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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죽장도/김희숙

에세이향기 2024. 3. 28. 10:03

 

죽장도


       김희숙




  검劍이 사는 집이다. 금으로 수놓은 별자리에서 푸른빛이 품어나는 사인검과 티끌조차 산산이 자를 것 같은 날렵한 충무도 사이에 긴 대나무 도검 한 자루가 쓸쓸하게 서 있다. 녹물을 덮어 쓴 칼날은 마치 초로의 노인이 벽에 등을 대고 있는 듯 대나무 지팡이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낙죽장도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나는 그 칼 앞에서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한참을 서성이다 죽장도의 지난한 시간을 읽는다.
  대지팡이는 순리를 거슬렀다. 흙속으로 뻗치던 뿌리를 머리로 삼았고 위로 솟구치던 마디는 도리어 다리가 되어 바닥을 짚는다. 누르스름한 거죽에 거뭇거뭇한 손때가 버짐처럼 남았으나 마디마디는 살아 있어 여전히 꼿꼿한 자태다. 대나무와 쇠칼이 짝을 이루었다. 연둣빛 새순을 틔웠을 줄기 안쪽에 생명을 살리고 거두는 검을 품었다. 길고 가느다란 날은 금세 살갗에 시뻘건 생채기를 낼 것처럼 날카롭다. 서슬 퍼런 죽장도를 손에 쥐고 길을 나선다면 어둠속에서 불쑥 달려드는 들짐승도, 괜스레 시비 걸어오는 건달이라도 전혀 두렵지 않을 것 같다. 얼마나 한이 깊어야 제 몸을 파내어 칼을 꽂고 다닐 수 있을까. 안으로 파고드는 아픔이 참기 어렵도록 삶이 무망하다 여겨질 때는 누구라도 집을 떠나 길 위에 서기 쉽다.
  주인의 발길 따라 팔도를 떠돌았다. 혈혈단신 빈털터리인 그가 기댈 가족이었고 속내 털어놓는 벗이었다. 가풀막진 오르막에선 그의 몸을 실어 올렸고 앞장서서 엉킨 가시덤불 쳐내어 길을 열었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밤에는 헛간 문을 의지하여 두 눈 부릅뜨고 보초도 섰으며 더위에 지친 잎사귀들이 고개 떨군 한낮에는 여울목 송사리 떼를 희롱하였다. 감 따는 작대기 노릇할 적엔 터진 홍시를 고스란히 덮어 써 먹감물이 몸뚱이로 배어들었고, 찬 서리에 발끝이 얼얼해져도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빈속을 유랑의 기억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죽장도는 태생이 순하다. 매서운 검으로 태어났으나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귀찮게 짖어대는 개들은 훠이훠이 내칠 뿐이고 길섶에 자란 풀잎 하나도 조심스레 지나친다. 트집 잡아 싸움 붙여오는 이들과는 시시비비 가리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산짐승을 맞서 살생하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 비낀다. 중국 천하제일 검객 한신이 자신을 숨긴 채 동네 불량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듯이 철저하게 사나운 날을 감춘다. 그러나 위급할 때가 닥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나선다. 드러낸 후엔 어설프게 베지 않으며 순식간에 정곡을 찌른다.
  바랑 하나 짊어진 그를 홀로 지켜내기는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죽장도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육신을 수호하는 동안 그가 붓끝으로 풀어낸 몇 줄의 시는 김 오른 밥을 올렸고 푹신한 이불을 펼쳤다. 시문詩文은 뒷바라지하는 모친이었다가 서당 훈장을 조롱하는 욕설이었고 애틋한 마음을 전하는 연서이면서 따라 붙는 정분을 떼어내는 날선 칼날이었다. 그는 시詩라는 위태로운 죽장도도 함께 껴안고 다녔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방랑시인이라 불렀다. 죽장도는 그가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다가도 결국엔 바싹 벼려진 싯구를 스스로에게 꽂아대며 가을 낙엽처럼 스러지는 나약한 모습도 지켜보았다.
  낯선 동네로 들어서면 마을 사람들도 나그네도 서로를 경계하기 마련이다. 한 발 다가설 때 반갑게 문을 열어 맞아주는 순한 이도 있으나 대개는 문고리를 꼭꼭 걸어 잠그고 돌아선다. 타지에서 왔다며 내치고 허름한 차림새에 등을 돌린다. 꽃잎처럼 말랑했을 그들의 혀끝에서 가슴을 후벼 파는 낱말들이 날아와 박히고 말마디 하나하나가 단단하고 예리한 단검으로 변해갔다. 찔러대고 할퀴던 언어들이 가죽에 낙인으로 새겨졌다.
  때로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쏟아지는 빗속을 하염없이 걸을 땐 발바닥이 퉁퉁 부르트고 시커먼 물속을 짚을 때는 끝이 가늠되지 않아 어지럼증도 일었을 터이다. 관아에 등청하는 선비를 만나 낯선 땅이 아닌 훤히 아는 골목을 짚었더라면 좀 더 수월한 생을 이어갔을는지. 사명대사는 죽장도를 휘둘러 적군을 물리쳤고 부왕에게 주눅 든 사도세자는 검을 어루만지며 외로움을 달랬다. 풍문으로 다른 검들의 소식을 접할 때는 이 마을에서 저 고을로 떠도는 신세가 초라하다 생각하진 않았을까. 젊은 부부가 자식 낳아 기르며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아가듯 생사고락을 같이 겪고서야 그와의 인연을 가까스로 받아들였으리라.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문밖 생활에 부대껴서인지 반듯하던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헐거워진 관절 사이를 바람이 제 집인 양 드나들었다. 조이고 풀칠하여 상처가 치료되면 찾으러 오겠다던 주인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갈 곳 잃은 검은 대장간 잡동사니에 섞여 하릴없이 먼지나 덮어쓰다가 낙죽장인의 눈에 띄어 전시관 유리벽 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제는 사시사철 비바람 걱정 없이 보살핌을 받고 있으나 한뎃잠을 자면서도 곁에서 느껴지던 따스한 숨결과 꽉 쥔 손에서 스며들던 땀내를 떠올리며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대는 것이 숙명이다. 썩어가는 나무둥치에도 벌레는 깃들어 자손을 번식하고 무심한 듯 놓인 돌덩이에도 이끼는 뿌리 내려 몸집을 키운다. 사람은 사람에게 의지하면서도 동식물은 물론이고 온갖 사물에도 기대어 살아간다. 어느 것 하나만 제자리를 벗어나도 삐걱거리고 휘청거린다. 하물며 세상 밖으로 나서는 자에게는 제 몸을 보호해줄 무기가 그 어떤 물건보다 절실했을 것이다. 그가 넘어지면 잡고 일어서게 한 버팀목이 죽장도일 거라 짐작했는데 되짚어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었기에 험난한 바깥 길을 그토록 오랫동안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전시관 문 앞에 선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길을 나서려는지 손가락을 펼쳐본다. 허허로운 바람만이 빈 손바닥을 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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