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2025

고래 해체사/박위훈

고래 해체사 박위훈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드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수..

좋은 시 2025.06.15

채혈실 소묘/황진숙

채혈실 소묘/황진숙 난 매일 피를 뽑는다. 피를 봐야 끝이 난다.“팔 주세요. 채혈하겠습니다.”“왼쪽 팔이에요? 오른쪽 팔이에요?”“노다지 다니는데 무슨 피검사여.”“쪼금만 뽑아유. 겁나게 많이 뽑네.”“피가 왜 이리 시커멓대유.”“한번에 성공하세요. 제가 좀 예민해요.” 한 번의 채혈에 제각각의 요구사항이 보태진다. 각양각색의 문답으로 채혈실이 소란스럽다. 그나마 이 정도는 소박하다.“이봐요 애기엄마, 아니 어떻게 했길래 팔에 멍이 잔뜩 들은 거예요.”며칠 전에 채혈한 아주머니다. 혈관을 찌른 거라 꾹 눌러야 피가 멎는다고 얘기해 줬건만, 들은 체도 안 하고 마구 문지른 탓이다. 근육주사가 아니라서 문지르면 멍이 든다고 설명해줘도 막무가내다. 내 잘못이란다. 알아들으면서도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가..

발표작 2025.06.14

흘러가는 대로/황진숙

흘러가는 대로/황진숙 묶는다. 가득 찬 쓰레기들이 튀어나오지 않게 손아귀에 힘을 준다. 웬만하면 봉투를 하나 더 사용하라는 남편의 지청구에도 요지부동이다. 마지막 쓰레기봉투라도 되는 양 배불뚝이가 되도록 밀어 넣고 우격다짐으로 묶어 버린다. 오랜만에 대청소라 치울 게 산더미다. 헌 옷가지며 잡동사니며 책들을 추려서 자루에 넣는다. 옆에서 뒤적거리던 남편이 아직 쓸만한데 버리냐며 만류한다. 자리만 차지한다는 이유로 그예 쓸어 담는다. 아무리 소용이 다 했다고는 하지만 물건들도 연이 닿아 여기로 왔을 텐데. 동고동락한 추억도 깃든 시간도 한데 묶어 버리는 내 모습이 순간, 생경하다. 쓸모를 다한 마지막이란 이리 무감각한 것인가. 그동안 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연을 묶어 왔을까. 노끈으로 칭칭 감으며..

발표작 2025.06.14

자선전을 읽다/허정열

자선전을 읽다/허정열 ​돌아서서 가는 사람의 등을 본다. 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등은 산의 등줄기처럼 굽어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의 무늬가 느릿느릿 출렁인다. 한 번도 소리 내어 목소리를 들려준 적 없는 등이 뒤뚱이며 말을 걸어온다. 수시로 흔들렸을 바람의 시간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먹구름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독과 외로움이 깃든 쓸쓸함이 덮여있다.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무딘 봉분처럼 숨어 있다. 어떤 말보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다. 한 사람의 삶이 층층이 쌓여 오래된 서가를 보는 듯하다. 세월의 무늬를 그려 넣으며 경전 같은 일기를 혼자 써 내려가느라 닳아진 어깨. 진실과 정성이 담긴 등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상상으로 골몰해진다.등은 내가 써서 ..

좋은 수필 2025.06.14

사초 / 강현자

사초 / 강현자 아버지 산소엔 가뭄으로 인해 군데군데 빈 잔디 위로 한숨만 풀풀 날렸다. 아버지가 공들여 지킨 흔적처럼 그나마 남아있는 잔디도 겨우 마른 풀빛을 머금고 있었다.90년 만에 닥친 가뭄을 아버지도 아셨을까. 아버지는 바람도 달구어 재워놓고 잔디까지 다 태울 기세로 매일 내리쬐는 불볕을 핑계 삼아 자식들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아버지는 외롭다는 듯 잡초들을 봉분의 키만큼 키워놓고 계셨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나의 불효의 길이만큼 자란 잡초들이 아버지의 쓸쓸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투정이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사랑 표현은 매서운 불호령이 전부였다. 귀가하는 아버지를 맞이할 때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불호령이 났고, 또 그때마다 아버지 발..

좋은 수필 2025.06.12

허공 / 고경서

허공 / 고경서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탁 트인 수평선에 침침한 눈을 씻고 뒤돌아본다.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타워크레인 몇 대가 허공을 마구 찌르는 현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땅거죽을 쿵쿵, 쾅쾅 내리치는 굴착기의 굉음에 귓바퀴가 얼얼해도, 땅속 깊이 철골을 박는 통증에서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는다. 새로 짓는 건물로 체적이 줄어들어도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허공이다.허공은 광대무변하다. 어떤 이는 텅텅 비어 막막하다 이르고, 공空이나 무無를 들먹이며 허무의 공간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럴 때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제 품안에서 천지만물이 생을 일궈 나가기 때문이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배배 꼬인 넝쿨을 지지대 삼아 뻗는 나팔꽃들, 도둑고양이 울음이 자라는 으슥한 골목도 허공의 영역이다. 왕거미 한 마..

좋은 수필 2025.06.12

나만 아는 그늘 아래

2025년 6월 11일 (수)이백육십팔 번째 이야기 나만 아는 그늘 아래용광로 같은 날씨에 구름은 이글이글좋은 시만이 더위를 식힐 수 있네어제 시 읊는데 학 날아와 재촉하여비 갠 저녁 파리 쫓으며 정담 나누었네정원엔 물가의 대나무 서늘한 그늘 드리우고누각엔 거문고 곡조 바람에 실려 상쾌하네더위 먹었는데 굳이 술판 벌일 일 있나얼음 동동 시원한 감주 유리잔 가득 마셔야지 먹구름과 폭우에 열기 끓어올라도한 몸 누울 초옥이면 잘도 먹고 잔다오북쪽 문 닫아 뱀 겨우 막았는데동방에 날이 밝자 파리가 일어나네여기저기 밥 짓는 연기 더위를 부추기니낮에는 땀이 줄줄 밤에도 그저 앉아 있네신선주 떠올리면 뼛속까지 시원하니그대 집의 홍로주 얼음 담아 먹었었지洪爐天地火雲蒸 홍로천지화운증獨有瓊篇濯熱能 ..

고전 2025.06.11

당목 /조미정

당목 /조미정 늙수그레한 당목 하나가 먼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다. 타종을 멈춘 지 오래되었나 보다. 발갛게 얼어있는 몸 위로 켜켜이 가라앉은 먼지가 아버지의 백발처럼 덥수룩하다. 이마를 쓸어 올리듯 당목을 어루만지다가 흠칫 놀란다. 나무의 결을 따라 딱딱하고 꺼칠꺼칠한 삶의 이력이 손가락 끝에 까맣게 묻어나온다.종을 치는 막대기를 당목이라고 한다. 박달나무나 고래의 뼈로 만들어서 쇳소리가 날 만큼 단단하다.?종이 소리를 울리는 동안 당목은 수도 없이 제 몸을 부딪쳤다. 한번 타종할 때마다 되돌려 받은 충격이 일파만파 육신을 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옹이 없이 매끈하던 몸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닳아서 굳은살이 박였다. 귀가 떨어져 나가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비천상..

좋은 수필 2025.06.08

시적 지향과 범주 속 진정한 표정들/박철영

시적 지향과 범주 속 진정한 표정들 마경덕 시집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마경덕 시는 파동 치는 감정을 더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의 시 안에는 암울했던 삶의 밑 자리들이 잊을만하면 치통처럼 아문 신경을 자극한다. 문장이라는 수사로 시의 맥락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려는 강제된 언어의 가식이나 그럴 의도도 없다. 화투장의 흑싸리처럼 담담히 밑장으로 깔려 어긋나는 손길을 한없이 기다려주듯 어느 순간 행운처럼 빨강 싸리 같은 공감을 불러온다. 생의 주체에서 밀려나 있다가도 시간의 주체로 돌아와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는 내밀한 시어들은 꼭 마경덕 시인의 과거적 삶을 닮았다. 그렇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왜곡하여 각색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시의 언어가 아버지의 손바닥 안 굳은살처..

평론 2025.06.06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의 진정한 표정들/박철영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의 진정한 표정들-권선희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에서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인연이란 것이 묘했다. 이유를 대라면 1986년 스물여섯 살에 포항으로 내려가 8년여를 살다 온 때문이었다. 간혹 페북을 통해 올라오는 권선희 시인의 글에서 구룡포 바닷내가 진동했다. 그럴 때마다 갓 결혼해서 아내와 찾아간 구룡포가 생각났다. 비릿한 갯내와 배에서 막 내린 그물에서 생선을 떼어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곳에 살러 갔다가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떠나왔던 포항이었다. 그래서 권선희 시인의 시집 《푸른 바다 검..

평론 2025.06.06

木佛 / 조현미

木佛 / 조현미 수목원에 들어선다. 나무와 나무가 반쯤 몸을 숙이고 객을 맞는 풍경이 흡사 일주문의 맞배지붕을 닮았다. 누군가 반쯤 읽다 만 경전 같기도 하고, 이마를 맞대고 선정을 ㅊ어하는 구도자를 닮은 듯해 사뭇 경건해진다. 한순간 그 많은 번뇌를 벗겠냐마는 나무들이 보시하는 초록 기운에 마음이 한결 가볍다.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 씻고 들꽃들 염화미소에 마음 얹다 보니 잠시 벗어 놓고 온 일상이 하마 옛날이다. 수목원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나무들이다. 나무는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의 하늘만 욕심내며 서로의 그늘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웃을 생각해 둥글게 등이 굽은, 이끼랑 풀, 들꽃이며 새와 곤충들에게 제 몸을 거처로 내주는 배려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한 좌座의 목불이다. 울울..

좋은 수필 2025.06.01

유주 / 조미정

유주 / 조미정 서원을 품은 대니산 기슭에 늙수그레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노란 등불을 켰다. 위로 쭉쭉 키가 자란 보통의 은행나무와 다르다. 키보다 더 넓게 옆으로 뭉텅뭉텅 가지를 벌렸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일가를 이룬 듯 웅장한 은행나무는 몇 개의 쇠기둥에 구부정한 몸을 기대어 서 있다. 위풍당당해 보이던 모습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그간의 풍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람하던 한쪽 가지는 부러지고 반대쪽으로 뻗은 가지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바닥에 주저앉았다. 찢기듯 벌어진 몸통 여기저기에는 썩은 살을 덜어낸 수술자국이 선명하다. 노인의 주름이 한 생애를 대변하듯 상처투성이의 은행나무는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해진다. 사실 은행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무 중의 하나이다. 제 이름 속에 여러 무..

좋은 수필 2025.06.01

벼리/조미정

벼리/조미정 고깃배가 닻을 내린 부둣가에 그물이 낭창낭창 비린 몸을 말리고 있다. 갯바람에 뒤척일 때마다 바다에 시달린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골수는 다 빼주고 푸석한 구멍만 수백 개 남았다. 빠끔한 구멍사이로는 시도 때도 없이 바람이 든다. 어장을 찾아 던져놓았던 그물은 지난밤에 한쪽 몸이 싹뚝 잘린 채 배에 실려 왔다. 조류에 휩쓸려 떠다니다가 근처 다른 배가 쳐놓은 그물과 뒤엉켜버렸던 모양이다. 엉킨 매듭을 풀려고 얼마나 용을 썼던지 찢기고 쓸린 몸은 온통 푸른 멍 자국투성이다. 일일이 어루만지고 꿰매어서 손질한다. 그물을 만지면 허리 한 번 펼 날 없었던 엄마의 삶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쪽빛 바람 사이로 걸어 나온다. 엄마는 대청마루 귀퉁이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찢어진 그물을 깁고 있다. 한 ..

좋은 수필 2025.06.01

​감또개/이상수

​감또개/이상수​담벼락 아래 어린 감이 여럿 떨어져 있다. 감꽃과 함께 풀섶이며 길바닥에도 나뒹군다. 지난밤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에 그만 버티지 못하고 낙과한 것이다. 생을 다 살아내지 못한 감또개를 보면 가슴 한쪽이 아릿해진다.고샅길 돌아가면 큰 기와집 대문 앞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감꽃이 팝콘처럼 매달려 눈이 부셨다. 여름이면 넓은 그늘에 동네 어른들이 자리를 깔고 더위를 피했다. 가을엔 주렁주렁 홍시가 달리고 새들이 몰려들어 나누어 먹었다.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나는 감나무를 가진 집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간밤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다녀간 이튿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외양간 쇠죽 아궁이엔 일찍 일어난 아버지가 쇠죽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눈썹 밑에 붙어있는 ..

좋은 수필 2025.05.31

쇠부리의 문장론/이상수

쇠부리의 문장론/이상수 이 문장은 수백, 수천 번의 메질로 태어났다. 대장간의 호미, 낫, 쇠스랑을 본다. 날 선 농기구들의 어깨가 단단하다. 제 이름을 얻기까지 저것들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야 했을까. 눈부신 절차탁마 앞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광석을 녹여 쇠를 뽑아내거나 가공하는 모든 작업을 쇠부리라 한다. 원광석을 숯과 함께 용광로에 넣어 하루 정도 불을 때면 천삼백 도 이상의 고열에 녹아내려 쇠똥과 분리된 쇳물이 나온다. 이 선철을 단야하면 농기구가 되고 조리도구로도 탈바꿈한다.  다섯 평 남짓 허름한 대장간엔 여러 가지 도구들로 가득 차 있다. 흙으로 만든 화덕은 불꽃을 일구며 시커멓게 그을렸고 손풀무가 바쁘게 들락거린다. 널찍한 가운데를 차지한 모루는 반질반질 닳아 관록을 자랑하..

좋은 수필 2025.05.28

탈출기/이문자

탈출기/이문자 도대체 댁은 뉘시냐고 탈출은 또 웬 소리냐고 물으시겠지요. 이런 말 있지 않습니까요. 뭐가 빠진 놈이니, 인간이니 하는… 나, 우리 주인님과 오랜 세월을 동거 중에 퇴짜를 맞고 쫓겨난 바로 그 녀석입니다요. 점잖게 ‘담낭’이라고들 합니다만 내겐 ‘쓸개’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내 주인도 그리 불렀으니까요. 이 몸, 일곱 번 이상이나 강산이 변한 세월을 제 소임만 다해왔을 뿐, 졸지에 밖으로 끌려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기진맥진 만신창이가 된 내게서 집도의가 꺼낸 건 어이없게도 돌덩이 구슬 두 개. 흡사 쌍둥이처럼 닮은 커다란 구슬이었네요. 어디 닮을 게 없어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은 걸까요. 이녁의 출현에 수술실이 술렁거렸네요. 어릴 적 갖고 놀던 유리구슬 흡사하다나 뭐나.얌전히 ..

좋은 수필 2025.05.26

붉은 땅이 온다 / 홍윤선

붉은 땅이 온다 / 홍윤선 저 청색은 빨강에서 시작되었다. 황토에 녹아든 홍색이 소나무 줄기를 적시고 가지 끝에 이르러 온통 푸르게 타오른다. 청청한 불꽃에 결이 있다면 노송의 바늘잎처럼 연약하나 심지는 강렬할 것이다. 적토와 적송이 하나로 몸을 태워 훨훨 뻗쳐오르더니 하늘 가에 파랗게 닿는다. 벌건 태양은 멀리서 조용히 거들 뿐이다.​마을 뒷산으로 들어가는 첫머리에 ‘의령 성황리 소나무’가 서 있다. 동네 어귀에서 안길을 따라 네댓 집 지나면 이내 마주하는 천연기념물이다. 땅심을 뚫고 나온 뿌리가 살길을 찾아 가파른 지면을 더듬는다. 얼기설기 엮고 부챗살마냥 펼쳐 날뛰는 비탈을 버텨낸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게 몇이나 되던가. 서로 기대어 의지처를 마련한다. 다시 흙살을 파고든 노근이 어..

좋은 수필 2025.05.25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나는 80입니다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서로 모르는 사이가서로 알아가며 살다가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인생?철학?종교?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좋은 시 2025.05.24

달제어獺祭魚 / 이정숙

달제어獺祭魚 / 이정숙 봄비 같은 겨울비가 오전 나절 추적댔다. 비가 남긴 습기와 만둣집에서 토해내는 증기에 붕어빵 굽는 내가 스며 외투를 파고든다. 예전과 달리 파는 곳을 찾기 어려워, 역세권에서 파생된 단어 ‘학세권’처럼 이른바 ‘붕세권’ 지도가 알음알음으로 공유된다는 풍문을 들었다. 풍문은 그저 풍문일 따름일까. 후문 경비실을 지나가면 붕어빵 노점 몇 곳이 위풍당당하다. 거리 간격도 제법 균형감 있는 세 곳을 그가 한 군데씩 들른다. 달차근한 훈김이 도는 봉투를 안고 그가 온다. 꼬리의 바삭거리는 식감과 풍부한 단팥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그가 인정한 맛집다웠다. 자매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붕자매 붕어빵이다. 사실 먹음직하니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마트 앞 붕어빵이 시각적으로는 더 높은 점수..

좋은 수필 2025.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