라색이다.지금 89세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1살에 결혼해서 5녀 1남을 두었는데 남편이 41살에 저세상을 갔다고 한다. 돈 벌며 자녀들을 혼자 키웠다. 사는 게 힘들었지만, 자녀들이 모두 결혼했고 손자녀가 13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

좋은 수필 2026.02.24

이명희 시집『바람의 수첩』서평 (2022. 시산맥 기획특선)-마경덕

이명희 시집『바람의 수첩』서평 (2022. 시산맥 기획특선)자연을 통해 보여주는 환경지표​마경덕(시인)​​언제부턴가 떠들썩하던 동네 골목이 조용해졌다. 팔순의 할머니들이 골목에 앉아 지나가던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시시콜콜한 소문으로 박장대소를 하던 골목이었다. 몇 년이 지나니 하나둘 이사를 가거나 몸이 불편해 요양원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은 독거노인 한 분만 남아 적막한 골목을 지킨다. 비가 오는 늦은 밤 우산을 쓰고 홀로 집앞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어두운 골목에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을 하세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감기 드시겠어요. 그만 집에 들어가세요” 했더니 “괜찮아. 답답해서 그래” 하신다. 답답하다는 그 말이 엄동설한 ..

평론 2026.02.22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문순태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문순태아내는 일주일째 집에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냄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내가 나가고 나자 어머니의 냄새가 온 집안을 빈틈없이 장악했다. 어머니는 팔십이 넘었지만 아직 생의 욕망이 왕성하다. 식탐도 많고 시기심이며 질투심도 대단하다. 아내는 그런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고 있다. 어머니가 젊었을 적에는 식탐이 없었고 아무리 아파도 자리보전하거나 약을 먹지도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식들이 저마다 앞가림하고 살게 되자, 특유한 어머니의 냄새를 피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더 정확히 따져보면 도시로 나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인지도 모른다.​내코에 어머니 냄새는 오래된 신 김치에서 나는 군내 같기도 하고, 쿠리한 된장 냄새, 시지근한 땀 냄새, 퀴퀴..

좋은 수필 2026.02.22

산길에서/ 이성부

산길에서/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하지 않았더냐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힘을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좋은 시 2026.02.22

[중도일보][신간] 황진숙 첫 수필집 출간…사물 응시로 구축한 단단한 사유

[신간] 황진숙 첫 수필집 출간…사물 응시로 구축한 단단한 사유최화진2026. 2. 19. 16:47 신간 '곰보돌 궤적을 긋다' 표지. 황진숙 수필가 2025년 제17회 천강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이목을 끌었던 황진숙 수필가가 첫 수필집 '곰보 돌 궤적을 긋다'를 펴냈다. 표제어인 '곰보 돌'은 이 수필집의 핵심 은유다. 매끈한 수석이 아니라 구멍이 뚫리고 패인 돌을 통해 작가는 상처와 결핍을 삶의 과정으로 읽어낸다..

발표작 평론 2026.02.20

은수저/김은숙

은수저/김은숙 시간의 발효를 거치면 기억은 팽팽해진다. 그러다 불쑥, 팽창한 기억이 삶을 흔들 때가 있다. 오늘, 프라이팬에 생선전을 부치려던 순간이 그랬다. 뒤집을 마땅한 젓가락을 찾던 중 싱크대 서랍 어딘가에 둔 길쭉한 물건에 생각이 미쳤다. 익숙한 서랍 아래 칸, 안쪽에서 나는 오래된 시간을 더듬듯 그걸 발견했다.젓가락을 꺼내려던 순간, 내 눈은 무언가에 붙들렸다. 구석 한편에 놓인 낡은 비단보자기였다. ‘이게 뭘까’ 생각하기도 전, 손끝에 전해진 차가운 감촉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매끄러운 비단을 조심스레 풀어헤치자 주름 가득한 한지가 나왔다. 한지 속에는 은수저 한 벌이 들어있었다.본래의 은빛은 사라지고 이제는 푸르스름한 밤색으로 물든 형상이었다. 비단은 여전히 반짝이는데, 수저는 세월 속에 ..

좋은 수필 2026.02.20

복권/김응숙

복권/김응숙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수첩 사이에 끼인 복권 한 장을 발견 했다. 당첨 날짜는 지나갔지만 당첨 여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필히 자동판매기가 선택했을 숫자들은 끝내 해독하지 못할 난수표에 적혀 있는 숫자들 같았다. 서로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무슨 기호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다.병상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아버지는 외출을 나가는 환자들이나 간호사들에게 부탁해 복권을 사오게 했다. 겨우 마련한 병원비를 납부하고, 그냥 돌아서기가 마음이 편치 않아 쥐여 드리는 몇 푼의 용돈으로 늘 그렇게 복권을 사시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복권을 산 것이 아버지가 살아서 하신 마지막 경제적 행위였을 것이다. 수첩 표지에서 발견된 몇 만원과 함께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이 된 복권이었다. 여..

좋은 수필 2026.02.20

보정 어플은 '가짜 나'라고? | 라캉의 상상계로 본 자아 이미지[출처] 보정 어플은 '가짜 나'라고? | 라캉의 상상계로 본 자아 이미지|작성자 바람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가타오카 이치타케2019이학사1. 거울 이미지(mirror image)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나’ 속에서 살아간다. 거울 속의 나, 카메라 속의 나, 보정된 사진 속의 나,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 그런데 이 중에서 과연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라캉은 인간의 자아가 ‘거울 단계(mirror stage)’를 통해 형성된다고 말했다. 유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면서 비로소 ‘나’라는 동일성을 획득하지만, 그것은 실재의 나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를 통해 이미지화된 나일 뿐이다. 이때 자아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매료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지로부터 소외(alienation)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는 처음부터 ..

소소한 이야기 2026.02.19

속긋을 말하다/조이섭

속긋을 말하다 / 조이섭 행복한 루치06. 2. 16. 4:00URL 복사 속긋을 말하다/조이섭​​​ 다섯 살배기 쌍둥이 손녀가 네모난 칸 하나에 한 자씩 글자를 그려 넣고 있다. 한 손을 좍 펴서 공책 가장자리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 색연필을 엉성드뭇하게 부여잡고 음영으로 난 길을 따라 지렁이 기어가듯이 메꾸어 나간다. 포도알 같은 까만 눈동자는 연필심에 붙박여 놓고, 입을 동그랗게 오므린 모양이 제 딴에는 세상 심각하다. 녀석들의 마음과 정성과 달리 괴발개발 그린 글씨는 도무지 뭐라고 썼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글씨나 그림 따위를 처음 배우는 이에게, 그 위에 덮어쓰거나 그리며 익히도록 가늘고 흐리게 그어주는 선이나 획을 속긋이라 하는데, 아이들이 글자를 처음 배울 때 매우 유용하다. 속긋을 따라 ..

좋은 수필 2026.02.17

아현동 블루스/박소란

아현동 블루스박소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쇼윈도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이라도 차린다면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 지어내면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 으로 시작되는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아래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아아 그러나 나는 비..

좋은 시 2026.02.16

응축된 사유를 담다, 황진숙 수필집 ‘곰보 돌 궤적을 긋다’

https://www.jjan.kr/article/20260211500359(수필과비평사)를 펴냈다. 이번 수필집은 작가가 일상의 사물들을 집요하게 마주하며 완성한 44편의 이야기가 담" data-og-host="www.jjan.kr" data-og-source-url="https://www.jjan.kr/article/20260211500359" data-og-url="https://www.jjan.kr/article/20260211500359" data-og-image="https://blog.kakaocdn.net/dna/blTVhl/dJMb82eJi20/AAAAAAAAAAAAAAAAAAAAAN844mN-Zv-biftCMf7-2McfRqilowATKrWD1y9FGfs_/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7561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TLDbTUKnJPTcYkCaLxKRLtWKXY4%3D

발표작 평론 2026.02.15

멧노랑나비 / 김미경

멧노랑나비 / 김미경 11월은 멧노랑나비가 겨울잠에 드는 달이다. 나비는 날개가 생명이고 벼리다. 나비를 표현할 때 날개를 빼면 무얼 말할 수 있을까. 따스함이 감도는 노란색 때문일까. 날개는 나비가 한겨울 추위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막이 돼주는 듯하다. 겨우내 제 몸에 품은 봄이 행여나 얼까 봐 날개를 포개고 미동이 없다. 가진 거라곤 날개 한 쌍뿐이지만 그 속에 품은 꿈만은 무한하다. 봄꿈을 간직한 나비는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부활의 전령사다. 코끝이 시린 찬바람이 불면 메뚜기, 잠자리, 사마귀와 같은 곤충들은 쉽게 얼어 죽는다. 그렇지만 멧노랑나비는 북풍한설에도 죽지 않고 성충인 채로 겨울을 지난다. 멧노랑나비는 여름잠을 자고 겨울잠도 자는 곤충이다. 사릉천 변에 봄이 찾아오면, 민들..

좋은 수필 2026.02.11

너를 기다리다 해가 졌다 / 송연희

너를 기다리다 해가 졌다 / 송연희 한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란 진정 고문이다. 묵은 추억이 남아 있는 집, 그곳에서의 기억을 떨쳐내는 일은 살점을 들어내고 목울대가 꺽꺽거리도록 상심케 하는 일이다. 사람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엄마가 살았던 집을 처분했다. 그 안의 세간살이들은 내 손으로 덜어낼 수 없어 친척에게 부탁했다. 하나도 버릴 게 없더라는 말에 그저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의 삶은 늘 그랬다. 당신 손길이 지나가면 모든 것들이 개과천선을 했다. 하나같이 반들거리고 윤기나고 두 번 손댈 일 없이 깔끔하였다.엄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요양병원, 그곳에서 가져온 것들은 다 버려도 아까울 것 없는 것들이었다. 속옷, 손거울, 빗, 손톱깎이, 면봉, 물티슈 같은 잡다한 것. 마지막까..

좋은 수필 2026.02.11

‘중력의 힘’/ 황보림

‘중력의 힘’/ 황보림 벽시계 추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듯 코끼리 코가 좌우로 물체를 감지하고 있다 물렁물렁한 살덩이가 때로는 철심처럼 튼실하게 중심을 잡는다 불어 닥치는 바람 한 줄기도 거침없이 말아 올리는 촉수 태엽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수단이다 억센 풀밭을 헤집으며 작은 풀 하나도 능숙하게 뽑아내는 것은 늘 바닥을 직시하는 긴 코의 연륜 때문이다 한여름 수렁논에서 김을 매던 뚝심 깊은 아버지의 팔뚝이 그러했다 논바닥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벼와 벼 사이에서 보호색을 띠며 점령해 오는 피*를 용케도 골라 뽑아내셨다 움푹짐푹한 들녘을 평평하게 펼쳐내는 두 팔 질척한 개흙 속을 훑어 내며 벼 포기들을 퍼렇게 키워냈다 뭉툭하고도 세심한 아버지..

좋은 시 2026.02.08

푸른 적막/유계자

푸른 적막 ​유계자 몇 섬의 적막을 부려놓은 푸른색 칠이 벗겨진 철제 대문 안에 수상한 그림자들이 들락거렸다달이 뜨는 날이면 분내가 진동하고 마당에서 굴뚝까지 조붓한 것들이 흘러 다녔다반달무늬 문고리는 장단을 맞추고시렁에 올려놓은 가재도구들이 들썩장독대마다 들여놓은 이끼는곧 꽃의 일가를 새로 이룰 기세다 노동을 벗어놓은 장화는 마루 밑에서 수년째 몸을 쉬는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한 사람을 보고 메꽃이 아침부터 불어대던 나팔을 떨어뜨린다눈치 빠른 것들은 서둘러 대문을 빠져나가고 밤새 비틀거리던 달맞이꽃 바랭이 개망초 칡넝쿨까지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잘 차려입은 나비들도 선머슴 같은 호박벌도 줄행랑이다 발소리에 납작 엎드려 발발 떠는 것들 예초기를 메고 스위치를 넣자금세 흙이 튀고 풀의 냄새가 잘려나간다 새 ..

좋은 시 2026.02.08

둑방 옷 수선집/조미정​

둑방 옷 수선집/조미정 ​​​골목은 피고 진다. 사람들 발자국 따라 번화해진 상점가를 기웃거리다가 오래된 가게 앞에 멈춰 선다. 강둑이 마을 따라 십 리 넘게 펼쳐져 있어 이름 붙여진 ‘둑방 옷 수선집’.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다란 틈바구니에 저 혼자 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다.한눈에 보기에도 헙수룩하다. 알루미늄 새시 문에 광고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었다. 덜컹거리는 미닫이를 열면 말발굽 소리가 달려 나온다. 한쪽 벽에 무지개색 실패들이 큐빅처럼 박여 있고, 낡은 재봉틀은 작업대 위에서 드르륵드르륵 땀을 박는다. 맞은편 선반은 난파선이다. 여름 원피스부터 솜 잠바, 스팽글 반짝이는 무대복과 목 늘어난 스웨터, 물 빠진 작업복과 찢어진 청바지 등 각양각색의 헌 옷가지들이 좌초되어 이물부터 가라앉는..

좋은 수필 2026.02.08

청제비에 새겨진 마음 / 김규인

청제비에 새겨진 마음 / 김규인 현판 뒤로 난 일곱 개의 돌계단을 오른다. 한 칸의 맞배지붕을 한 비각 안에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자리한다. 오른쪽으로 돌면 보물 제517호 영천 청제비가 보인다. 비(雨)에 젖을세라 비각은 겹으로 길게 처마를 내고 비(碑)를 품는다. 단칸 목조 비각에 들어가기까지 비는 허리가 부러지고 수백 년간 땅속에 묻혀 암울한 시간을 보냈다. 부러지고 비바람에 몸이 깎이던 시간도 지나갔다. 청제비는 부적처럼 몸에 글자를 깊이 새기고 세월을 삭였다. 세월도 삭으면 좋은 시절이 오는지, 팔작지붕의 새집을 마련하고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글자는 몸을 지켜주는 부(符)다. 의미 있는 글자를 몸의 앞뒤로 새겼기에 살아남았다. 덩치만 커다란 바위였으면 다시 빛을 볼 수 있었을까. 허리가 부러지..

좋은 수필 202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