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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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황진숙

종이컵/황 진 숙 내 입술과 네 입술이 맞닿는다.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네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촉촉함에 가슴 속이 차오르고,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전해오는 온기에 따스해진다. 네 도톰한 입술과 밍밍한 몸이 너와 나를 잇대어준다. 스며드는 커피의 향긋함과 달달함은 세상사에 부딪친 모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손끝을 감도는 가벼움은 버거운 일상의 무거움을 어루만진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밀도는 성찰의 결과인가. 원형의 심상인가. 알량한 자존심으로 움켜쥐고 패대기치려 할 때 여리지만 탄탄함으로 버티는 너. 습기에 휘둘려 눅눅해지고 구겨질지언정 감내하는 깜냥은 우직하다. 손안에 밀착되는 찬기와 온기의 생생함에 무기력한 순간들은 환기되고 격정의 소용돌이는 가라앉는다. 무수한 사고..

발표작 2021.05.02

낙죽장도(烙竹長刀)/황진숙

낙죽장도(烙竹長刀) 황 진 숙 적열의 무게를 견딘다. 인두 끝의 불꽃이 마디의 몸피를 뚫는다.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날카로움이 온 몸을 관통한다. 그을리며 타들어가는 고통을 그 누가 알랴.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대나무는 미동도 없이 제 몸을 내어준다. 낙죽장도는 손잡이와 칼집이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 거죽 위에 사상이나 신념을 새겨 넣은 칼이다.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도금을 입힌 칼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바이킹의 울프베르흐트검, 사무라이들의 대도, 징기스칸의 만도 등 세상의 칼들이 밖을 향해 날을 세웠다면 두 뼘 남짓한 길이의 장도는 나를 향해 날을 벼린다. 책을 가까이 한 옛 선비들이 몸을 지키기 위해 마음결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자기성찰의 칼이다..

발표작 2021.05.01

식빵/황진숙

식빵/황 진 숙 “타닥, 타다닥” 크러스트가 터진다. 파열음이 경쾌하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충분히 부풀어 올라서일까. 오븐에서 나와 세상을 만나는 소리가 선선하다.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과 결대로 찢어지는 속결이 부드럽다. 단련된 시간에서 나오는 유연함으로 말랑거린다. 온몸으로 받아낸 소용돌이 끝에 찾아온 구수함이 사방으로 풀어진다. 그 내음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 덩이의 빵이 머금은 평온에 푸근해진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지만 모든 게 담긴 빵이 식빵이다. 앙금을 들이거나 토핑을 두르지 않아 담백하다. 무명옷을 걸친 듯 수수하다. 가장자리는 떼어지고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개명당해도 속없이 하얗기만 하다. 빵가루가 되어 형체 없이 날려도 매인 데 없이 맑다. 달달하거나 농밀하지도 않다. 맹물같이 ..

발표작 2021.05.01

열애 중/황진숙

열애 중/황진숙 엊저녁에는 새벽 3시까지 같이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이불 속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그를 말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필시 내일 다크서클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그의 앙탈이 늘었다. 당신 체면이 있지, 왜 이리 야단이냐고 짜증을 부려도 나밖에 없다며 속닥거린다. 한 옥타브 올려 다그쳐도 끔벅끔벅 앉아 있기만 하니 되레 미안해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행복에 겨운 소리라고. 물론, 일 년에 한 번 은하수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에 비하면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우리는 행복일 수 있다. 번잡스러운 하루에 지쳤거나 관계가 주는 피로에 우울이 바닥을 치면 슬며시 그가 내 옆으로 온다. 모과 향기 그득한 ..

발표작 2021.05.01

숯2/황진숙

숯2/황 진 숙 운명의 짐을 졌다. 시커멓게 과거를 지우고 뉘 집에 유배되었다. 나무에서 숯으로 바뀐 신세를 항변할 새도 없이 잿불에 파묻힌다. 가문을 지키며 불씨를 잇는 계율은 지엄하다. 그을음과 연기로 미적대지 않는다. 불티를 날리며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뭉근하게 타오른다. 살풀이하듯 발갛게 일렁인다. 밤새 가물거리며 화로의 불씨를 품느라 어둠살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다. 몸 안의 길을 따라 저장해 놓은 한 톨의 비, 한 가닥의 바람, 한 점의 햇살마저 날려 버렸으니 한가로이 풍화에 들면 그만이다. 텅 비어 구멍투성이인 몸뚱이로 무얼 어쩌랴. 난데없이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묵은내를 들이마신다. 장독에 들어앉아 불순물을 흡착하느라 뒤척일 수 없다. 잡귀를 물리치는 문지기로 내몰려 문간의 ..

발표작 2021.05.01

숯/황진숙

숯/황진숙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도 없다. 타는 듯 붉은 낙엽의 열정도 없다. 꽃숭어리의 향기로움은 더더욱 아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묵직함이 있다. 운명을 절감한 생생함이 있다. 온 세상을 품은 담대함이다. 질박한 옹기 수반 위에 우뚝 서 있는 숯. 그의 자태는 현란한 언어보다 내재돼 있는 언어의 표현으로 완성된다. 제 살이 잘려 나간 아픔이여서일까. 절단된 단면 위로 내비치는 깜장의 숨결이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태고시절 나무들의 어우러지는 소리가 벌어진 결 사이로 들려온다.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산천초목의 화음을 들으며 나날이 무르익어가는 미래를 꿈꿨을 참나무의 소망. 평범한 나이테를 가지고 무탈한 생의 소원을 빌었을 나무들의 노래. 불시에 가마에 들어가 숯의 운명이 된 그는 앵돌아진 맘을 자신의 ..

발표작 2021.05.01

풀무/황진숙

풀무/황 진 숙 풀무를 돌린다. 쇠바퀴가 삐걱대며 돌기 시작한다. 지나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푸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기억들이 바퀴를 타고 돈다.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가 되어 과거의 소리를 들려준다. 봉창을 통해 흐르는 별빛과 달빛 소리,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 김을 올리는 가마솥의 하품소리,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는 소리가 설핏 풀무에게서 들린다. 별스러울 것 없이 빙그르르 이는 소리에 마음이 하뭇해진다. 가슴에서 내놓는 한줄기 바람으로 한 때는 호시절을 누렸을 풀무.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몸태의 질감은 무겁고 거칠다. 허나 속은 텅 빈 채, 가슴에 바람개비 하나 달고 바삐 돌아간다. 바람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아파해야 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마저 어둠으로 가려..

발표작 2021.05.01

구두/조일희

구두 조일희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한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가 솔직히 탐이 났다. 나와 어..

좋은 수필 2021.05.01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벼르던 여행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구룡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조개를 잡고 볼락회에 소주 한잔 마시다 죽은 듯 자야겠다고 먹은 마음을 포기하기에는 마음한테 미안해졌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여행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판사판으로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며 나는 도시락을 싸고 남편은 텐트와 침낭을 챙겼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잖은가. 호미곶을 지나 구룡포항에 닿을 즈음이면 파도가 지쳐 있을 거라는 희망은 출발할 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파도는 천년 묵은 한을 토해 해안반도 둘레길을 덮쳤다. 긴 목덜미를 자랑하듯 제철소 수십만 개의 불..

좋은 수필 2021.05.01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경오년 여름에 쉬파리가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온 집안에 가득 차고, 바글바글 번식하여 산이나 골이나 쉬파리로 득실거렸다. 높다란 누각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 않더니, 술집과 떡집에 구름처럼 몰려와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그러니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 났다 하고, 소년들은 떨쳐 일어나 한바탕 때려잡을 궁리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파리 통발을 놓아서 거기에 걸려 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파리약을 놓아서 그 약 기운에 어질어질할 때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말했다. "아, 이것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분명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구한 삶이었던가?..

좋은 수필 2021.05.01

신문/유종인

신문 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좋은 시 2021.05.01

집/박시윤

집 박 시 윤 결혼한 동창이 집들이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친구는 서른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늦은 결혼을 자랑이라도 하듯 마흔 평이 넘는 새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유명 상표의 혼수들로 속을 꽉 채운 집은 보기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시댁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의 달콤한 신혼 자랑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휑했다. 환한 달빛이 앞을 비춰 줄 것이라는 생각과 늦은 밤 남편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쥐죽은 듯 고요한 공기가 나를 더욱 숨죽이게 했다. 늦은 귀가에 면죄 받지 못할 죄인처럼 뒤꿈치를 ..

좋은 수필 2021.04.30

아버지의 혼불 / 김용삼

아버지의 혼불 / 김용삼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속도감이 완연해진다. 서너 시간의 여유 탓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탑게 인사를 나누던 일행들이 하나둘 노루잠을 청하고 있다. 차분하게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누리기에 제 격인 분위기다. 살며시 커튼을 들추어 바깥을 살핀다. 출발할 때 쏟아지던 발비는 어느새 실비로 잦아들고 있다. 빗방울은 버스의 속도감에 끈질기게 저항하며 유리창으로 몸을 던진다. 그러나 빗살무늬의 긴 빗금을 긋곤 이내 허공으로 튕겨나간다. 속도에서 탈락한 빗방울들은 뒤따라오는 차의 전조등에 투사되어 폭죽처럼 부서져 내린다. 허공으로 점묘되어지는 빛의 파편들은 오래 전 고향의 밤하늘을 물들이던 반딧불이의 군무와 오버랩 된다. 망연하게 비와 반딧불이의 추억을 오가다문 득 내 기억 한 켠에 켜..

좋은 수필 2021.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