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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배추를 여니 나비 외/김일곤

에세이향기 2023. 3. 9. 11:36

배추를 여니 나비 외

 

김일곤

 

 

아내는 배추를 열어 노랑나비, 한마당 가득 날린다
나는 철없이 나비를 타고 놀다
샛노란 문양 노랑노랑 읽다가
고향집 마당가에서 치자 꽃물들이던 누이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쪽진 가르맛길 달려도 보다가 문득
뚱딴지처럼 김장배추가 되고 싶은 거다
아니, 아삭아삭한 김치로 익고 싶다


싸락눈표 소금에 절여진 나는 채반에 다소곳 누워 순명을 고한다
설폿한 날개 밑에 양념이 입혀지고 소가 박힌다
항아리 안에 어긋 나긋 누워서
폭 익으려면
옴짝달싹하지 말라고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다
갑갑하고 돌연 서럽기도 하였으나
꾹 참아내며 그냥 한데 섞여 가라앉고 부드러워지며
숙성되기 간절히 바란다


맵고 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함부로 설익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갖은 양념에 폭 익은 나,
질항아리에서 탈출
끼니마다 나비의 날갯짓으로, 애초롬한 얼굴로,
가족들 둥근 상위에 오른다


긴긴 삼동 고구마 삶기 맞춤한 날은
내 샛노란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져도 좋아
가족들 손끝에서 훨훨

 


윤달

 

 

박음질이 선명하다
오직 앞을 향해 나아갈 뿐
뒷걸음칠 수도 옆길로 들 수 없는 바느질
깁고 꿰매는 수행법이 인생을 닮았다
사는 일도 옷 짓는 일 같아서
자식 기르는 일 날실로 삼고
세월을 씨실 삼아 한 땀 한 땀 짜 왔다
치자 빛 삼베옷 펼쳐놓고
동정과 옷섶 매만지며 왜 웃곤 하실까
연꽃 입술 초승달 눈썹 그려서
시집 온 날처럼 가시려는 걸까
윤사월 햇살 좋은 툇마루에 동그마니 앉아
마름질 마친 수의,
마당가 마른 햇살에 얼비쳐보는데
살아오신 것처럼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다
목련꽃 피고 풍경소리 맑게 우는 날
아슥한 길 떠날 때
입을 삼베옷 한 벌

 

 

회전문(回轉門)안에서

 

 

문의 행위는 소통의 손짓이다
네 개 방으로 구성된 소통의 통로는
열림과 닫힘으로 구체화된다
회전문의 몸놀림은 호기심으로 딱 안성맞춤,
하지만 들고 보면 구속의 틀
본디 문은 자유로움과 여유롭고 싶지만
몸통이 큰 빌딩일수록 여닫이문보다 회전문을 선호한다
환대라기보다 박대 방식이다
나는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느릿느릿 걷고도 싶은데
나오는 이의 보폭에 맞춰야 하고
나오는 이는 들어가는 이의 속도에 맞춰야 하는 이율배반 속이다
들어오는 사람과 손이라도 잡고 싶은데
나는 그의 등을 떠밀고 그는 내 등을 떠미는
배척의 투명한 거리가 있다
열림을 가장(假裝)한 닫힘의 혀가 날름거린다
자동회전문은 한 수 더 뜬다
박자를 놓치면 놓친 만큼 더 구속이다
은근하게 솟아오르는 이 뜨뜻한 분노,
판옵티콘의 원형구조가
통제하고 조율하는 섬뜩함이 있다
가진 이들이 열 줄 모르는 소유욕과
들어오는 사람을 자기 입맛에 맞추는 강요가 있다
문명을 굴절시키는 회전문 안에 갇혀
나는, 오늘도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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