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사유가 지향하는 좌표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을 생각한다, 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 세끼에도 흔들림 없이 밥보다 문장을 상상력으로 일궈가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세상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더 확실한 것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어 무병을 앓고 숙명처럼 무속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알게 모르게 온몸으로 번진 문장 앓이로 긴 세월을 앓아누운 뒤에도 도통 보이지 않은 ‘시’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야 하는 고역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의 발에 수없이 사그락 대며 발굽 뒤로 밀리는 황량한 모래알들처럼 일보 전진을 위해 더 많은 모래알을 어루만지며 사막의 끝을 가늠하며 온몸으로 감각해가는 낙타의 눈빛을 상상해본다. 보이지 않는 사막의 끝은 지루하고 거친 인내와 육체 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피로에 지치지 않고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의 등이 횟수를 더할수록 굽어 산처럼 솟은 까닭을 알 것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낙타가 물의 냄새를 찾아내듯 무색무취한 일상 속에서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시적인 것으로의 환기는 그에 못지않은 고통인 것이다. 탈고를 마친 후에도 또 다른 시적 사유로의 탐색을 위한 긴장의 눈빛은 무속인의 삶과 낙타의 고된 생애와 너무도 흡사하다. 아무리 더한 고통이 따른다해도 시인의 삶을 거부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들은 붙잡고 있는 일상을 평범하게 바라보지 않고 영감을 받아 적고 그저 써갈 뿐이다. 무속인이 길흉화복을 물으려 찾아오는 사람에게 섬기는 신의 말을 전언하듯 시인도 보고 느낀 세상사를 시적 상상력으로 여백을 채워가는 것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처럼 다변하는 시대 조류를 냉정하게 고뇌에 찬 분별을 해야 한다. 그런 뒤 시어들의 조합을 이룬 문장을 놓고도 쉽지 않은 판단을 해야 한다. 제호를 거듭하는 계간 ‘문예감성’을 통해 시인들의 사유 속 상상력으로 펼쳐낸 시어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낮이 잠을 깬다 허공의 밑줄 위에 물살이 인다 소리가 나는지 어깨를 저미는 바지랑대 금 간 마디마디에 말라가는 뼈대를 세우고 있다 휘어진 긴장으로 오래된 숨을 참으며 비틀어진 간섭에도 꽉 물며 떠다니는 자의 습성을 외면한다 하루를 죄어가며 마른 몸살을 일으킨다 칼춤 추는 햇살은 어느새 뒷물로 빠져나가고 헹구다만 거스러미의 나날들 -아직 바깥입니까 -경계선 아래에선 아무 것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이탈한 각질들이 공중의 더께를 쌓아올린다 번갈아 마중하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단절된 자락의 페이지들 너울이 펼쳐지는 행간을 힐끔거리며 마디마디의 고뇌를 꿰찬다 천공을 가로지를 수 없는지 윽박지르며 탑의 한 귀퉁이에서 작살처럼 꽂아 든 지느러미 쩍쩍 달라붙은, 뼈 기둥 -<바지랑대/ 박봉철> 전문 ‘바지랑대’를 기억하는 삶들이 많지 않다. 예전 주거 문화의 일반적 형태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당시 세대만이 아슴해진 추억을 기억한다. 시골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엄마의 손으로 빨래한 옷이 햇살 받아 말라가는 풍경은 흔한 정경이었다. 물먹은 빨랫감을 감당하지 못해 늘어진 빨랫줄을 받히고 선 간짓대가 ‘바지랑대’다. 시골마다 널따란 마당 한가운데쯤에 꼭 하나씩은 빨랫줄을 받히던 ‘바지랑대’가 있었다. 당시는 가족 수에 따라 빨래 양이 많아 바지랑대 두 개를 받히는 집도 있었다. 그마저도 아름다운 삶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아이들이 한둘이지만, 60년대나 70년대만 해도 집마다 아이들이 많게는 여덟 명도 흔했다. 그만큼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대가족을 이루며 살던 시절이다. 아이들 옷을 매일 같이 빨래를 해 주렁주렁 널면 힘에 부친 빨랫줄도 축 처져 버리곤 했다. 처진 빨랫줄을 떠 받친 ‘바지랑대’니 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지방마다 명칭이 다르겠지만, 시인은 그것을 보며 자란 추억의 세월을 떠올린 것이다. 낯설지만 ‘바지랑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아름다운 서정을 담고 있는 시적 상관물이다. 요즘은 거의 사라져서 볼 수 없게 된 그야말로 시골스런 풍경을 환기시키고 있다. 박봉철 시인이 주목한 ‘바지랑대’는 바뀐 주거 환경에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대낮이 잠을 깬다 허공의 밑줄 위에 물살이 인다/ 소리가 나는지 어깨를 저미는 바지랑대/ 금 간 마디마디에 말라가는 뼈대를 세우고 있다”며 현대인의 지친 일상을 지지해주는 ‘바지랑대’는 무엇일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팽팽한 삶의 연속에서 오는 피로감은 회복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현대인의 삶의 일상이 된 속도와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는 강박에서 이탈할 수도 없는 딜레마는 크다. 지친 사람들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하고, 고단한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하루를 죄어가며/ 마른 몸살을 일으킨다”는 ‘뼈’는 정신적 의지의 ‘의식 속 ’바지랑대’이다. 일제 강점기 때 피난을 내려오다 일본인에게 붙잡혀 살기 위해 식모살이를 했다고 입달고 말하던 당신 열 네 살 쯤이었다지 엄순덕, 대신 이무진 독구라고 불리우며 밥때가 되면 정확하게 밥을 차려 올렸다는 당신 1분이라도 늦으면 그 어린 몸 여기저기 불쑥 불쑥 찌르며 비집고 나오는 이무진독구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편지라도 하면, 이장집으로 편지를 들고가 쓱 내밀며 읽어 달랬다는 당신 산다는 건 또 한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에 대해 이아기를 하다 조용히 구겨지는 거 “그래 그렇지 그랬구나” 매일 밤 책을 읽어주면 대답 대신 비슷한 추임새를 넣다가 잠이 들곤 하던 당신 옆에 같이 잠들어 버린 책 한권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엄, 순, 덕, 써주어도 읽지 못하던 당신의 열 네 살 <이무진(厳順徳 독구/ 이윤희> 전문 살다 보면 주변에는 우여곡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기구하거나 운명 같은 순간이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본명이 ‘厳順徳’이었던 ‘이무진 독구’씨가 그런 경우다. 그 시대적인 배경이 일제 강점기다. “일제 강점기 때 피난을 내려오다/ 일본인에게 붙잡혀/ 살기 위해 식모살이를 했다고/ 입달고 말하던 당신/ 열 네 살 쯤이었다지”라는 것을 보면 당시 국내외적으로 첨예한 각축이 벌어지던 시대를 살며 겪은 역사적 산물이 운명이 된 것이다. 당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피란을 온다는 것이 되려 생애 정신적인 고통이 된 것이다. 거기에 이름도 달리 불려지고 밥때를 꼬박꼬박 챙겨 올려야 하는 어린 나이의 ‘厳順徳’에게는 고역이자 정신적인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강요된 노역에 시달려야 하는 ‘厳順徳’이 ‘이무진 독구’라 불리게 되면서 본래의 자신은 잊어야 했다. 한참 예쁨 받고 성장해야 할 나이에 지독한 일본인을 만나 성장보다 비애에 찬 고통으로 좌절에 익숙해져야 할 운명을 맞은 것이다. ‘이무진 독구’로 살아오면서 심리적 자존감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 같은 비통함이 가슴을 억누르면서 평생 지워지지 않은 한이 된 것이다. 특히 잘못하면 가차 없는 무시와 학대에 시달리면서 암울한 현실을 감당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귀한 집 딸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생애 긴 아픔을 간직하고 살게 된 삶의 서사가 안타까운 가슴을 울린다. 강제된 일제 치하에서 ‘엄순덕’뿐만이 아닌 우리 민족의 슬픈 과거였던 시대적 서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역사의 과거로만 기억할 수 없는 현재와 미래까지를 생각하게 하는 담론이다. 일본 사람에게 끌려가 식모살이로 어린 세월을 보낸 뒤 당신의 이름 석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엄순덕’이다. 늦게나마 책을 읽어주면 함께 공감하며 감동해가던 ‘엄순덕’이다. 그러다 잠이 들면 영락없이 철없는 어린아이만 같던 열네 살 순정한 소녀로 되돌아간다. 나이 지긋해져 지나온 세월이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세월이 된 ‘이무진 독구’는 어린 시절 경험한 지독한 시간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아온 시간을 훌훌 털어내야만 한다. ‘엄순덕’의 생애를 통틀어봐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해 길이 끝나는 외딴 곳까지 왔다 먼저 이 곳에 와 있던 키 큰 살구나무를 대문삼아 울타리가 없는 집이라 하였다 대처를 떠돌았으나 여전히 이 자리에서 문설주는 주저앉고 헛된 지식의 밤하늘은 스러지는 별똥별을 내려주었다 어느덧 낡은 집에 오가던 인적은 사라지고 경계가 사라진 벽과 문턱 너머로 꽃이 아니라고 내쳐진 봉두난발의 사내처럼 개망초가 부끄러웠다 살구나무가 흐드러지게 우두커니 눈물을 떨구던 봄날 숲으로 가야겠다 -<임서기林棲期/ 나호열> 전문 시가 말하고자 하는 행간의 주조가 가볍지 않다. 나이가 차면 세상 보는 안목이 깊어지는 법이다. 누가 그렇게 살라며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억척같은 삶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입신을 하고 양명을 이루는 데 온갖 정열을 쏟고 산다. 그 살아가는 여정은 그야말로 혼신을 다한 사투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무언가를 이루며 살기 위해선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이로 태어나 성장하고 어느 순간 훌쩍 커 부모 곁을 떠나고 다시 가정을 이뤄 아이를 키워내는 생애 주기는 생명처럼 유전이라는 영속성을 가졌다. 그렇게 앞만 보며 치열하게 살아온 어느 땐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다 훌훌 털어 가벼워지고 싶을 때가 있다. 나호열 시인의 ‘임서기林棲期’는 그런 심리적 반성에서 발현한 각성의 전형이다. 화자는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해 길이 끝나는 외딴 곳까지 왔다”며 자신이 살아 온 삶의 좌표를 확인한다. 그 지점은 단순한 위치적 좌표가 아니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 때문에 떠난 고향(마을)을 잊지 못한 그리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사람 곁을 떠났지만, 사람 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생의 막다른 골목처럼 외딴 곳에서 선 화자다. 화자가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되돌아가면 다시 처음 떠난 곳(고향 마을)으로 회귀할 수 있다. 확실한 징표로 기억한 ‘살구나무’와 ‘울타리가 없는 집’도 기억하고 있다. 돌아와 보니 집 대문간 살구나무가 아득한 옛집임을 확인시켜준다. 오랜 시간 밖으로만 나돌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낸 탯자리다. 그토록 입신양명을 위해 혼신을 다해 쌓아 올린 지식도 다 부질없다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무언가를 이루려 출가한 시간들이 허무(허망)하기 그지없었다는 고백이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한 각성을 충동하고 신앙적 성찰에 도달하게 했다. 그곳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 즐겁고 행복한 삶을 추구했지만, “어느덧 낡은 집에 오가던 인적은 사라지고/ 경계가 사라진 벽과 문턱 너머로/ 꽃이 아니라고 내쳐진 봉두난발의 사내처럼/ 개망초가 부끄러웠다”며 그렇질 못했음을 진술하고 있다. 화자가 의도적으로 힌두교에서 말하는 삶의 행로를(범행기梵行期, brahmacārin -->가주기家住期, grhastha -->임서기林棲期, vānaprastha -->유행기遊行期, sannyāsa) 인용한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이 신앙의 수행처럼 위중하다는 각성일 것이다. 화자가 들어선 ‘임서기林棲期’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다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숲’에 든 것처럼 무욕에 도달하기 위한 초월적 심신 수양까지를 함의한다. 지금껏 살아온 삶의 지향이 욕망에 대한 갈망이었다면 앞으로 살아가며 정진해야 할 무욕적인 삶에 대한 지향 의지를 선언하고 있다. 화자가 종교적 엄숙을 좌표 삼아 언명한 삶의 모습은 전반적일 것이다. 이 시가 심정적 공감을 더해 준 이유가 행간을 넘친 문장의 깊이를 넘어 신앙적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살구나무가 흐드러지게 우두커니/ 눈물을 떨구던 봄날/ 숲으로 가야겠다”라고 말한 나호열 시인은한 결행을 미룰 수 없다는 선언이다. 환절기 감기 같은 파파라치 물비린내 풍기는 은밀한 달빛처럼 붐비는 동성로 걸어 보아도 저문 신천 강물 옆구리 끼고 달려도 나를 유배시키는 작은 섬 몸 안 깊숙한 곳에 잠복해 있다가 비 오는 어두운 골목길 돌아설 때 늦은 시간 혼자 차가운 밥을 먹을 때 꾸역꾸역 목젖을 누른다 내 손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 그대만이 달래줄 수 있는 울적한 어른아이가 가끔 출구를 찾지 못한 새인 양 유리창에 이마를 부딪는다 -<우울한 허밍/ 김건화> 전문 ‘우울한 허밍’은 관념이 사유를 지배한 대가다. 낭만처럼 다가온 사랑도 사람으로 비롯된다.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닌데 화자는 ‘우울한 허밍’이라고 자기 심정을 토로해버렸다. 그런 연유로 우울을 상상하며 시적 상실감의 동인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재밌는 것은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우울할 정도는 아닌 심정을 완만한 서정으로 드러낸 것이다. “환절기 감기 같은 파라라치”도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한번 오면 기운을 다 빼내고서야 빠져나간다는 것에 반길 일은 아니지만, 감기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 지수를 가늠하고 몸에 대한 소중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화자도 그런 파파라치를 은근히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속내를 “물비린내 풍기는 은밀한 달빛처럼/ 붐비는 동성로 걸어 보아도/ 저문 신천 강물 옆구리 끼고 달려도”라며 은근히 심정적인 해소를 기대한 감성을 이미지화 하고 있다. 그 원인은 자꾸만 자신을 가두는 무언가가 정신적인 영역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사실 콧소리로 내는 허밍은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발성이다. 흔히 콧노래를 부른다면 누구나 뭐 좋은 일 있냐고 묻곤 한다. 화자는 가슴 안 혼자만의 비밀한 사연을 안고 있다. 그런 연유로 동성로를 걷고 신천을 끼고 달려보지만, 억누르고 있는 심정적 요인이 마음먹은 대로 거둬지지 않는다. 화자가 겪고 있는 심리상태가 시적인 상상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면으로 더 깊숙하게 숨겨버린 ‘혼자’라는 고독감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몸 안 깊숙한 곳에 잠복해 있다가/ 비 오는 어두운 골목길 돌아설 때/ 늦은 시간 혼자 차가운 밥을 먹을 때/ 꾸역꾸역 목젖을 누른다”는 것처럼 예전처럼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럴 때 비음 섞인 허밍(콧노래)으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 보지만, 쉽게 기분 전환을 이루지 못한다.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심정적 해소가 완전하게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자는 우울한 밤을 보내고 있지만, 그런 날도 길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로 갇힌 시가넹 대한 보상은 아니지만, 완화를 실행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꽃 지고 나면 여름이 올 것이고 개방적인 활동을 누리다 보면 마음이 더없이 환해질 것이다. 여름은 혼자만의 시간보다 산과 강, 바다로 복작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나아가야 하는 계절이다. 유리창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보다 유리창문을 열고 만나는 신록 우거진 산과 들은 마음 안 감성을 한껏 부풀게 할 것이다. 지금껏 시인들이 시편을 통해 누구나 할 수 없는 시적 풍경을 살펴보았다. 풍경 속에 깃든 시인의 사물적 사유가 우리의 함께 할 목록들이란 것을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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