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981

산나물/이화은

산나물 이화은 시집 온 새댁이 산나물 이름 서른 가지 모르면 그 집 식구들 굶어 죽는다는데 ― 가죽나무 엄나무 두릅나무 오가피 참나물 참취 곰취 미역취 개미취 머위 고사리 고비 돌나물 우산나물 쇠뜨기 쇠무릎 원추리 방아풀 메꽃 모싯대 비비추 얼레지 홀아비꽃대 노루오줌 환삼덩굴 마타리 상사화 꿩의다리 윤판나물 자리공 촌수 먼 친척 같기도 한 동네 동무 같기도 한 귀에 익은 듯 낯선 이름들가난한 가장의 착한 반려자처럼 덩그러니 밥 한 그릇고기반찬 없는 적막한 밥상 사철 지켜 주던, 생으로 쌈 싸먹고 무쳐 먹고 국 끓여 먹고말렸다가 나물 귀한 겨울철 묵나물 먹기도 하지만그 성질 마냥 착하고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홀로 견뎌낸 산 속 소태 같은 세월어르고 달래어 그 외로움..

좋은 시 2025.04.25

망새 / 이 은 희

망새 / 이 은 희 함박웃음을 짓게 하는 도깨비다.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난다. 참으로 익살맞다. 그가 내게 농을 걸듯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하다. 툭 불거진 눈, 굵고 짙은 눈썹과 수염, 헤벌어진 입이 섬뜩하다. 그러나 가지런한 이빨과 웃음 띤 얼굴은 친근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나를 사로잡은 거구의 기왓장인 망새다. 한껏 멋을 살린 날짐승의 꼬리를 닮은 몸체. 한 사람이 들기엔 규모가 크다. 그래선지 코를 경계로 상하 두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옆면의 가장자리가 새의 날개처럼 층이 진 깃털모양이고, 뒷면은 상하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버릴 틈새, 그곳에 그의 얼굴이 가려져 있다.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임을 눈치 챘는가 보다. 무언의 ..

좋은 수필 2025.04.25

육개장/신중신

육개장 신중신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넘겼냐고 묻는가?솥에서 슬슬 끓는 육개장,이열치열의 염천 보양식 있어구슬땀 쏟는 한낮, 그것으로 근기 지탱해 왔으니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삶은 쇠고기―깃머리 양지머리 걸랑을 찢어 깔고숭숭 썰어 놓은 대파 무살진 고사리 숙주 토란 줄기 입맛 따라 넣어얼큰하게 끓인 육개장.멀리서 찾아온 손을 맞은 겸상에서 흐뭇하고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하는 출출한 저녁참에도이 한 그릇 있어 사는 재미를 느낀다네.춥고 긴 겨울을 어찌 날 거냐고 묻는가?뜨끈하고 불그스레한 국물 위에고추기름 둥둥 뜨는 육개장 한 그릇,그거면 이내 콧잔등엔 땀이,불시에 뱃속이 후끈해지며허리마저 백두대간처럼 꼿꼿해지지 않던가.없던 배짱도 두둑이 생겨한밤중 태백준령도 거뜬히 넘을 것 같으니한기며 고뿔이 뭔 줄을..

좋은 시 2025.04.23

선지해장국/신달자

선지해장국 신 달 자 (1943~ ) 한 사내가 근질근질한 등을 숙이고 걸어갑니다새벽까지 마신 소주가 아직 온몸에 절망을 풍기는저 사내욕을 퍼마시고 세상의 원망을 퍼마시고마누라와 자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퍼마시다가누구를 향해 화를 내는지 두리번거리다 다시 한잔드디어 자신의 꿈도 씹지도 못한 채 꿀꺽 넘겨버린저 사내으슥으슥 얼음이 박힌 바람이 몰아치는 청진동 길을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걸어가다가바람처럼 ‘선지해장국’ 집으로 빨려들어 갑니다야릇한 미소를 문지르며 진한 희망 냄새 나는뜨거운 해장국 한 그릇을 받아 드는데소의 피, 선지 한 숟가락을 물컹하게 입 안으로우거지 한 숟가락을 들판같이 벌린 입 안으로속풀이 해장국을 한 번..

좋은 시 2025.04.23

한영옥의 <묵>

한영옥의 묵 개나리 깔깔거리며 올라올 때쯤 해서는/ 아들 딸 치우는 집들도 덩달아서 피어났다./ 음식 솜씨 좋은 어머니는 이 집 저 집 불려가/ 바쁘게 종종걸음치며 노곤한 봄과 씨름했다/ 한참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기다리지 못하고/ 동생들 손잡은 채 울렁거리는 잔칫집 기웃대면/ 행주치마 속으로 묵 한 대접 그득하게 날라/ 모퉁이에 우리들 앉히고 얼른 먹게 하던 어머니/ 행주치마 펄럭이며 다시 부엌으로 종종걸음 가는/ 서운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 투정 섞이는 탓에/ 참기름 냄새 고소하게 번지는 부들부들한 맛,/ 왠지 서러워 울먹울먹하면서 배를 채웠는데/ 급하게 돌아오면서도 우리들은 체하지 않았다/ 그득하게 차오르는 서러움의 기억 더욱 부르려/ 쓸쓸한 날이면 묵 한 사발 비벼 밥 대신 먹는다/ 청포묵도 ..

좋은 시 2025.04.23

소머리 식당의 기철학

소머리 식당의 기철학공을 들여 만들고 교역함은 경직과 공상의 일이니,이것이 바로 말과 음식이 서로 응하고 서로 부합하는 것들이다 功作交易。耕織工商之事。是乃言語飮食。相應相符者也。 공작교역。경직공상지사。시내언어음식。상응상부자야。 - 최한기(崔漢綺 1803~1877), 『기측체의(氣測體義)』 「신기통 권2(神氣通 卷二)」 구통(口通) 소머리 곰탕집은 말과 음식이 교류하는 곳이다. 혜강 최한기의 표현대로 만 오천 원짜리 음식을 앞에 두고 말하고 먹는 것이 서로 응하며, 서로 다른 기(氣)와 기가 설왕설래하는 장소이다. 곰탕 한 그릇 앞으로 삼삼오오 평범한 이웃도 오고 직장인도 오고 부자도 오고 가난뱅이도 오고 경찰도 오고 사기꾼도 오고 건달도 와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허공에 올렸다 내려놓는다. ..

고전 2025.04.23

의령군, 제15회 천강문학상 시상식 개최[출처] 의령군, 제15회 천강문학상 시상식 개최|작성자 경남탑뉴스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7680 의령군, 제15회 천강문학상 시상식 개최[이뉴스투데이 경남취재본부 박영준 기자]천강 홍의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뜻 깊은 천강문학상의 시상식이 제50회 홍의장군 축제와 함께 지난 20일 의령군민공원에서 개최됐다.의령문인협회www.enewstoday.co.kr 의령군, 제15회 천강문학상 시상식 개최 15회 천강문학상 시상식 개최. 사진=의령군천강 홍의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천강문학상의 시상식이 제50회 홍의장군 축제와 함께 지난 20일 의령군민공원에서 개최됐다고 22일 밝혔다.​의령문인협회(회장 이광두) 주관으로 열린 이 시상식은 15명의 수상자와 천강문학상 운영위원장 오태완 군수 ..

발표작 평론 2025.04.23

멍석/황진숙

멍석/황진숙 가을로 온 작물들이 멍석에 부려졌다. 알싸한 태양초로 거듭나기 위해 고추가 제 속으로 햇살을 굴린다. 상수리는 한 자밤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부피를 줄인다. 짓찧어져 가루가 될지언정 쌉싸래한 맛을 남기고자 껍질을 떠나보낼 준비 중이다. 거둬들인 낱알들은 밀고 당기는 고무래질에 엎치락뒤치락 말라간다. 네모반듯한 두부로 세상을 물컹하게 읽고 아삭한 콩나물로 식탁을 장악하려는 콩들이 뒤섞여 소란스럽기까지 하다.여물고 나서도 물기를 내놓으며 단단해져야 된바람에도 성할 터이다. 저들이 짓무르지 않도록 멍석이 볕살을 당기고 바람을 불러들인다. 엎어지고 뒹굴며 맘껏 널브러지도록 바닥에 묵묵히 깔려있다. 더러는 곳간으로 들이지 못한 곡식을 덮는 이불자락으로 밤새 한뎃잠을 잔다. 헛간 귀퉁이에 세워지는 ..

발표작 2025.04.21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 쉼표 사용법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 쉼표 사용법 1) 마침표는 서술, 명령, 청유, 등을 나타내는 문장의 끝에 쓰입니다.​예)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입니다. (서술)버스가 정차하기 전까지 반드시 착석해주세요. (명령)나와 함께 파티에 가자. (청유)​2)아라비아 숫자만으로 연월일을 표시할 때예) 1919.3.1/ 3.1~3.31​3)특정한 의미가 있는 날을 표시할 때 월과 일을 나타내는 아라비아 숫자 사이에 쓴다.예) 3.1운동/ 8.15 광복​4)장, 절, 항 등을 표시하는 문자나 숫자 다음에 쓴다예) 가. 인명ㄱ. 머리말 ​​활용 1. 직접 인용한 문장의 끝에는 마침표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쓰지 않는 것도 가능하다 !​예) 엄마가 "같이 목욕탕에 가자."라고 말하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우리말 2025.04.21

나비정첩/안이숲

나비정첩 ​안이숲(안광숙) ​ 문틈에 나비 한마리가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있어요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여름을 건너뛰려 하고 있네요​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사뿐히 들려옵니다​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백을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

좋은 시 2025.04.19

뉴욕일보 '수필의 향기-2' 소금/황진숙

뉴욕일보 '수필의 향기' (연재 11 ) - 소금 / 황진숙 장미숙 ・ 5분 전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뉴욕일보 ‘수필의 향기’ 이번 주 작품은 황진숙 작가의 입니다. 황진숙 선생님은 충북 옥천 출생이며 2016년《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습니다. 등대문학 최우수상, 흑구문학상 대상, 천강문학상 대상 등 국내 규모가 큰 공모전에서 많은 상을 받은 실력 있는 작가입니다. 수필계에서는 비교적 젊은 수필가이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회원이며 수필울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금 / 황진숙​​ 한 톨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등금장수의 등에 업혀 대동여지도에도 없는 소금 길을 냈다.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고 차마고도를 건너 처처를 누볐다. 산이라고 못 이룰까. 고무래로 밀고 당겨지..

발표작 평론 2025.04.17

유 공간의 현실과 다른 상상력들/ 박노식, 박인하/ 시와문화 2024년 여름 70호-박철영

유 공간의 현실과 다른 상상력들/ 박노식, 박인하/ 시와문화 2024년 여름 70호 사유 공간의 현실과 다른 상상력들박노식 시집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 박인하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중심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여린 허리를 지그시 밟고 오던가 그도 아니면 아예 온몸으로 맞서 스스로 쟁취하듯 모습을 드러낸다. 계절로 구분되는 이 세상의 만물은 그렇게 생동과 소멸을 반복하며 이르고자 한 형상만큼을 기어이 실행한다. 거기에는 누가 뭐라 해도 본질 속에 숨어있는 실행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절대적 불변의 순리인 것이다. 그것을 한 줌의 의식으로 막아서려는 인간의 오만이 간혹 그 실행력을 늦추거나 훼손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그것의 지속적인 실현 의지를 멸실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살고..

평론 2025.04.17

쉴 새 없이 솟아나는 류근홍 시인의 샘물/이승하

쉴 새 없이 솟아나는 류근홍 시인의 샘물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언어의 샘물 이승하 류근홍 시인은 시단에 나오기 직전, 산문집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를 낸 적이 있었다. 네 가지의 암과에 대한 여섯 번의 암 수술을 극복한 저자가 펴낸 신앙 간증집이다. 이 책을 낸 이후 여러 교회와 모임에 가서 신앙 간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늦깎이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그이기에 회복 이후 시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에 와서 시 창작의 방법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선 등단도 하고 시집 『고통은 나의 힘』과 『당신 덕분입니다』를 펴내 두 차례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들 3권의 책은 하나님 여호와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준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천국 문턱까지 갔었..

평론 2025.04.17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을!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을! 이승하 ・ 2024. 11. 12. 8:20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시인들이 차린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시의 밥상 76명의 주요 시인들이 시로 쓴 한국 대표 음식 76선 한국시문학사상 현역시인들이 처음으로 음식 한 종류씩 맡아서 시로 쓰고 묶은 이 음식 시집은 김종길, 이어령, 정진규, 김후란, 허영자, 이근배, 김종해, 유안진, 오세영, 신달자, 이수익, 이건청, 김광규, 김용택, 도종환, 박주택, 이승하, 장석남, 문인수, 박형준, 이병률 등 우리나라 주요시인 76명이 참가했다. 이 음식시집은 시로 차려낸 다채로운 한국 전통음식들을 주제로 독자들의 마음속 미각과 추억을 한껏 자극할 뿐 아니라 한식의 맛과 정신사를 되살려낸다. 음식 사진 촬영..

평론 2025.04.17

변방을 울려 중심을 뒤흔든다는 것― 박철영 평론집 『층위의 시학』을 읽고

변방을 울려 중심을 뒤흔든다는 것 ― 박철영 평론집 『층위의 시학』을 읽고 이승철(시인, 한국문학사 연구가)‘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이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를 찾아내는 일이다고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자기체험을 하게 된다.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현재적 삶에 얽힌 제반 풍경들, 하루하루 일상적 체험과 갖가지 추억들은 우리 머리(가슴) 속에 기억돼 쌓이게 된다.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일상적 체험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내면적 상처를 안겨준다. 이때 시인이나 작가는 가슴 속에 쌓여 있으나,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글로써 표현하고픈..

평론 2025.04.17

희망과 허망 사이, 욕망 –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희망과 허망 사이, 욕망 –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진후영 2023. 5. 28. 12:52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문학동네 포에지49, 2022.6.9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P25 아내에게 들은 말이다. 공부방에서 초등학생 몇 명을 가르치는 아내에게 지인 소개로 상담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고, 자기 자녀를 맡기려는 데 교육비를 얼마나 깎아줄 수 있는지, 그 혜택을 먼저 물었다고 한다. 결국 상담은 틀어졌고, 나중에 그 지인이 그렇게 전화할 줄 몰랐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떤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혜택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요구한다고..

평론 2025.04.15

해 질 녘 풍경/강철수

해 질 녘 풍경/강철수 새파랗던 젊은 부부가 어느새 새하얀 할매, 할배가 되었다. 재를 넘고 내를 건너 여든 몇 해를 달려 이제 종점 부근인 해 질 녘에 와 있다. 젊어서는 일하랴 아이들 공부 시키랴 정신없이 돌아쳤고, 이후에는 손주놈들 재롱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바쁘고 좋을 때는 있는 둥 마는 둥 서로 무덤덤한 부부였다. 그러다 신혼 시절 버금가게 가까워진 건 해가 서산에 걸린 요즘이다.아이들이 회갑을 맞는가 하면 손주들이 시집 장가를 가기 시작하면서 노부부의 본가(本家)는 추수 끝난 휑한 들판이었다. 그 들판에 내려앉는 저녁놀,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말결도 부드러워지고 톤도 낮아졌다. ‘당신처럼 하면 우리 살림이 벌써 거덜..

좋은 수필 2025.04.15

아버지의 뒷모습 / 신달자

아버지의 뒷모습 / 신달자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손수건 한 장을 옆에 두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생긴 나의 버릇인데 이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도 어느 사이 손수건을 챙기게 된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선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나보다도 우선 아버지 자신이 감정에 헤프지 않고 절제 능력이 있으시니 나도 따라서 이유에 앞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상이 헤픈 나이지만 상대방이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면 한풀 물러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극히 우울한 마음이 되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으며 눈물부터 난다. 혈육이 무엇인데 이리 가슴이 아플 수가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며 다시 또 운다. 아버지는 올해로 86세..

좋은 수필 2025.04.15

감나무에 달린 잎새들/김규련

감나무에 달린 잎새들/김규련 무심한 나무도 조석으로 대하면 정이 묻어오는 것일까. 나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정문에 바짝 붙어 감나무 한 그루가 거목으로 서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싫든 좋든 출퇴근할 때마다 나뭇가지 밑으로 스치며 드나들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사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그러고 보니 묘하게도 애착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 어쩌다 마음이 황량할 때면 감나무 밑에 와 서성거리는 버릇이 생겼다.오늘도 괜히 감나무 밑에 와 머뭇거리고 섰다. 무성한 잎 사이로 여기저기 하늘 몇 자락이 쏟아지고 있다. 연신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하얀 감꽃 언저리엔, 아득히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가 아롱거린다. 웬일일까. 감꽃 목걸이를 드리운 소녀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옛날 어렵게 살던 무렵, 여름이면 으레 어머니는..

좋은 수필 2025.04.15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빗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 그릇에 처음으로 무늬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바늘 같은 걸로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 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데 비해 신석기의 빗살 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 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i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좋은 수필 202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