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손·수·다/이현숙

에세이향기 2024. 3. 31. 00:30

손·수·다/이현숙

 

 

 

 

 

 

 

 

 “뭘 꿰매줄까?”

 매끈하며 날래기 그지없고 정교한 그 물건은 귀를 쫑긋거리며 내 앞에서 반짝인다. 눈도 코도 없이 오로지 귀 하나 열어놓고, 어딘지 모를 세상을 이어 줄 가느다랗고 기다란 실을 풀어놓은 채.

 

 산책길, 어린이 놀이터 앞의 한 가게는 지나칠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문 앞의 키 큰 배롱나무꽃에 정신이 팔려, 가게를 눈여겨보지도 않았었다. 붉은 꽃이 지는 어느 날 문득,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손수다’라고? 유리문에 코를 부딪치며 들여다보았다. 가방 테이블보 앞치마 쿠션 인형…. 사람의 손맛이 만들어낸 동화 속 풍경이 올망졸망 꿈꾸듯 했다. 가운데 긴 나무 탁자 위에는 리본이 달린 가위와 줄자가 보였다. 옆에는 갖가지 색실이나, 무엇인가 담겼을 반짇고리가 놓여 있어, 빙 둘러앉아 그것들을 만들었을 아낙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반짇고리에서 잠자던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동안 구석방에 박혀 있던 게 답답했던지 조각조각 헝겊들은 무엇인가 되고 싶어 했고, 하트 모양 바늘꽂이에 꽂힌 바늘들은 춤추고 싶어 했다. 가위집 안의 분홍색 가위 손잡이가, 단추 주머니의 색색의 단추 알들도 움찔움찔 들썩이는 듯했다. 사람만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사물의 꿈도 있을 것 같았다.

 바늘로 꿈을 꾼 적이 있다. 2.45Kg의 솜다리꽃 같은 손녀딸이 위험천만 태어났을 때, 신생아 수첩에 파랗게 찍힌 앙증맞은 존재의 첫 발자국을 보자마자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랑에 풍덩 빠져버렸다. 그 여린 생명을 무엇으로 감쌀까. 짬짬이 아기 이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쁜 조각천을 이어 붙이고, 알록달록 수도 놓고, 양모 솜을 부드러운 60수 면으로 감싸서 누볐다. 이불 가장자리에는 아기의 발바닥 모양을 색실로 홈질했다. 68mm의 첫 발바닥은 검지 손가락만 했다. 3개월 6개월 1년…, 발바닥 모양 홈질은 여러 개가 되었고 쑥쑥 커졌다. 아기가 이불 위 제 발바닥 모양을 디디며 나비같이 걸어 다닐 때, 백양사 아기단풍잎같이 붉은 손가락을 이불 위에 펼치며 손가락도 해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불 만들기는 애지중지였고 시간이 걸렸다. 오래 꿈속에 있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머머! 사랑스러워라!”

 옛 친구들과 여행지에서 만났을 때, 가방 하나는 이불 바느질 보따리였다. 푸른 파도만 바라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달려들었다. 저마다 색실을 골랐다. 이불 한쪽 귀퉁이씩 잡아들고 한 친구는 우산을, 한 친구는 타요버스를, 나는 찻잔 모양을 꽃무늬 천으로 홈질했다. 학창 시절의 인형 만들기, 자수 배우던 교실을 넘나들고, 살아온 세월 이야기에 손도 입도 수다가 삼매경이었다. 한참을 몰입했다.

 “사실은 말이야…, 나 그이를 두 달 전에 떠나보냈어….”

 바늘이 갑자기 멈칫했다.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어.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었어…. 물론, 내가 아직 제정신이겠니! 그런데, 이 바늘이 말을 하게 하네… 나도 곧 손녀딸이 태어날 예정이야.”

 바늘의 귀는 영험하다고 해야 할까.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도 들어준다. 한 친구가 생과 사를 오갔던 이야기를 하면 다른 친구도 절망의 순간에 꽃을 피운 이야기를, 우리는 색색의 바느질을 계속했다.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그날따라 바느질은 낡은 시간에 해져있거나 터져있는 서로의 마음을 시치고 있었다. 푸른 바닷물도 눈으로 끌어다가 꿰매고, 아스라한 별빛도 길어 꿰매고, 날아가는 바람도 붙잡아 꿰매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은 가슴으로 들어와 어딘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마음을 끌어올려 현실에, 꿈에 이어 붙이기도 했다.

“얘, 이런 퀼트 이불은 세상에 없을 거야! 할머니 셋이 정성과 노래와 기도를 넣었잖니.”

 

 무심코 붙잡은 바늘 같지만, 사실 바느질감은 천이 아니라 마음이다. 묵묵히 바늘의 길을 내다보면 사방이 더없이 고요해진다. 내달리려 했던 욕심이나 떡심 같던 고집이 바늘에 찔려 힘을 못 쓰게 되는 건, 마음과 바늘을 넘나드는 수다 때문이다. 문풍지 같이 찢겼던 마음도 꿰매어지고 떨어뜨린 접시같이 조각난 심정도 이어 붙여진다. 깊은 밤 창가에 쌓이는 눈을 바라볼 때같이 마음이 순해진다.

 바늘은 뾰족한 끝으로 삶의 이쪽과 저쪽, 높고 낮은 세상을 거침없이 오가며 새로운 길을 낸다. 오던 길을 돌려가기도 하고, 내면으로 깊숙이 길을 내기도 한다. 바늘이 길을 가는 동안 바늘구멍을 통해 시간의 자취를 남긴다. 그 자취 위에 다시 홈질하며 누빌지라도 그것 역시 새로운 현재이고 미래이다. 문득 바느질감을 무릎에 내려놓고 바라보면 시간의 힘이 느껴진다. 누군가 ‘시간은 순간의 현실이라는 단 하나의 현실만을 갖는다’라고 했던가. 시간은 어둠이든지 새벽이든지 무조건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쇳덩이같이 무거운 현실 앞에 전진할 수 없을 것 같아도, 우리를 끌고 가는 절대 권력이 있다. 시간에 자석이 있는 걸까. 자석에 끌려가는지, 끌고 가는지, 바늘이 지나간 슬픔 좌절 외로움의 길은 삐뚤삐뚤하지만 정겹다. 내가 엉터리 제멋대로 퀼트를 좋아하는 건, 그게 나의 삶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야.’ 짐짓 바늘이 멈춘다. 실을 휘감아 잡아당겨 매듭을 짓고, 가위로 톡 잘라내면 바늘은 잠시 숨을 쉰다. 하나의 모티브가 완성된다. 연속적인 삶에서도 퀼트 바느질같이 매듭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삶의 매듭은 아쉬울 때도 많고 안타까울 때도 많다. 그래도 딛고 넘어가는 것이 삶이다. 일에서 은퇴한 얼마 전, 큰 매듭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쏟아부은 열정과 달려오던 시간을 돌아보면 아직 더 갈 여력이 있지만, 매듭을 지은 건 잘한 일이다. 바느질 통에 뒹구는 색색의 실타래를 보며, 새롭게 실을 꿰어볼 생각을 해본다.

 매듭을 지을 때는 뒷면을 뒤집어 보게 된다. 똑바른 누빔 길도 보이지만, 이리저리 어지럽게 엉킨 길과 수많은 색색의 매듭이 앞면의 무늬와는 달리 뭔지 모를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인다. 삶이 그렇듯이. 딱히 해석하거나 정의할 수 없을 때도 많듯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발한다. 한 군데서 오돌토돌하게 몰려 있는 매듭을 쓸어본다. 어느 즈음에서 삶도 그렇게 치열하게 매번 새로 시작했을 것이다. 얼키설키해도 매끄러운 앞면보다 더 친근감이 가는 것은, 삶의 이면도 그렇게 우툴두툴해서일 것이다.

 

 손수다 가게는 오늘도 닫혀 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이 명함인 듯,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았다. 실패 바늘꽂이 단추 골무 그림이 가느다란 펜으로 아기자기 그려져 있고, ‘손·들·이·하·는·수·다’라고 쓰여 있다. 필경 주인의 눈빛은 따뜻할 것 같다. 문이 열리면 들어가 행복한 수다를 떨고 싶다. 눈으로 입으로, 무엇보다도 손으로 새로운 수다를 시작해야겠다. 꿈을 꿀 수도 있고, 꿈을 꾸게 해 줄 수도 있는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누군가의 마음도 수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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