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평론 46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自寫眞贊 김시습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俯視李賀 부시이하 조선 최고라 했지. 優於海東 우어해동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騰名謾譽 등명만예 어찌 네게 걸맞을까?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 몸은 지극히 작고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爾言大侗 이언대동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宜爾置之 의이치지 저 개굴창이리라. 丘壑之中 구학지중 ※ 정길수 편역, 『길 위의 노래』 (돌베개,2006) .......................................................................................................................................

평론 2024.01.16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2011년가을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문창2011년가을 ​ 1.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짐승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열정을 넘어 광기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이미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갈 때 그래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붙잡았던 시였는데……, 나는 쓰러졌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원, 아이러니하게도 ‘시창작’ 수업시간에 나는 쓰러졌다. 2001년, 그날 이후 혼미해진 의식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만 막막한 적막 속에 갇히고야 말았다.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평론 2024.01.11

조금만(灣)/정상미

조금만(灣)/정상미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옆구리 깊이 파여 먼 곳을 바라보면//돌아온 파도의 말이 귓전에 쏟아집니다//퉁퉁 부은 발목들이 찾아드는 늦저녁//슬리퍼도 운동화도 물소리에 녹아듭니다//차르르 지워진 발자국, 만 가득 들이칩니다//해초 냄새 덜 밴 기다림을 매만질 때//짠물을 맞아 봤거나 흘려본 사람들은//발돋움 숨어 자라는 조금만의 근육입니다 「시와문화」(2021, 여름호) 정상미 시인은 2021년 등단했다. 등단작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담백하고 정갈한 언어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금만(灣)’은 제목이 특이하다. 시작도 새롭다.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 라는 첫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퍽이나 감각적이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신인으로서 어떤 ..

평론 2023.11.11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박철영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상력에 대하여 유추해 본다. 신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 시간을 구분해 계절을 나누어 다가오는 봄을 선물했다. 우리가 고대하던 봄이 온다. 누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꾼다. 바람을 구체화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것이다. 오랜 시간 꿈꿔온 단상들이 깊은 사유로 이전 축적되면서 그 모습을 세상에 ‘시’라는 형상으로 드러낼 때 심연을 통과한 고뇌와 혼신에 찬 몰입을 환희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불안한 순간순간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의 산물로 봐야 한다. 그런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평론 2023.10.19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상력에 대하여 유추해 본다. 신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 시간을 구분해 계절을 나누어 다가오는 봄을 선물했다. 우리가 고대하던 봄이 온다. 누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꾼다. 바람을 구체화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것이다. 오랜 시간 꿈꿔온 단상들이 깊은 사유로 이전 축적되면서 그 모습을 세상에 ‘시’라는 형상으로 드러낼 때 심연을 통과한 고뇌와 혼신에 찬 몰입을 환희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불안한 순간순간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의 산물로 봐야 한다. 그런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평론 2023.07.09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박철영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 순백해진 말들의 상상속 우화羽化 -이상인 시집《툭, 건드려 주었다》 시인, 문학 평론가 박철영 어둑해질 무렵 인 밭둑길을 퍼덕이며 달아나는 암탉 한 마리 배고픈 어른들이 새까맣게 뒤쫒아 가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 전문 대체적으로 네 번째 시집 이전까지의 이상인 시인은 은은한 서정에 근접한 시적 세계를 성찰하고 사유한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에서도 시골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을 교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의 “범 바위골에서 새벽밥 먹고 달려온/호재의 책가방 속에서/노랑턱멧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국어책을 꺼내자/푸드득 교실 뒷문으로 빠져 날아간다.//호재의 가방 속에는 늘 날고 싶은/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며 아이의 희망을 염원하고 있..

평론 2023.07.08

밤 꽃/박제영

밤 꽃/박제영 - 유월에 산에 오르다보면 비린내 같기도 한데 뭐라 말하기 참 거시기한, 참 묘한(?) 향기가 코를 찡긋거리게 만드는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돌려 말하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겠네요. 온 산을 진동하는 정액 냄새로 정정하지요. 중학생 때, 처음 몽정을 했을 때, 화장실에 가서 엄마 몰래 빤쓰(?)를 빨면서 처음 맡아보았던 그 정액 냄새. 산을 오르는데 난데없는 정액 냄새라니! 그 냄새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민망하기도 할 듯한데요. 그 망측한 냄새를 풍기는 범인은 바로 밤꽃이지요. 그래요. 오늘은 조금은 야한 꽃, 동서고금 시인 묵객들이 야화(夜花)라고 부르곤 했던, 그러나 실은 밤나무꽃인,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밤나무와 밤 그리고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평론 2023.07.01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 신진순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삶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미학적 페이소스 신진순의 신작시집 『난파선 한 척, 그 섬에』는 남녘 섬에서 겪어온 삶의 순간들을 낱낱이 기록한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도록(圖錄)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전남 고흥 나로도는 차랑차랑, 하염없이, 오랜 풍경과 시간을 쌓아가는 천혜의 공간이다. 시인은 그러한 풍경과 시간의 흐름을 때로는 잔잔하고 투명하게, 때로는 격정과 회한을 얹어 토로해간다. 시종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통해, 삶의 만만찮은 굴곡을 품은 채,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가려는 의지를 충만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과 시간을 발화하는 시인의 언어는 과장된 감상(感傷)이나..

평론 2023.06.10

사각형의 세상에서 쌍봉낙타의 꿈을 꾸다

사각형의 세상에서 쌍봉낙타의 꿈을 꾸다 - 이지엽,『사각형에 대하여, 고요아침, 2011. - 박성민,『쌍봉낙타의 꿈, 고요아침, 2011. 이 송 희 (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1. 현대시조의 현실인식, 그 실험과 성취 시인은 이 세계의 모순과 결핍을 진단하며 경고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비유와 상징,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 물화된 욕망, 소외된 삶의 단면들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독자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치열한 역사적 사건들이 즐비했던, 열망과 고뇌의 20세기에 시인들은 기꺼이 잠수함 가장 밑바닥에 들어가서 산소의 부족함을 경고하고 먼저 죽는 역할을 했다. 시인들이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은 곧 현실에..

평론 2023.05.31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 오종문론 이 송 희(시인) 1. 현실 비판의 지상에서 자아성찰의 땅 속으로 시인은 끊임없이 세상과 타자, 또한 스스로의 삶에 관여하는 존재다. 감각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최소의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공자의 말처럼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는 것”이다. 마음 안에 있는 사유를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존재가 시인이 아니던가. 요즘처럼 빠른 속도와 경쟁의 시대에 현대의 시들은 할 말이 많아졌다. 시 한 편이 두 페이지를 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시집 한 권이 단 한 편의 시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의도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는 시에서조차도 말을 ..

평론 2023.05.30

갈망과 좌절의 비린내 나는 삶, 물고기의 표정들/이송희

《시조춘추》2011. 겨울 기획특집《시조, 물고기를 낚다》 갈망과 좌절의 비린내 나는 삶, 물고기의 표정들 이 송 희 1. 이번 계절에는 물고기를 소재로 취한 작품들을 읽는다. 다른 대상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물고기는 그 종류에 따라 다양한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다채로운 살림살이와 비유되어 시적 소재로 차용되어 왔다. 특히, 납작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서 눈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가재미, 삭힐수록 암모니아 냄새가 더 진해지는 홍어,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 매 맞고 부러져서 더욱 슬픈 북어, 그 외에도 숭어, 꽁치, 복어, 새우, 거북 등은 시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물고기의 속성을 인간 삶의 다양한 양태와 연결 지어 때로는 풍자와 해학을 동반하고, 때로는 에로티시즘적 상상력과..

평론 2023.05.30

낯섦의 부재에서 치환해낸 자연의 시어

낯섦의 부재에서 치환해낸 자연의 시어 -김계식 시선집 《연리지의 꿈》을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자연과 맞닥뜨리는 촉수는 사물을 바로보는 의식이고, 자아가 외부 세계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 첨예한 접점에서 발현한 자의식으로 시적 상상력은 형상화에 다다른다. 시의 세계로 내재화된 자연은 삶의 경계를 여지없이 허물어 낸다. 그러한 작업이 환원되어 건강한 시어로 추수됨을 알 수 있다. 나는 무리의 질서를 존중하는 한 마리의 일벌 - 부분 비록 부분을 보여주지만, 전체를 나타내주기에 충분하다. 이 싯구를 통해 시인의 시적 방향성과 삶의 정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여기에 “나는 / 한 마리의 일벌”이었다며 기나긴 침묵을 고해하는 성사를 마저 이룬다. 시인의 고백을 통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공감할 ..

평론 2023.05.07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 -신용목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중심으로 암흑을 꼭 어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굳이 어둠을 말하면서 암흑을 떠올리지 않듯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짙은 어둠에 둘러싸인 지리산 어느 낮은 산자락에 든 어둠은 결코 불편하지 않은 어둠이다. 이 어둠은 암흑에서 잉태되었지만, 암흑이 분만한 새끼라 해도 옴팍한 가슴께로 파고든다면 더 이상 어둠이라 불릴 수 없다. 어차피 어둠은 거대한 혼돈 사이에 존재한다는 코라(chora)라는 기제를 통과해야만 가능한 빛으로 우리가 인식해야하는 또 다른 현대적 문학의 언표다. 그 어둠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사물 분별의 안목이 생겨 조금씩 사물에 대한 형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추구하는 시의 성향은 어둠에서 막..

평론 2023.05.07

시적 사유가 지향하는 좌표

시적 사유가 지향하는 좌표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을 생각한다, 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 세끼에도 흔들림 없이 밥보다 문장을 상상력으로 일궈가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세상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더 확실한 것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어 무병을 앓고 숙명처럼 무속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알게 모르게 온몸으로 번진 문장 앓이로 긴 세월을 앓아누운 뒤에도 도통 보이지 않은 ‘시’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야 하는 고역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의 발에 수없이 사그락 대며 발굽 뒤로 밀리는 황량한 모래알들처럼 일보 전진을 위해 더 많은 모래알을 어루만지며 사막의 끝을 가늠하며 ..

평론 2023.05.06

절실한 자기애에 도달하기 위한 극기

​ 절실한 자기애에 도달하기 위한 극기 박수림 시집 《네 전부가 내 사랑이다》 중심 박철영 ​ 사람이나 사물이나 이력을 알려면 과거로 눈을 돌리게 된다. 더욱이 최근작으로 다가오는 세 번째의 시집을 이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박수림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꽃잎 하나 터질 모양이다》와 두 번째 시집 《당신을 바라보는 거리》에 눈을 들이대 보았다. 첫 시집 속 의 “아무도 머물러 주지 않는 밤/등대 불빛에 꿈틀대는/불임의 여자 너를 안는 건 비릿한 바다/흔들릴 수 없는 맺음이여.” 에서는 사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떨칠 수가 없다. 또한, 에서는 “오류가 잦아 금세 잊고 잊혀져가는/뜨거운 가슴을 상실한 메모리의 일부/내 삶은 날마다 수척해져 가고/뿌리 없는 그 자리에 나는/날마다 새로운 음모를 꾸민다.”며..

평론 2023.05.06

김경윤 시집 『신발의 행자』小考

김경윤 시집 『신발의 행자』小考 땅 끝에서 울려 퍼지는 맑고 따뜻한 저음의 메아리 김규성 (시인) 현대를 일컬어 문명의 지각변동이 일고 있는 신 유목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환기적 패러다임을 강조해도, 뿌리깊은 산업사회는 오히려 더 악랄하고 교활하게 세상을 고문하며 타락시키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그 이란성 쌍둥이이다. 그런데 두 쌍둥이가 나란히 걸을 때는 건강하고 명랑한 사회를 이루지만, 한낱 수단일 뿐인 자본주의가 오히려 그 목적인 민주주의를 깔아뭉개고 수단화(일방적 독주)할 경우, 세상은 병들고 각박해진다. 현대는 가증스런 탐욕의 걸신으로 타락한 자본주의가 무기력한 들러리이자 노예로 전락한 민주주의를 핍박하며 최후발악이라도 하듯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의 패륜적 약육..

평론 2023.04.29

시적 발화에 관한 담록 속 중심어들/ 조선의/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 시집 해설

시적 발화에 관한 담록 속 중심어들/ 조선의/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 시집 해설 시적 발화에 관한 담론 속 중심어들 조선의 시집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 중심 박철영(시인,문학평론가) 허공도 공간이다. 시인은 위태위태한 허공에서 줄타기를 하듯 자모의 결합적 텍스트를 통해 인간의 심연을 벼르고 다듬어 문장을 직조하는 사람이다. 이 땅의 모든 광물들이 보석이 될 수 없듯 혼신을 다해 생산한 문장을 버려야하는 아픔도 연연하지 않으며 때로는 독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오로지 한가지 일에 몰두한 장인처럼 문장을 다루며 언어를 도구로 필생을 겸허히 수행하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그렇게 초연한 의지를 갖고 시인은 주체적 삶을 향한 욕망 의지를 철저히 타자화 해야 하고 대상이라는 사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나’가 아닌..

평론 2023.04.27

현재화된 시간 속 문장들/박철영

현재화된 시간 속 문장들 _주선미, 김은우, 권선희, 김명리 박철영(시인,문학평론가) 매번 고민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한편으론 떠나보낸 계절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것도 행복한 여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 위해 오직 한 곳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을 일반인이라고 하자. 그런 부류에 휩쓸리지 않고 갈 길을 가다가도 멈추며 무언가에 골똘한 사람을 시인이라 말해도 억지는 아니다. 똑같은 환경을 살아가며 주어진 삶보다 무한 사유의 늪으로 빠져들어 해찰을 일삼는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된다.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그 간극을 뛰어넘지 않고 허공의 시간 현상을 세계로 치환해 바라보려 한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풍성한 가을을 맞으며 지난 날의 ..

평론 2023.04.27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언어들/김경윤의 시세계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언어들 김경윤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교수) 1. 김경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신발의 행자󰡕(문학들, 2007)는, 첫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내일을 여는 책, 1996) 이후 10여 년의 시간을 온축하면서, 삶의 다양하고도 심원한 문양(文樣)을 응집력 있게 보여주는 성과이다. 첫 시집에서 “참숯 같은 희망”(「그리움」)을 뒤로 한 채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을 보여주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는 자신의 삶 속에 오래도록 깃들여 있던 ‘시간’의 다양한 형식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중년에 이른 이의 깊이 있는 사유와 감각의 진경(進境)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서정시는 ‘시간’에 대한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양식적 특..

평론 2023.04.27

수평선 너머 노을에 대한 경배/김경윤 평론

수평선 너머 노을에 대한 경배 -김경윤《바람의 사원》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잔잔한 산 등허리를 소리 없이 내려오고 있다. 말소리도 잔잔하고 계곡의 물소리도 잔잔하다. 거칠 만큼 거칠어지다 보면 삶이란 게 잔잔해질 때도 있나 보다. 세상을 바라보라는 시인의 눈은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노을 같기도 하고 어스름처럼 깔리는 해거름 녘 지게 바랑에 무거운 짐을 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소걸음같이 시인의 모습이 그렇게 모닥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면 오버일까. 나도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의 시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으로 치면 벌써 세월이 흘러 십 년은 거반 되고도 남았겠다. 지리산 대성동 계곡을 올라 기억나지 않는 능선을 타고 넘어 피아골 어딘가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은 아득한 ..

평론 2023.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