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우 무렵 - 김사인
서리태 한두홉을 냄비에 볶습니다.
서리태를 볶아 와
팔순의 아버지와 작은아들 나와 손녀아이가 둘러앉아
콩을 먹습니다.
어머니는 가시고
장맛비가 오는데
갓 올린 봉분 안부를
아무도 묻지 않고
오독오독 콩을 깨뭅니다.
콩그릇 곁으로 삼대가 둘러앉아
찧고 까부르는 테레비,
테레비만 멀거니 건너다봅니다.
* 삼우제(三虞祭): 장사 마친 뒤 세 번째 날의 제사.
하필 장맛비 오는 철이었나. 어머니 봉분은 무사한가, 아무도 묻지 않고 볶은 콩이나 깨문다. 낼 모레가 어머니 첫 기일(忌日)인데, 책 쓴다고 산골짜기에 박혀 있으니 내 처지도 딱하다. 남루하기가 굴 파고 들어앉은 들짐승 꼬락서니나 다름없다. 팔순 아버지와 딸이 있다면 서리태 한두 홉 볶아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련만! 아버지는 떠난 지 오래고 딸은 비행기로 스무 시간 넘어 가야 하는 먼 곳에 산다. 콩 볶아 함께 먹을 식구가 없으니,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불현듯 심장이 쪼개지는 듯 아프고 서럽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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