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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 뒤에 맺힌 열매들 / 박시윤

에세이향기 2023. 3. 9. 11:51

소금꽃 뒤에 맺힌 열매들 / 박시윤

땡볕의 날들이 흘렀다. 서늘한 바람은 우리가 사는 세계로 숨어들어 천지의 고단함을 탈곡한다. 알맹이가 된 것들은 자신의 무게만큼 지상에 남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린다. 우리는 날아가는 것들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지상에 남은 무게에 충실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출 뿐이다.

 지천으로 추수의 낱알들이 남겨졌다. 거둠의 시간을 기다리는 열매는 고요하나, 오늘을 기다리며 지난 계절 온 몸을 대지에 내맡긴 농부의 마음은 긴장감으로 일렁인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동이 트기도 전에 아버지는 빈속으로 낫을 갈았다. 무겁고 둔탁한 조선낫만을 억척스럽게 고집했던 아버지였다. "왜 낫 열 댓 개가 조선낫 한 자루 못 당한데이. 봐라 , 슴베가 길다란 게, 이도 잘 빠지지 않고 힘쓰는 데는 이만한 게 없는 기라." 읍내 장터 귀퉁이에서 평생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영감님의 솜씨는 젊고 패기 넘치는 아버지의 입에서 침이 마르지 않았다.

 뜨거운 불에 벌겋게 달구고, 다시 찬물에서 급하게 식어가던 시우쇠를 영감님은 수도 없이 매질과 당금질을 해 댔다. 아버지가 숫돌에 날을 밀착시키고 밀고 당기기를 수 십 차례, 조금 더 예리해진 두께를 햇살에 튕겨낸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같은 날을 바라보며 설핏한 미소를 지었을 영감님과 아버지. 영감님의 등에서도 아버지의 이마에서도 염분기 서린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부흥의 대지는 여문 것들의 천지였다. 눈 돌리는 곳마다 무게를 불린 것들의 지상이고, 스치는 곳마다 여문 소리가 바스락댔다. "이달 열엿새!" 논둑을 박차고 나오면서 말했다. 나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아버지의 눈대중은 정확했고 결실은 부유했다.

 마을 사람들은 하루하루 몸을 맡기는 논을 달리했다. 하루라도 먼저 모내기를 한 논의 벼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김 씨네, 오늘은 이 씨네, 내일은 박 씨네, 추수의 품앗이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음에도 모내기철처럼 순서가 고르게 정해졌다. 자연의 섭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잔잔히 흘렀다.

 아버지의 낫질은 지칠 줄 몰랐다. 가볍고 값이 싼 왜낫을 두고도 조선낫에 길들여진 손을 자랑스러워 했다. 스르륵, 스르륵-. 낫질 소리가 좋았다. "아부지. 더 빨리요, 쪼매만 더 빨리요." 나는 아버지의 손놀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자꾸만 재촉했다. 벼가 한 단 한 단 바닥으로 눕자 빼곡하던 논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질퍽한 논바닥에 자리를 틀었다. 흙으로 그릇도 만들고 접시도 만들어 이름 모를 풀잎과 열매로 상을 차렸다. 흙을 말아 경단도 말고, 떡도 빚었다. 볏단에서 낙오된 이삭들은 우리의 소박하고 가난한 흙밥상 위에서 또 다른 이름으로 요기가 되었다. "아부지, 밥 잡숫고 하이소." 저 멀리서 아버지가 조선낫을 들어 보인다. "오야! 곧 가마, 탁배기도 한 됫박 받아 놓거래이." "야_." 동생과 나는 빈 병 하나를 주워 웅덩이에서 물을 담았다. 아버지가 드실 탁배기라는 이름으로.

 "보소, 다들 새참 잡숫고 하이소." 느티나무 아래 전을 펴고 어머니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품앗이에 나온 사람들이 새참을 반기며 잠시 일 손을 놓았다. 아제들은 탁배기로 마른 목을 축였고, 아지매들은 미숫가루를 태웠다. "아이고, 국시 아이가? 내캉 마, 배가 고파 죽는 줄 알았데이." 한주먹 감의 국수는 짬짜름한 양념간장과 섞여 반나절 논에 엎드린 인부들의 허기를 기쁘게 감당해내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등에 소금꽃이 피었다. 뙤약볕에 엎드린 시간들이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았다.

 "땀 안 흘리고 얻어지는 게 어디 있더나." 누군가의 말에 느티나무 그늘은 온통 웃음바다가 된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금 꽃에 무덤덤했다. 이상할 것도, 고통스러워 할 것도 없는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는 것일까. 몸을 놀리지 않으면 손에 얻어지는 것 또한 없다는 진리를 터득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호탕한 웃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었다.

 사방이 말쑥해졌다. ​잘 정리된 볏단들이 논바닥 군데군데 누웠다. 추수를 끝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고 아버지는 볏단을 맞대어 'ㅅ'자 모양으로 세웠다. 나는 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 다녔다. 그리고는 낮에 웅덩이 물을 채운 병을 내 밀었다. "아부지, 아까 받아놓으라고 한 탁배깁니더." 아버지가 꼴딱 꼴딱 소리를 내며 마시는 시늉을 했다. 병 속의 물은 모조리 논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크게 웃으며 "아부지 시원합니꺼?"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는 분명 웃고 계셨다.

 나는 해가 넘어가고, 까만 밤이 올 때까지 아버지 옆에서 볏단을 세우고 세웠다. 뭍별이 총총히 빛나고 칠흑의 어둠이 내릴 무렵, 아버지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따뜻하고도 아늑했다. 소쩍새가 울고, 풀벌레소리 요란하여 더 아버지의 손을 의지했던 한 밤의 추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커다랗고 둔탁한 아버지의 손, 세상을 만져보지 못한 여린 내 손가락 끝으로 전해오던 굳은 살 베긴 손, 두껍고 까슬한 육감은 철없는 내게 그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을 뿐이었다. 수많은 별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이 별들을 넘어서면 또 다른 별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도 하지 못했던 그 한 밤의 하늘에는 아버지와 나의 별만이 가장 빛나게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여러 날이 흘렀다. 볏단의 알곡들이 가을 햇살에 바스락히 말라가는 시간은 참으로 고요했다. 하루 하루 몸을 빌리던 품앗이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들판은 쇠락을 연상하듯 많은 것의 자리를 내어 놓았다. 탈곡이 된 곡식들은 추곡수매를 위해 앞 다투어 면 소재지로 향했고, 일 년의 노고가 얼마만큼의 금으로 매겨졌다. 아버지의 결실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경운기 뒤에 가득 싣고 떠난 나락포대들을 가뿐히 면사무소 마당에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홀로 콧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경운기 뒤 칸에 식구 수만큼의 사발면과 어머니의 파란 고무 슬리퍼 한 켤레를 싣고서.

 아버지는 젊었다. 뭐든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을 확신했다. 전답은 많았고, 의욕과 패기도 넘쳤다. 겁을 내지도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기필고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불같았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아버지에게는 없어 보였다. 과욕이었을까. 와르르 소금꽃을 피우며 내달려온 숱한 날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아버지의 젊음은 그렇게 요동치며 수많은 전답을 앗아갔고, 지칠 줄 모르던 한 자루의 조선낫을 오래도록 내려놓게 만들었다.

 이순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잠잠해졌다. 풍성한 들녘으로 소슬한 바람이 들어차는 무렵이면 아버지는 조용히 조선낫을 꺼내신다. 신문으로 두껍게 말아 친정집 어느 구석에 잘 모셔둔 낫 한 자루는 해마다 딱 하루만 세상으로 나와 빛을 먹는다. 오래전 낫을 갈며 튕겨내던 그 빛처럼, 오래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그 하늘의 별빛처럼 낫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았다. 성묘는 꼭 당신의 손으로 하고자 하시는 고집 속에 아버지의 오롯한 자존심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몇 십 년을 아버지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조선낫을 아버지는 가슴 깊이 하나의 자존심처럼 품고 계실게다.

 성묘에 몸이 바빠진 아버지의 등에 소금 꽃이 다시 피어나고 있다. "좀, 천천히 하세요. 그러다 병 나시겠어요." 장성한 아들들이 말려보지만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낫을 부지런히 놀리신다.

 나는 안다. 도회지 생활에 익숙해진 오빠와 남동생의 손길이 아직 서툴다는 것을. 아들들을 걱정해서 당신이 먼저 손을 쓰신다는 것을.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들리는 곳이 있다. 느티나무가 서 있던 너른 들. 내가 흙으로 조반을 지어 아버지를 기다리던 곳. 아버지의 젊음과 고독이 주저리주저리 서려 마음을 아리게 하던 곳. 아버지가 논두렁에서 뒤짐을 지고 아무런 말이 없을 때 "할아버지 뭐하세요?"하며 저 멀리서 어린 손주들이 와르르 달려가 안긴다.

 아버지의 결실은 손에 쥐는 천금의 물질이 아니라, 잔잔하게 번져오는 오늘의 소박한 풍경이 아닐까. 여문 과실 하나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순의 아버지를 통해 깨닫는다.허연 소금꽃의 과정을 지나, 오늘 천지가 바스락거린다. 아버지의 결실들이 요동하는 시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는 또 다른 소금 꽃들이 만개하며 내일의 결실들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마음에 한 떨기 소금꽃이 피어오른다. 가을 들녘, 대지는 온통 결실의 부흥으로 일렁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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