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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고리 / 전미경

에세이향기 2024. 3. 25. 08:56

고리 / 전미경

 

 

 
 

 

 

 

 

 

 

  침묵이 흐르는 반가다. 닫힌 문마다 정교한 이음이 가문의 결로 자리한다. 가옥을 지키고 있는 텅 빈 뜰엔 고요와 쓸쓸함만이 사대부의 흔적을 대신한다. 바람도 잠시 걸음을 멈춘 듯 작은 움직임조차 일지 않는 비움의 터다.
  솟을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격랑의 역사 속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안과 밖을 드나들며 고리를 만졌을 손길이다. 둥근 테가 가문의 윤기만큼 반지르르하다. 고리를 잡으며 밀고 당긴 시간 속, 어르고 달래는 연습은 감정의 빗금을 수없이 긋고 지우면서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다.
  마음의 깊이를 저울질하던 그 고리를 잡는다. 손끝에 닿는 촉감이 쇠붙이의 딱딱함보다는 곡선의 부드러움이 먼저 가 닿는다. 전통가옥에서 만나는 근엄함보다 심연의 성찰을 먼저 안았을 고리다.
  통하는 문에는 숨을 고르도록 고리를 달았다. 누르지 못한 혈기, 참을 수 없는 분개일지라도 고리 앞에만 서면 누름돌이 되어 마음이 가라앉는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치우침 없이 작은 여유로 다스리라는 배려다. 한 템포 느리게 생각의 문을 넓히라는 주문도 들었다. 서두르지 않는 만남 속, 숨을 고르는 허락일 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고 싶을 때 세상의 경험은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가르침 대로 지나온 시간을 붙들기 시작했다. 의식하지 못했기에 놓쳐버린 것들, 세상에 꺼내놓지 못한 비껴간 마음도 고리 앞에만 서면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옥죈 마음이 느슨해지는 이유도 한 박자 쉬어가라는 여유에서일 것이다. 마모의 고된 훈련 속에 드러난 빛이었기에 생각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절제의 기품을 지닌 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숨을 몰아쉬며 손끝으로 마음을 다독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마주한 큰 곳간과 작은 곳간이 한 시절을 풍미한 가문답게 집안의 기운을 넉넉히 채우고 있다. 닫힌 문틈으로 흘러나온 가문의 내력이 융성하던 시대의 맥을 잇기라도 하듯 정박된 고리를 흔들어 깨운다. 세월의 깊이가 펴낸 인심만큼이나 정든 시간과의 만남이다. 모난 상처가 가슴을 비집고 생채기를 낼 때마다 마음을 빗질하던 고리였다.
  나를 다스린다는 건 수천 번의 인내 없인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들지만 스스로에게 거는 무언의 약속이기도 했다. 마음의 책장을 수없이 넘기며 행간에 깃든 울림에 밑줄을 긋고 글 속 주인공이 되어 여백을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간절함은 나의 바람을 여러 형태로 만들어 나갔다. 변화에 깃든 요구가 여러 물길로 다가왔지만 고리는 그 심지를 더 단단히 묶게 했다. 미완성되고 일그러진 모양일지언정 진실로 향하는 통로 앞에선 모두가 내면을 향한 귀 기울임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주눅의 타래를 감아올릴 때면 감아올린 길이만큼 언젠가는 다시 풀어야 할 얼레였다. 응축된 마음이 뜻하지 않은 걸림돌에 멈춰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고리를 잡으며 시간의 이음매를 떠올렸다.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사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긴 진통에서 필요한 건 참고 기다리는 믿음의 고리였다. 말 수를 줄인다는 게 때론 수천 번의 외침보다 더 큰 효과를 본다는 걸 알기에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기다림은 인내가 필요했고 나를 알아가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일상의 작은 것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걸 보니 진실은 그 깊이를 드러낼 때 가장 빛날 수 있나 보다. 더듬어 느끼고 체험하며 알아갈 때 의미는 내게로 다가와 깊숙이 스며들 수 있었다.
  오늘 반가에서 마음을 펼지고 접던 그 고리를 다시 만났다. 살아온 날의 지문만큼 윤기 흐르는 이어짐이다. 삭막해져 가는 현실에서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보다는 권리만 내세우려는 경향이 짙게 드러나고 있는 요즈음이다. 내 안에 갇힌 이야기를 쉽게 풀어놓을 수 없어 다시 삭이며 아파할 때 고리는 나를 다독이며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 속에서 참는 힘을 만나면서 내면은 조금씩 여물 수 있었다.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고리를 통하고 있다. 그곳에서 난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한 박자 쉬면서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불같이 끓어오르던 격한 마음이 가라앉고 구석으로 밀려났던 웅크림에서 작은 용기를 얻는다. 고리는 약속이고 이음이다. 변치 않을 정을 새기며 어제를 잇고 내일을 기다린다.
  햇살 받은 고리에서 쨍그란 빛이 돈다. 그 빛이 온 누리로 스미어 세상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의 어둠까지도 온전히 거두어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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