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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수평선 너머 노을에 대한 경배/김경윤 평론

에세이향기 2023. 4. 27. 03:18

수평선 너머 노을에 대한 경배
-김경윤《바람의 사원》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잔잔한 산 등허리를 소리 없이 내려오고 있다. 말소리도 잔잔하고 계곡의 물소리도 잔잔하다. 거칠 만큼 거칠어지다 보면 삶이란 게 잔잔해질 때도 있나 보다. 세상을 바라보라는 시인의 눈은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노을 같기도 하고 어스름처럼 깔리는 해거름 녘 지게 바랑에 무거운 짐을 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소걸음같이 시인의 모습이 그렇게 모닥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면 오버일까. 나도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의 시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으로 치면 벌써 세월이 흘러 십 년은 거반 되고도 남았겠다. 지리산 대성동 계곡을 올라 기억나지 않는 능선을 타고 넘어 피아골 어딘가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김경윤 시인과 스쳤다가 묻어온 티끌이 내 몸에서 조금씩 자란 인연이 그랬다. 지리산 등산은 오래전 준비된 산행이지만, 박두규 시인, 송태웅 시인, 김경옥 시인, 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땅끝 문학” 시인 두어 분으로 기억된다. 말이 길어진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의 꼬투리는 참 길고도 길어 근자까지 이어오면서 풍문처럼 이후에도 몇 번을 더 만날 때마다 마음만은 김경윤 시인의 시편을 붙잡고 있었다. <신발의 행자>에서 시를 읽어가다 등을 후려치는 죽비 같은 시어에 마음이 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시를 담아낸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궁금해졌다. 그 고요는 어디에서 와서 나를 머물게 하는가 묻고도 싶었다.


해가 기울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제 몸을 빠져나가는 저녁입니다 어둠속으로 저
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나무들이 바람을 부릅니다 바람은 제 안의 오랜 상처를
서쪽 하늘에 풀어 놓습니다 하늘 끝까지 낭자한 바람의 혈흔이 수평선에 번집
니다 향적당 툇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해인海印을 찾아가는 바람의 울음소리,
어느덧 어둠의 빗장을 여는 저녁 종소리가 숲을 흔듭니다 나무들은 묵언의 경
배를 올리고 범종은 살을 찢어 소리를 만듭니다 어둑한 상처에 기대어 종소리
를 듣는 저녁, 항아리 같이 텅 빈 몸속으로 소리가 쌓입니다 저녁 종소리가 무
쇠 같은 어둠을 이마로 들이받을 때마다 어둠의 상처에서 별이 듭니다 마음은
종소리를 따라 자꾸 산 아래 마을로 달려갑니다 종소리를 따라나선 마음은 이
내 돌아오지 않고 별빛 아래 혼자 앉아 내 몸이 오래 품고 온 소리를 듣습니다
내 안의 상처를 풀어 놓은 저녁 종소리 먼 하늘에 별꽃으로 피어납니다
-<저녁 종소리_미황사 시편2> 전문


시인의 눈은 고요로 가득하다. 고요 속에서 벌어지는 저녁 숲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말하고 있다. “해가 기울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제 몸을 빠져나가는 저녁입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나무들로부터 보여주는 풍경을 옮겨놓은 듯하다. 그것도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듯한 시인이다. 어딘가에 서 있는 나무들의 신산했던 하루이고 그 무거운 하루를 내려놓고 싶어 하는 시간임을 시인은 알아챈다. 알아채는 것이 아닌 시인의 몸이 곧 대상화된 나무이기에 그런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저녁이라는 시간 속에 드는 어둠을 마다치 않고 스스로 어둠에 들어가 바람이 되는 시인, 시인의 가슴속 상처를 스스로 풀어내면서 속세의 일들이란 것이 허허로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잔잔히 물결치듯 바람이 닿은 곳이 수평선이라고 말한다. 수평선을 이룬 곳은 시인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평정심에 그지없다. 그 평정심은 산마루에 걸터앉은 향적당 툇마루까지 닿았을 때야 지극해진다. “해인海印을 찾아가는 바람의 울음소리”는 다름 아닌 깨달음의 울음소리인 것이다. 가슴 저 속에서 복받치듯 치고 나와야만 울리는 울음소리다. 그 울음소리는 분노의 울음이 아닌 오욕칠정을 벗어버린 평정의 해탈 선을 비집고 나와서야 은은한 고요가 된다. 어차피 인간이기 전에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오욕五欲도 칠정七情도 없었기에 그 경지에 이르러 텅 비어져 고요를 맞는다는 것이다. 그 고요 속에 쌓고 싶은 것이 곧 종소리라는 것이다. 그 종소리는 가장 원초적 순수에 버금가는 영혼의 소리라는 것이다. 시인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얽히고설킨 사회에서 살아가며 사람과 사람에게 할퀸 생채기가 낫지 않는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시인의 상처가 그랬다. 아픈 상처를 허허롭게 버리고 나서야 자유로워진다. 해거름의 나무를 바라보다 발현한 시적 상상력은 어느덧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신의 영역까지 다다른다. 그것은 바로 고요임을 깨달아가는 자기 성찰의 철학적 사유의 경계이고 구체적인 시로 형상화된다. 종소리는 저녁이었을 때와 삼라만상이 잠들어가는 고요 속에서 맑고 깊게 울려 퍼진다. 그 고요는 인간의 탐욕으로 잠시나마 잃어버린 본성에 대한 회귀이고 시인에게 마음속의 수평선으로 존재한다. 저녁의 종소리는 기어이 밤하늘까지 울려 별꽃으로 피어난다는 심미적 인식에 다다른 울돌목의 <명량> 까지 번져간다.


한때는 이 바다에서
피 묻은 칼의 노래를 불렀으나
칼의 노래는 불가능한 사랑일 뿐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도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도 없는 곳**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길이니
오 사랑이여


메마른 삶의 지평에 화사한 꽃이 지듯
쓸쓸한 허기와 고단한 일상에 찬바람 가득한 날이면
그대, 여기 울돌목에 와서
슬픔이라든지 분노나 미움 같은 것들
죄다 저 회오리 바다에 던져두고
차라리 파도를 보듬고
한나절 울어도 좋으리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명량대첩이 있던 곳
** 김훈의 <칼의 노래> 중에서
-<명량*> 부분


왜 굳이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울돌목을 찾아와 울음론을 펼치고 있는가 의문스러웠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김없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 세상에 온전하게 태어났음을 알리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은 희망의 울음이다. 시인은 이미 그 아기의 울음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인지 모른다. “울음은 희망의 씨앗”이 의미하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시인이 단순히 아기의 울음을 비유하며 울돌목을 은유의 대상으로 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서도 <저녁 종소리>에서 처럼 내면의 상처일 수 있는 울음을 비워내려는 것이다. 쌓이고 쌓인 인간의 삶의 찌꺼기처럼 켜켜이 쌓인 “슬픔이라든지 분노나 미움 같은 것들/ 죄다 저 회오리 바다에 던져두고/ 차라리 파도를 보듬고/ 한나절 울어도 좋으리”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다 부질없다는 것이다.
시인의 시편 곳곳에서 보이는 불교적인 자비와 무욕無慾의 정신은 바다에 이르러 “별 빛 달빛으로 피어나는/ 저 파도의 꽃/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울음의 꽃을 본다”는 변주에 이르러 화양연화花樣年華에서 극치를 이룬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명량은 한때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서처럼 피안의 피를 부르며 울부짖던 울돌목의 비극적인 울음을 상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결국, 모든 것 삶의 분노나 貪欲으로 빚어진 고통苦痛의 근원인 아집我執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바른 생각의 정사유正思惟를 거쳐 무위無為에 당도할 때 그 울음은 비로소 해탈初解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비로소 시인에게는 고통의 울음소리가 아닌 환희를 예고하는 희망의 울음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했을 때, 인간의 현실적 욕망으로 벗어나려는 불교적 수행의 한 방편을 삶의 지혜로 이 시대에 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어이 하겠는가. 시인도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파도 소리가 전라도 사투리로 칭얼댄다/ 안개가 치마폭처럼 풀어 놓은 포구/ 어란이 죽었다는 바다에는/ 농게섬, 칡섬, 꽃섬 같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섬들이 젖무덤처럼 떠 있다”는 <어란> 그 한 많은 여인마저도 ‘바다와 하늘을 나누는 발장들/ 그 사이사이 핏빛 노을이 번지는 만호바다/죽음과 생업의 길이 안갯속이다”는 바다에 자신을 부리고 무위無為의 수평선이 되어있다. 그러면서도 끝나지 않는 인간적 고뇌는 보길도 <청별> 항에 들어서도 삶의 번뇌를 놓지 않는다.


내 사랑도 언젠가는
저렇듯 통꽃으로 지고 마는 동백꽃처럼
하마 긴 밤을 울지는 않으리


보길도 청별항에 와서
깨끗한 이별 하나 꿈꾸네
가뭇없이 인연의 동아줄 놓고 가는
저 붉은 동백꽃 사랑!
-<청별> 부분


누군가로부터 가슴을 울리는 울림은 어디로부터 생성되어 나에게 다가오는가를 사유케 하는 시 한 편을 골라보라면 이 시가 아닐까 싶다. 보길도라는 섬이 상징하는 의미는 아직도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향으로 존재한다. 고산 윤선도의 이상관을 빌려대지 않더라도 별유천지임은 분명하다. 속세와 고립을 자초한 별유천지에 들면 누구나 파도처럼 출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어 한동안 무진 애를 태울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그곳에 은거하며 진정한 삶에 대한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다고 본다. 사랑이 아닌 인간의 탐貪과 즐거울 락樂을 꿈꾸며 살다간 한 시대의 풍운아이자 참된 선비 정신의 표상을 꿈꾸었지만, 거기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보길도를 찾아간 시인은 그곳에 당도했지만, 뭍에서 묻어간 인간의 보잘것없는 탐욕의 상처를 쉽게 놓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상처마저도 참으로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다. 애당초부터 보길도에 들면서 자초한 절대 고립에서 오는 사물私物화된 貪欲이었으니 참으로 헛된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른 봄 보길도에 와서/ 아름다운 사랑 하나 꿈꾸네/ 애걸하지않는 절정의 생生/ 동백꽃, 그 깨끗한 사랑을” 보면서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다. 시인이 그토록 갖고자 했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상처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스스로 붉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모든 것을 거둬 가겠다는 것이다. 거둬간다는 의미는 어찌 보면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떠나가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간이기에 가진 것을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을 쉽게 놓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손에 쥔 동전 몇 닢마저도 훌훌 놓고 떠나야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때가 되면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는가를 안다. 그것이 귀거래사다. 신발 끈을 풀고 가볍게 떠날 채비를 하여야 하는 먼 훗날이 바로 오늘일지 모른다. 그렇게 떠나가면서도 다 거둬갈 수 없는 것이 있어 다행이라면 어떨까.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갈매빛 저 산등성이 바람으로나 넘을까// 오뉴월 햇볕은 흰 바위돌 위에 순은으로 빛나고/ 새들은 날갯짓을 멈추고 숲으로 가는데// 산그림자 길게 누운 방죽가에는/ 쑥부쟁이 한들한들/ 산밭에는 염소들의 긴 울음소리// 내 마음 두고 온 산마을에도/ 지금쯤 달맞이꽃 환하게 피었겠다”며 <그리운 오지>에서 인간의 탐욕으로도 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생각한다. ‘갈매빛’과 ‘산그림자’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달맞이꽃 환하게 핀 산마을은 이미 시인 혼자만의 소유가 아닌 자연 속의 전부라는 것이다. 자연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그렇다.
그것을 이미 알아버린 시인의 눈과 마음은 일정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가장 낮은 그러면서도 가장 높은 수평선의 접점이었고 스스로 수평선이 되고자 한 삶의 이상을 꿈꾸고 있다. 스스로를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한 끝없는 물음과 해답에 앞서 자연을 아우르는 불교적 관점에서 찾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의 일상이 부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없이 반복되는 자기 수행의 길이기에 그렇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반가사유적 수행은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에서도 전유 되고 있다.


어제는 평생을 갯가에서 산 어머니가
안부 대신 화랑게젓 한 보시기 보내왔다
염천에 밥맛 잃은 나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스슥 손톱만 한 게를 씹다
문득 짭조름하고 달콤한 게젓 국물이
조선 간장으로 우린 어머니의 눈물만 같아
먹던 밥숟갈 내려놓고 우두커니 앉았다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 부분


시인의 시를 말한다면 아침의 충만한 기운보다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스스로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빛에 가깝다고 본다. 서서히 사그라지다 지울 고 떠나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 같은 저녁노을에 서면 누구나 가슴이 울먹울먹해질 것이다. 김경윤 시인의 시는 바로 그러한 접경에서 바라볼 때 더 인간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누구나 어머니의 인연을 매개체로 생명의 축복을 받으며 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시적 대상으로 다가올 때는 촉촉이 젖어드는 가슴을 진정해야만 한다. 시인의 나이도 육십을 바라본다.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고단한 삶의 전경이 사랑이란 명치를 울려 시적 세계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밥상에 앉아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스슥 손톱만 한 게를 씹다/ 문득 짭조름하고 달콤한 게젓 국물이/ 조선 간장으로 우린 어머니의 눈물만 같아/ 먹던 밥숟갈 내려놓고 우두커니 앉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을 유화로 덧칠된 밀레의 “만종” 속 저녁노을로 몰려올 고요 같기만 하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서정인가 자문해본다. 신이 피조한 인간에게 엮어 놓은 인연이란 것이 참으로 모질다. 형상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그렇고 아무 생각이 없을 무념의 고요가 밥상머리에 오랫동안 맴돌기에 그렇다. 시인의 시속에 선득선득 무형의 모습으로 내비치는 고요는 무엇일까. 서쪽 하늘로 귀환하는 생의 모습일는지 혹시 몰라 난 아직도 김경윤 시인의 주변을 한참 더 맴돌아 볼 예정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지금껏 살아온 동안을 되돌아보는 반가사유의 깊은 사유 속에 든 시인을 통해 불러도 다시 올 수 없는 이 땅에 없을 어머니의 모습들을 떠올려본다. 너무나 뒤늦었지만, 어머니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그 말 한마디가 끝없이 이어질 인연의 업보라는 고리를 조금이라도 헐겁게 해줄지 모른다. 그렇지만 업보라는 인연은 꼭 인간의 일로만 맺어진 것이 아니다. 어제의 저물었던 저녁노을은 다음 날에도 또 다른 모습으로 인연이란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인연이란 것들은 죄다 촉촉해져야만 하는 것인지 둑방에 앉아 수심에 잠겨볼 일이다.


둑방에 앉아 그대를 바라보는 날이 많다
선방에 앉아 제 마음을 바라보는 수행자처럼
수시로 변하는 그대의 물색을 골똘히 바라본다
그것은 내가 그대를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이고
그대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한 번도 스스로 속을 보여 준 적이 없으니
그대는 읽어도 읽어도 뜻 모를 경전經典 같다
-<금강 저수지> 부문


시 한 편을 통해 시인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시 열 편을 읽어보면 시인의 몇 년 치의 삶을 느껴볼 수 있다. 더욱이 시집 한 권이면 시인의 살아온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시는 문학의 한 아류지만 시는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한 리얼리티이고 그 삶을 관통해주는 주술과도 같은 서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속에 내재하여있는 시적 리얼리티는 분명한 체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김경윤 시인의 지향하는 관점은 항상 아래를 바라보거나 저 멀리 수평선을 그려가며 확대되고 있다. 수평선은 단순한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접경이 아닌 시인이 꿈꾸고 있는 이상형일뿐더러 언젠가는 한 번쯤 건너야만 될 도솔천이 있는 곳일지 모른다. 어차피 우리가 믿는 불교의 궁극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미혹迷惑의 세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를 열고,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를 끊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교사다.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맑고 건강하게 키워내야 할 교육자로서 현실과 괴리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다. 그것도 슬프도록 어린 죽음들을 떠올리며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다. 그런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녘으로 노을은 오늘도 저물고 만다.
김경윤 시인은 어찌 보면 보살이 맞다. 자신의 삶을 끝없이 보시布施하는 보살 “오늘처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둑방의 풀들도 번뇌가 많은지 자꾸 그대에게로 쏠린다/ 문득 내 마음도 저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슬픈 영가靈駕를 달래는 바람의 독송을 듣는다/ 천 번을 듣고 읽으면 그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수심 깊은 그대의 이마에 잔주름이 늘고/ 천 줄 만 줄 이어지는 주름살들 사이로 노을빛이 스민다/ 뒷산 숲 뻐꾸기 울음도 흥건히 젖어 든다.”수심 가득한 삶을 서방정토로 인도하는 노을빛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시적 세계와의 소통이고 貪欲을 버리고 善心에 이를 수 있는 일체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화하고 유전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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