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에서 울려 퍼지는 맑고 따뜻한 저음의 메아리
김규성 (시인)
현대를 일컬어 문명의 지각변동이 일고 있는 신 유목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환기적 패러다임을 강조해도, 뿌리깊은 산업사회는 오히려 더 악랄하고 교활하게 세상을 고문하며 타락시키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그 이란성 쌍둥이이다. 그런데 두 쌍둥이가 나란히 걸을 때는 건강하고 명랑한 사회를 이루지만, 한낱 수단일 뿐인 자본주의가 오히려 그 목적인 민주주의를 깔아뭉개고 수단화(일방적 독주)할 경우, 세상은 병들고 각박해진다. 현대는 가증스런 탐욕의 걸신으로 타락한 자본주의가 무기력한 들러리이자 노예로 전락한 민주주의를 핍박하며 최후발악이라도 하듯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의 패륜적 약육강식을 용병으로 거느린 황금만능의 악화가 호혜적 공존의 근거인 이성과 인륜도덕의 양화를 내몰고 있다.
산업사회는 규격화, 분업화, 동시화, 집중화, 대형화, 중앙 집권화를 구조적 특성으로 한다. 그 중에서도 이 땅의 중앙집권화는 남북 양단도 모자라 남쪽조차도 벌집과 폐허로 양분하고 있다. 이제 전라도와 경상도의 티격태격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간의 사활을 건 전쟁이 허울 좋은 대한민주공화국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가만히 앉은 채로 '유령의 마을'에 유배를 당하게 된 영호남의 잔류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적전봉합의 공동운명체로 내몰린 역사적 아이러니를 냉정히 곱씹어야 한다.
문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실체도 국적도 없는 언어와 사고, 정서, 감각 그리고 얄팍한 상술로 무장한 소수 문화엘리트들이 ‘새로움과 다양성’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에게 서구가 중앙인 것처럼 그들은 변방으로 격리 당한 지방의 성스러운 중앙이다. 그들은 껌처럼 씹고 버린 서구의 유행 사조 뒷구멍을 핥으며, 그 썩은 이삭을 주어 덧칠하고 모방한 얼치기 지식을 무기로 끊임없이 중앙권력을 생산하여 독식한다. 그나마 몇몇 지방에서 활동하는 중견들의 작품에서도 지방 특유의 문화나 정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벌써 중앙의 권력에 편입되어 문단의 천편일률적 표준어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차르트를 통하여 짤츠부르크를 알게 되었듯이 다빈치의 피렌체를 떠올리고,『빨간 머리 앤』의 저자인 몽고메리 덕분에 그의 고향인 캐나다의 조그마한 섬 마을을 기억한다. 영랑의 강진, 이효석의 봉평, 한하운의 소록도, 조정래의 벌교 그리고 소월 하면 정주와 삼수갑산이 떠오르는 것 역시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해남은 윤선도를 비롯하여 시화에 두루 능한 윤두서, 조선 중기 삼당시인의 하나로 옥봉집을 남긴 백광훈, 미암일기의 유희춘, 식영정 사선 중 하나인 임억령 등 절세의 문장들이 시가의 꽃을 피웠듯이, 근자의 김남주, 고정희, 김준태, 황지우를 낳은 천혜의 詩鄕이다. 그리하여 기라성 같은 이름만으로 모름지기 문단의 중앙이고도 남는다.
그 면면의 명맥을 명줄처럼 우직스럽게 움켜쥐고 가꾸어 가는 시인이 김경윤이다. 그는 서울 중심인 중앙문단의 위력과 유혹에 위축되거나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남도 특유의 토착정서와 의지, 언어, 가락을 살려나간다. 참여시가 ‘한 시절의 낭만으로 쇠락’해 가는 아픔을 딛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절실한 문학의 사회참여를 추구하는 한편, 모국어의 도살장인 외래시풍의 농단과 횡포에 시들시들 병들어 고사해 가는 전통 서정시를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한 보석으로 갈고 닦는다. 그 일단의 결실이 64편의 시편 중 첫 장을 여는 시,「신발에 대한 경배」의 마지막 행을 제목으로 한 시집 『신발의 행자』이다. 상식적 어법으로는 행자의 신발이 맞다. 그런데도 굳이 신발의 행자라고 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 수드라 계급의 상징인 발은 우리 몸에서 가장 낮은 데 위치하며 제 수십 배나 되는 몸집을 실어 나른다. 그토록 벅찬 짐을 싣고 지저분한 길을 쉴 새 없이 달려야하는 풍찬 노역이 발의 숙명이다. 그런데 시인은 발보다도 더 낮은 밑바닥에서 발을 떠받치는 신발의 '행자'가 되려는 것이다.
신발장 위에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다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장行狀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에 경배하는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다.
―「신발에 대한 경배」전문
그는"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신발에게 경배하는 저자세와 下心으로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을 신고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촛불도 향도 없"이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닌다. 그 길은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과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으로 상징되고 구체화하는 인고의 세계이다. 위장된 겸손은 교활한 오만임을 잘 아는 그는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의 "거룩한 생애를" 경전 삼아 가장 낮은 자세로 정진하려는 것이다.
신발은 이동의 도구이며 길의 표적이다. 그 행자를 자초한 시인은 "미래는 확실하고 그 끝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길을 찾아 떠도는 나그네이다. 그리고 행려 중에 허락되는 휴식처는 "추억의 거룻배 한 척" 같은 여인숙이다
늦은 밤 천변을 따라 귀가하다 보면
버스터미널 건너편 어둑한 골목 끝
늙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여인숙 불빛이
가물거린다 밤늦도록 골목 어귀에서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꽃 다 진 복숭아나무 그림자만 서성거리고
사람의 발길 뜸한 낡은 기와지붕
처마에 귀떨어진 간판불 홀로 낯붉히는
금강여인숙 내 스무 살 먼 기억 속
시간의 모퉁이에서 창문마다 복사꽃이 핀다
도화살이 들어 떠돌던 만행卍行 의 길
미래는 불확실하고 끝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취한 말馬처럼 바람에 갈기를 세우던 시절
얼룩진 카시미론 이불과 찌그러진 양은주전자
꽃무늬 물컵 하나
내 영혼처럼 놓여 있던 좁고 눅눅한 방
침침한 형광등 아래서 뒤척이던 시간들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짙은 분 냄새를 풍기는 늙은 창녀처럼
어둑한 골목 끝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저 추억의 거룻배 한 척
오늘은 어느 삼류 인생이 지친 몸 끌고 와
쥐오줌 얼룩진 천장 아래서 긴 밤을 자고 있는지
복숭아나무 잎사귀 같은 창문들이 캄캄하다
* 196,70년대 활동했던 미국의 전설적인 락 그룹 The Doors의 노래 "Roadhouse Blues 중에서
― 「금강여인숙 」전문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이루어지는 그의 여정은 “복숭아나무 잎사귀 같은 창문들이 캄캄하”고 “쥐 오줌 얼룩진 천장 아래서” 걸어온 길과 또 걸어야할 길을 떠올리며 “ 긴 밤을" 때우는 것처럼, 길을 갈 때보다 잠시 길섶에 서 있을 때 더 잘 드러난다. 길 위의 시간이 재창조되는 공간은 "늙은 고양이"나 "짙은 분 냄새를 풍기는 늙은 창녀처럼/어둑한 골목 끝에 웅크리고 앉아”있지만 그래도“시간의 모퉁이에서 창문마다 복사꽃이”피는 “금강 여인숙”이다. 행자의 신발을 “신발의 행자”라고 뒤집어 새로운 전도몽상의 가치 체계를 세우듯이, 낡고 후미진 여인숙에 '금강'이라는 불퇴전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것은 날이 새기 바쁘게 영구불변의 여의보주인 '금강'을 찾아 나서기 위한 자기최면이며 주술이다.
그렇게 길을 나선 그는 고적한 산방에서 마주친 생쥐를 죽이고 "내 지은 죄 너무 많은 것 같아/세상사는 일 불현듯 서늘해"(「그 밤의 살생」)지는 죄책감에 시달리느라고 잠을 설치거나 "뿌리가 흔들리면서부터 자꾸 생이 불안"(「풍치」)한 풍치를 앓기도 하고 "날개 죽지가 상한 새처럼/날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생의 길 위에 말울음 소리 들리는"(「통점에 불을 놓다」) 길을 "이스트를 넣은 풀빵처럼 부풀어/첫날밤의 신랑처럼 탱탱”한 “박동의 설레임”(「빈 수첩들」)으로 재무장한다.
그런 시인의 발길이 이르는 곳은 "해우소 뒤뜰 동백 숲에 후루룩 동박새 날고/새들 날아간 자리마다 헉헉 꽃이"(「미황사 동백꽃」)지고 "눈발이 성성한 한겨울인대도 내소사 대웅전 창살에 국화꽃 만발했다기에 어두커니 염불소리 밟고 꽃밭에"(「내소사에서의 夢遊 」)가고, 이제 막 출가한 행자가 장작 패는 소리에 "겨울 한낮 산사의 적요를 깨고 텅텅 산이"「나무에도 길이 있다」)우는가 하면 “새벽 목마름 달래려고 찾아간 세심당 돌샘"의 "저 건너 법당에선 낭랑한 새벽 독경소리가 잠든 산을 깨우"(「달빛 정사」)고, 사나흘 눈 속의 적막한 산방에 들어 "누가 하늘에 법고를 달아 두었을까"(「달마에 들다」) 헤아리는 산사이거나 "이름을 조용히 부르면/부드러운 두 입술이 만나 입안이 황홀하게 열리는"(미조, 그 밤의 夢幻)미조항. "표적을 잃어버린 마음속 화살들/저문 바다에 조약돌로 날려 보"(「그 겨울의 궁항」)내는 궁항. "푸른 허벅지 드러내놓고 유혹의 눈빛을 보내는" (「그대 땅끝에 오시려거든」) 엄남포 등의 바닷가 마을이다.
바슐라르는 “시냇물이나 강이 흐르는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물에 의해 그 무의식이 지배 된다”고 했다. 시인이 “취한 말처럼 바람에 갈기를 세”(「금강 여인숙」)우고 떠도는 도처는 원초적 기억의 배경인 산사나 바닷가 마을이다. 그리고 무수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 깨달은 것은 "도화살이 들어 떠돌던 만행"(「금강 여인숙」)이 결국 범인의 현장 확인 심리에 가까운 ‘제자리에서의 여행’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가 대흥사와 미황사 등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사찰을 낀 땅 끝에서 낳고 자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무의식의 심연에 강렬하게 아로새겨진 산자수려의 指紋은 특별한 발원이나 수행도 없이 그를 저절로 불교적이게 했듯이,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아련하고 아늑한 서정의 곳간 즉 ‘은밀한 자신의 골짜기’를 향하도록 재촉한 것이다. 따라서 “가을 저녁”에 “숲으로 가”면서도 "저 산아래 마을에선 누가 이 세상을 떴는지"「숲으로 가는 가을 저녁」)걱정할 수밖에 없는 습관적 조바심은 그의 胎生的이며 生態的인 귀소본능이다. 첩첩산중과 망망대해를 울타리로 둥지를 튼 마을에서 越境보다는 安着에 익숙해진 그의 내향적 성향은, 철철이 갈아 신은 신발이 무심코 입 언저리를 맴도는 유행가처럼 바깥나들이를 나서도 끝내는 심령술사처럼 귀성객의 관성을 부르고 마는 벼릿줄이다. 그렇듯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무의식의 조종과 더불어 발등의 불같은 의식적 실체인 가족은“신발의 행자”인 그가 싣고 가야할 ‘몸’으로, 아무리 탁발 행각의 나그네 길을 우겨도 도리 없는 천형처럼 길을 막는다. 가족은 시인이 새 신발을 신고 마냥 달리고 싶은 원심력을 한사코 아등바등 꿇어앉히는 구심력인 것이다.
아침 밥상에 굴젓이 올라왔다
흰 보시기에 담긴 굴젓이 울다 지친 눈동자 같다
뻘밭 같은 생生을 살아온 울 엄매를 닮았다
남들 앞에선 늘 굴 껍데기처럼 강해 보였지만
당신의 생애도 팔 할은 눈물이었다
스물 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칠순이 넘도록 갯바위에 쪼그려 앉아 굴을 까는
울 엄매 수심愁心 깊은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울다 갔을까
그 얼얼한 세월동안
생굴 같은 가슴속도 죄 삭았으리
썰물 진 아침나절부터 밀물 드는 저녁 무렵까지
죽은 막내 생각
부도난 둘째 걱정
전화 한 번 없는 무정한 큰 놈 원망하다
혼자서 글썽해졌을 그 눈동자, 생각느니
내 오십 생애도 울 엄매 눈물을 파먹고 산 세월이었구나!
울다 지친 눈동자 같은 어리굴젓
아침 밥상 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어리굴젓」전문
그에게 가족이라는 일차적 현실은 "죽은 막내 생각"에다 "부도 난 둘째"와 전화조차 제대로 못할 만큼 살기 바쁜 큰아들 걱정으로 "뻘밭 같은 생生을 살아온 울 엄매" 와 “새벽 같이 논에 나가/경운기와 넘어져 모로 누운 아버지"(「(갑골문」)탓에 아침 밥상의 "흰 보시기에 담긴 굴젓"을 보고도 "울다 지친 눈동자 같"다고 할 만큼 고달픈 서사이다. 한편 어머니가 "어린 손자들 간식거리라도 하라며 비료포대에 단도리해서 보내주신 주먹만 한 단감"이 "오래 잊고 살았던 생의 뿌리를 다시 들어 올려 주"(「감나무 아래서의 참회」)고 "이제 막 말문을 틔운 세살베기 조카놈이 낮잠 자다 일어나 잠지 가리키며 쉬, 쉬하는 소리에 툇마루에 앉아 고추 다듬던 칠순 노모가 득달같이 안방으로 달려"(「쉬」)오는 가하면, 짬짬이 아들과 어울려 노는 아빠가 “햇병아리의 죽음 앞에 서럽게 우는 아들을 달래며 죽은 병아리 무덤을 만들어 주는”(「병아리 무덤」)등 정겹고 따뜻한 서정이 넘친다. 그렇게 늘 가슴 졸이며 희비의 쌍곡선을 그려 가는 와중에도 그는 “이슬방울 같은 아이들 등에 업고/가을바람처럼 살아온 아내의 손등"(「이슬의 방」)을 어루만지며 "신록이 꽃보다 아름다운 날/아이들 집에 두고 아내와 함께 봄 산에 드”(「봄 산에 들다」)는 호젓한 둘만의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시인에게 가족이 미시적 과제라면 거시적 테제는 늘 조국과 민족, 그리고 남도의 독특한 서정이 넘실거리는 고향이었다. 저 80년대, 자연발생적으로 각별한 지조와 의식을 체득하게 된 남도의 젊은 지성들이 그랬듯이 시인도 운명적으로 사회정의와 민주, 자유에 대한 열정이 몸에 익었다. 그가 그토록 몸을 낮추어 극진히 경배한 신발은 여전히 궁핍과 억압 속에 내버려진 민중이었다.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신발에 대한 경배」)라고 노래했듯이 그가 무수히 신발을 갈아 신고 걸어야 할 “행자의 길”(「신발에 대한 경배」)은 소승적 구도 행각이 救世의 우주적 여정(민중을 향한)으로 보편화한 부처의 길에 다름 아니었다.
시집의 표지를 보자. 신발처럼 긴 다리를 뻗고 있는“文”자는 마치 오랜 혈서 같다. 허무의 밀사인 무중력 속 원심력을 좇기 바쁘던 나그네의 표표한 行旅를 거두고, 원심력과 구심력의 경계에서 ‘저잣거리에서의 좌선’을 통한 下化衆生에 눈 뜬 시인이 신발에 대한 경배의 자세로 행자의 길을 나설 때의 걸음걸음은 피보다도 더 끈끈하고 뜨거운 혈서였다.
아래의 시“나락의 다비식”은 이 나라 역사의 신발을 이루어온 ‘민중의 행자’가 유구한 역사에 바치는‘민중보고서’이며, 신조차도 외면하는 암담한 현실에 바치는 처절한 祭文이다.
겨울 햇살이 거실 깊숙이 파고드는 주말 오후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강 건너 불 보듯
불타는 나락들을 본다, 검게 타들어가는 나락가마니
속에서 나락那落으로 가는 검은 낟알들 톡! 톡! 튀며
이승의 마지막 화두를 던지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 할!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분신焚身하는 나락들, 거리는 야단법석이다
평생 나락을 경배하며 살아온 수천의 농자들이
색색의 만장에 나락경經 새겨들고 다비장 주위에 모였다
이교도 같은 병사들이 행렬을 막고 선다
경문經文을 외우듯 소리치는 군중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세례도 아랑곳하지 않고 깃발을 흔들고 있다
나락의 덕으로 살아온 늙은 농자들 몇은 검은 잿더미 앞에서
이승의 인연因緣 어쩌지 못해 끝내 오체투지로 쓰러진다
화염이 시들고 나락가마니가 타고
나락의 사리들이 서너 말도 넘게 쌓여 있다
일순 방안에 연기가 찬 듯 화면이 희뿌옇게 흐리다
농민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
죽비 소리 같은 목소리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내 등짝을 친다
햇살이 거실에서 빠져나가고 창 밖에 어둠이 오고 있다
― 「나락의 다비식 」전문
시인이 목줄을 대고 있는 해남 벌이 아니라도 나락은 아직도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생명의 원소요 상징이다. 그 나락이 불탄다. 그것도 농민들이 손수 지른 불에 의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잿더미"로 변하는 것이다. 피땀으로 가꾸어온 수확을 불태우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극단적 절망의 표현이다. 그 참담하고 억울한 "분신焚身"의 "다비장" 주위에 "평생 나락을 경배하며 살아온 수천의 농자들이/색색의 만장에 나락경經 새겨들고" 삼삼오오 몰려들어서는 "이교도 같은 병사들"의 "불 세례와 발길질에" 쓰러지는 참상을 지켜보며, 그는 "농민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고 외치는 "죽비 소리가" "등짝을 치"는 고문과도 같은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그리하여 불에 타 널브러진 나락의 검은 낟알들을 두고 "나락의 사리들이 서너 말도 넘게 쌓여 있다"고 너스레를 떨듯 비극적 수사를 동원한다.“나락의 다비식"은 농민을 農子로 높여 부르는 시인이 그들과 공동운명체로써 토로하는 분노의 풍자적 역설이지만, 한편 한 줌의 무참한 재로 스러져 가는 원혼을 달래주고 승화시켜주기 위한 진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락이 민중의 상징이라면 불타는 나락은 민중의 현실이다.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언어에 오염돼 오로지 강자들을 위한 일방적 경쟁만이 사회정의로 강요되는 지상의 율법 속에서, 현대판 노예와 들러리의 삶을 꾸리다가 그마저도 낡아 헤어진 신발처럼 용도 폐기되어 '귀찮음과 무관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가는 민중들. 이제 그 '민중'이라는 절체절명의 역사적 대명사조차 '현대어 사전'에서 낡고 닳아빠진 死語로 지워지려는 판국에 그는 그 구구절절의 '숨 가쁜 리얼리즘'을 사리로 구워 결코 과거가 아닌 현대와 미래의 언어(經)로 영구히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시집 제목을 일부러 신발의 행자라고 한 속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그에게 민중은 “어두운 골방에서 제 핏줄 같은 실을 뽑아/집을 짓는 거미처럼 혼신의 노래를 부르던/순결한 사내들”(「빈 방」)이자 “아직은 쉽게 화해할 수 없는/가을밤 일편명월처럼 투명한 슬픔”(「불혹의 노래」)이며 “배고픈 조국을 버리고/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돌아/배부른 남쪽으로 온/춘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춘희」)이며“단간 셋방 어두운 골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산다는 우리 반 지진아 순화네 집”(「수선화」)인가 하면 “팔레스타인 난민처럼 거처를 잃은 새떼들”과 “밤새 가슴 파헤치던 굴삭기 소리에/핏빛으로 흥건히 젖은 황새울”(「황새울 편지」)이다.
웬만해서 시인은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속삭이듯 부드러운 저음 속에는 단호하고 엄정한 결기가 서려 있다. 조용한 가운데 묵묵히 꼭 할 일만 강단지게 솔선하는 외유내강은 마치 그만의 전매특허 같다. 빈 수레가 요란한 유명무실을 극도로 경계하는 자율적 내공의 소산이다. 그러니 감때사나운 바깥을 부단히 안으로 갈무리해온 그의 시는 볼륨을 몇 옥타브 높여서 읽어야 비로소 그 성량과 음폭이 살아나 제 맛이 난다.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던 시가 내부의 환원적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 현대시의 특징 중 하나라면, 그 대답은 일찍이 말라르메가 입증한 것처럼 동전의 양면 같은 우주와 자아의 이원 일차적 동일성을 소홀히 한 편벽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사물의 외부적 표상을 단념하고 내면의 언어에 천착한다 하더라도 그 표현에 있어서는 결국 외부에 노출된 사물을 언어의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중앙 시인들이 외부의 객관적 상관물을 거두고 내부적 자폐의 언어유희를 좇아 소위 난해시의 함정에 탐닉하듯 빠져드는 추세 속에서, 김경윤 시인은 소중한 유산이자 축복인 남도의 정서와, 다감하면서도 치열한 내면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아우름으로써 정경일치의 시적 보편성을 다소곳이 지켜가고 있다.
지방색은 곧 진부, 낙후, 반동으로 외면당하는 문학의 중앙집권 풍토 속에서 그는 고독하다. 갈수록 각박하고 경박하고 천박한 세상. 조국, 민족, 민주, 민중, 정의, 인륜도덕, 진정성 등의 순결한 모국어들이 시쳇말처럼 '시장의 언어'에 밀려 무관심의 쓰레기로 처박히는 거대한 난기류 저만큼, 답답하고 우울한 단기필마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는 그는 더욱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행자의 길’이다. 그러기에 어두운 밤일수록 작은 불빛도 소중하고 더 빛나듯이 그는 고독한 만큼 따뜻하고, 의미심장하고, 경건하다. 오늘따라 당분간 끊기로 한 소주가 그립듯이 그가 있어서 술맛이 나는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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