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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경과 서정의 심장을 녹이는 연륜의 시

에세이향기 2024. 6. 5. 03:42

서경과 서정의 심장을 녹이는 연륜의 시

 

 

 

김정순 시집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작가마을)

 

배재경(시인)

 

 

김정순 시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두 번 째 시집을 펴냈다. 1990년 《시와비평》으로 등단한 뒤 이제 두 번째 시집이라니, 30여년에 가까운 시력임을 감안해본다면 이는 분명 과작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발표 시들을 무결점의 작품들로 채우려는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작품들이 과작에 비하여 정체되거나 침체된 작품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지나친 과작의 경우 자기세계를 확보하지 못해 시력에 비하여 2%가 부족한듯한 느낌이 짙다. 그러나 김정순의 시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발표는 더디지만 시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번 시집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에 내재된 작품들이 견고하면서도 시인이 살아온 생애만큼의 연륜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창작의 감성들을 게을리 하였다면 결코 완성도를 높일 수 없는 작품들이다. 하여 그녀의 시집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를 읽는 즐거움 또한 클 수밖에 없다.

 

나이테가 촘촘히 박힌 시

김정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세월의 깊이다. 다시 말해 작품마다 삶의 철학이 배어든 시들이 시집 전편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다. 생명력은 아기의 탄생에서부터(물론 그 이전으로 간다면 남녀의 만남과 사랑이 전재되어야 하겠지만) 학창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길러 내보내고 하는 그러한 온전한 인생사를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60세를 넘긴 인생을 살았다면 삶의 연륜이 묻어 나와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으로, 그것도 완성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켜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쓴다고 그 인생이 다 작품으로 기록되어지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누구나가 역사적 명작들을 탄생시켰으리라.

 

몸 어딘가에 깊이 박혀서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 온 상처는

반들반들 잘 닦아 논 그릇처럼 윤이 난다

 

오랫동안 세월을 견뎌온 상처는

잘 빚은 그릇이 될 수 있나 보다

 

아린 통증들이 몸속에 들어

어떻게 반짝이는 빛으로 환생할 수 있었는지

 

그 깊은 심연에서

세월로 울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눈물에 젖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핏속 눈물 다 마시고

뼛속 울음 다 듣고 자리 잡은 상처는

뜨겁게 야물어져서

밥 한 그릇 거뜬히 퍼 담을 수 있는

힘이 생기나 보다

 

-「상처의 힘」 전문

 

시인은 “몸 어딘가에 깊이 박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 온 상처”가 “반들반들 잘 닦아 논 그릇처럼 윤이 난다”고 한다. ‘상처가 윤이 난다’는 이 작은 싯구에서 그 상처의 세월을 잘 녹여온 ‘버팀’과 ‘지혜’가 보인다. 상처가 가슴 쓰리고 지울 수 없는 고통일 때는 그 상처를 두고 “윤이 난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시인은 “오랫동안 세월을 견뎌온 상처”가 “잘 빚은 그릇이 될 수 있나 보다”고 자평한다. 자신의 상처를 매만지고 다듬어 도공의 잘 빚은 그릇처럼 될 수 있다는 말, 이는 초월의지가 아니고는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심지어 “그 아린 통증”이 “몸속”에서 “반짝이는 빛으로 환생”한 것에 대해 화자 자신도 스스로 놀라는 눈치다. 시인은 그러한 초월의지를 “세월로 울어보지 않으면”, “눈물로 젖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독자에게 설파한다. 세상 그 무엇도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행복과 축복도 심지어 고통도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세월’과 ‘눈물’의 깊은 낭하를 지나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임을 화자는 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때문에 “핏속 눈물 다 마시고/ 뼛속 울음 다 듣고 자리 잡은 상처는/ 뜨겁게 야물어져서/ 밥 한 그릇 거뜬히 퍼 담을 수 있는/ 힘이 생기나 보다”고 자신을 위무한다. 이처럼 시적 화자가 내보이는 내밀한 정서는 시인 자신의 깊은 성찰과 깨달음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성찰의 시편은 다음 시에서 더 구체화 된다.

 

도서관에서 낡고 오래 된 역사책을 꺼내 볼 때면

어쩐지 가슴이 짠해 온다

베스트셀러 코너 옆에

간신히 자리 잡은 역사책처럼

노인 병동 침대 위에 꽂혀 있는 사람들

누워서 혹은 비스듬이 기대어

병실의 침대에 꽂혀서 잊혀 져 가는 사람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갈피갈피 새겨진 주름살

검게 얼룩진 세월의 흔적들

찾아보는 이 없고 먼지로 퇴색 해 가는 역사책을 펼치듯

노인 병동에서 면면히 이어 온 세월들을 읽는다

페이지마다 새겨진 사연들을 읽는다

도서관 한 귀퉁이를 차지한

발길 뜸한 책장 앞에 서서

저문 인생을 읽는다

 

-「역사책을 읽다」 전문

 

모든 세상의 시선은 젊음에 가 있다. 텔레비전도, 영화도, 해마다 유행하는 모든 상품들도 젊음에 코드가 맞추어져 있다. 번잡한 거리는 온통 젊은이들뿐이다. 그래서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언제나 찬밥 신세다. 어린아이들이라면 주변의 관심을 받고자 칭얼대며 울어라도 보건만 늙은 사람들은 칭얼댈 수도 없다. 그랬다면 꼼짝없이 치매환자로 취급당한다. 시인은 ‘역사책’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소외된 사물(사람)의 고귀함을 재발견한다. 여기서 ‘재발견’이란 시인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시를 통해 미처 인식치 못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도서관에서 낡고 오래된 역사책을 꺼내 볼 때면/어쩐지 가슴이 짠해 온다”는 화자의 시적 발아부터 시인의 심성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 가슴 아린 화자는 “베스트셀러 코너 옆에/간신히 자리 잡은 역사책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삶에 시선을 가져간다. 요즘 우후죽순 늘어난 요양병원 이야기다. 노인병동의 환자들을 가리켜 “침대 위에 꽂혀 있는 사람들”, “병실의 침대에 꽂혀서 잊혀 져 가는 사람들”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오래된 역사책’과 ‘노인병동의 잊혀져가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흐른다. 역사책은 눈길이 안 가는 책이라 할지라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책이다. 그러한 역사책을 통해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노인들을 위무한다. 젊은이들의 관심 밖에서 벗어나 오로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변동의 풍경을 화자는 안쓰럽고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애잔함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갈피갈피 새겨진 주름살”로 치환되고 있다. 그만큼 역사책의 소중함처럼 갈피갈피 새겨진 주름도 무엇보다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심 밖의 “먼지로 퇴색 해 가는 역사책”과 “면면히 이어온 세월들”의 화음은 절묘하다. ‘화음’이라는 밝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노인을 역사책으로 결합시키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이보다 더 적확한 화음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화자가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발길 뜸한 책장 앞에”서 “페이지마다 새겨진 사연”을 한 땀 한 땀 짚어가며 “저문 인생을 읽”는 역사의 소중함, 뜨거운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소중함을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의 가족이나 지인을 보고 느낀 심정일 수도 있겠으나, 이는 깊은 연륜의 성찰 없이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관조와 성찰의 시이다.

이러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시인의 성찰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명제이다. 좀 더 살펴보면 폭포를 노래하면서 “상처 없이 부서질 수 있는가//속속들이 부서지지 않고 무지개 꽃 피워 낼 수 있는가”라고 직언한다. 하지만 그 직언이 그냥 말로 해지는 단순한 직언이 아니다. ‘폭포’라는 이름에 걸 맞는 행위는 부서지는 상처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부서짐 없이는 “무지개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사실적 명제를 제시한다. 폭포가 되려면 위에서 밑으로 물이 떨어져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폭포는 ‘부서짐’이라는 강요된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로 그런 피할 수 없는 상처의 힘이 ‘무지개 꽃 폭포’를 창조해내고 있음을 화자는 깊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온몸 던져 아픔을 참아내지 않고는” 결코 “아름다운 삶의 빛깔을 빚을” 수 없다는 진리를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정순 시인은 또 이번 시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다음 시에서 깊은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한 포용의 작품세계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세상을 향해 제 속의 가시를

서슴없이 드러내던 가시나무

서퍼렇게 자라나는 손톱을 거두고

모처럼 둥글게 진다

함부로 갈라지던 길들도

어린아이처럼 순해지고

송이송이 쌓이는 꽃송이를 뒤집어쓰고

자포자기 죽어가던 쓰레기더미도 한순간

반짝 회생을 꿈꾸어 본다

가시나무도 단풍나무도 소나무도

집도 길도 사람도 오랜만에 함께

동색으로 어우러지는 순간

제 상처에 아파하던 것들이

서로의 상처에 꽃으로 피어나서

겹겹으로 피어나는 꽃잎 속에

얼룩진 몸을 묻는다

지상이

내 것 네 것

아무것도 우기지 않는 너그러움으로

환해진다

 

-「눈이 내린다」 전문

 

아주 서경적 분위기가 풍성한 시다. 아니 그보다 서경적 풍경과 서정적 평화가 도래한 시이다. 지상에 눈이 내리자 평소 “세상을 향해 제 속의 가시를/서슴없이 드러내던 가시나무”가 날카로운 “손톱을 거”둔다. 사통팔달로 갈라진 길들도 흙길이나 자갈길이나 할 것 없이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순해지”면서 “송이송이 쌓이는 꽃송이를 뒤집어” 쓴다. 이 세상의 모나고 갈라진 모든 것들, 쓸모없는 것들조차도 하나의 눈송이로 꽃송이로 변화시키는 화자의 심성, 이것은 상상력의 발원이라기보다 시인이 지닌 저 심중의 따뜻한 심장이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이리라. 이는 가시나무나 여기저기로 갈라진 길뿐 만 아니라 이미 용도 폐기된 쓰레기 더미에게도 반짝 회생을 꿈꾸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세상만물이 하나의 색으로 통일화되는, 서로의 상처에 꽃을 피우는 마법을 시인만의 상상력으로 치유를 한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이 “지상”이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는 “아무것도 우기지 않는 너그러움”의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조적 심상을 평화적으로 그려내는 김정순 시인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시 쓰기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을 주지하는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시인이라 하겠다.

 

 

객체화된 절제된 이미지 창출

 

김정순 시인의 세상을 향한 말더듬이에는 아주 다양한 모습이 포착된다. 그 한 부분이 ‘적막’을 즐긴다는 것이다. ‘즐긴다’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김정순 시인만의 내재율이 흐르기 때문이다.

 

집이 트림하는 소리

잡식동물인양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 삼키더니

속이 거북한 지 냉장고 방귀 뀌는 소리

허전한 옆구리로 딸깍 딸깍

싱크대 그릇들이 딸꾹질 하는 소리

TV 부속품들이 코고는 소리

수도꼭지가 쉬익 오줌 갈기는 소리

하품하는,

켁켁거리는,

하루를 신진대사 하는 적막

적막에도 오장육부가 있다는 걸 감지하는

귀는

5차원이다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 부분

 

이번 시집에서 김정순 시인의 성찰이 깊어 보이는 시 중의 한편이다. 화자는 고요한 적막을 통해 온갖 소리를 듣는다. 요즘은 도회의 소란함 때문에 적막이 주는 고요를 느껴본 이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김정순 시인은 시골과 중소도시의 경계에 있는 경남 사천에 거주함으로써 이러한 적막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으리라. 평소에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미세한 소리들이 ‘적막’에서는 모두 들려온다. 냉장고, TV, 싱크대 그릇, 수도꼭지 등 고요가 마치 오장육부라도 있는 양 “집이 트림하는 소리”를 내뱉는다. 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작은 풀벌레소리며 심지어 벼룩이 벽 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도 들릴 것이다. 그러한 적막의 풍성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다른 반증은 화자의 외로움이다. 화자의 외로움이 고요를 더 극대화시키고 잠 못 들거나, 아니면 일찍 깨어난 새벽의 적막을 통해 평소에 쉬이 듣기 힘든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 적막의 소리가 그냥 소리가 아니다. 화자가 내재한 정신적 온유나 명상, 깊은 사색에서 가져오는 자연의 소리를 오감으로 느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한밤, “500에서 거꾸로 0까지/전국의 산 이름 외우기/관세음보살 108번 216번 540번------/그러다가/해탈의 문턱에 들어선 건가/4차원 세계로 들어선 건가”라고 짐짓 놀란다. 갑자기 온갖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끌벅적한 저자거리도, 씽씽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도, 놀이터 아이들의 조잘거림도 아닌 한밤의 ‘고요한 적막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들은 “잡식동물인양 집어삼킨 냉장고의 방귀 뀌는 소리, 허전한 옆구리로 달깍딸깍 들려오는 싱크대 그릇의 딸국질 소리, TV부속품의 코고는 소리, 수도꼭지의 쉬익 내갈기는 오줌소리들이다. 이 소리들을 통해 ‘적막’에도 오장육부가 있고 "하품"을 하고 "켁켁거리는” 적막의 신진대사를 발견한다. 어쩌면 시인에게 한밤의 적막은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하다. 적막뿐 아니라 고요히 눈을 감고 가만히 바라보면 감은 눈 속에서도 빛이 보이고 각각의 색깔도 보이곤 한다. 우리는 그만큼 부대끼는 세상사에 함몰되어 바로 눈앞의 사물 외에는 쉬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는 현대의 부조리한 환경 탓이리라. 아무튼 이러한 적막의 소리들을 감지하고 또 그것을 여러 모양으로 표현해내는 김정순 시인만의 화법이 개성적일 수밖에 없다.

 

신발장에서 속절없이 삭아가는 구두 한 켤레가 있다

명품족이라고 그렇게도 아끼던 구두 한 켤레가 있다

 

중요한 행사에나 신겠다고

특별한 나들이에나 신겠다고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구두 한 켤레

 

추울 때는 구두가 얼어 버릴까 털신을 신고

비 올 때는 젖는다고 고무신을 신고

동네잔치 때는 밟혀 더러워진다고 헌 구두를 신고

명품을 신을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다

주름살만 늘어가는 구두 한 켤레

 

이제는 환자복 한 벌에

구두 대신 시린 발목 감싸 줄 양말 한 켤레

 

신발장에 모셔 둔 명품 구두가 아직도 구두코를 반짝이며

병실 창가에 걸어 논 벽시계처럼

사라지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까

 

-「기억하는 것이 슬픔일까」(-구두를 추억하다) 전문

 

시인은 고요라는 정적인 부분만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위 시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만나게 된다. 대한민국의 험난한 현대사를 살아온 구두의 주인을 만난다. “명품”구두라고 고이 모셔둔 구두 한 켤레, “중요한 행사”나 “특별한 나들이”에 신기 위해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구두 한 켤레, 그래서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구두 한 켤레, 추우면 얼어버릴까, 비오면 비 젖을까, 동네잔치 땐 여러 사람에게 밟혀 더러워질까봐 고이 모셔둔 구두 한 켤레다. 이처럼 구두 한 켤레를 아끼고 고이 모셔둘 정도의 사람이라면 구두 한 켤레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다. 구두의 주인에게는 물자가 풍족하여 쉽게 사 신을 수 있었던 구두가 아니라 가족들부터 챙기고 나서 벼르고 별러서 산 명품구두이기에 아까워 쉬이 신고 나가지를 못한다. 그런 소중한 구두이기에 아주 특별한 날에만 신으려고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구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구두에 주름살만 늘어난다. 실상은 구두의 주인이 주름살만 늘고 있을 것이다. 그 구두의 주인은 구두 대신 양말 한 켤레를 신고 환자복을 입고 있다. 그가 아껴둔 명품구두는 아직도 구두코를 반짝이며 신발장에서 자신을 신어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그 주인은 “병실 창가에 걸어 논 벽시계처럼/사라지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참 슬픈 우리시대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힘겨운 가장의 인생사를 한 켤레 구두를 통해 투영시킨다. 무수히 하고 싶은 말들을 한 켤레 구두를 통해 우리의 지난한 현대사를 담담히 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붙여진 제목 「기억하는 것이 슬픔일까」가 더 아련하고 눈물겹다.

시인은 또 대상을 아주 객관화한 이미지화를 시키는 재주가 남다르다.

 

가을날

 

따스한 등불 하나 밝혀 두리라

 

그대 어디 떠돌고 있나

 

그리움에 목이 매이거든

 

이 은은한 불빛 따라서 오라

 

-「감」 전문

 

짧은 풍경의 시이다. 하지만 이 시가 주는 감흥은 남다르다. 감을 “따스한 등불”로 객관화 시키고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사람들을 위로한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단순한 말로는 표현 할 수가 없다. “그리움에 목이 매”이는 순간순간이 어디 한두 번일까? 그럴 때 “이 은은한 불빛 따라서 오라”고 길을 제시한다. 감을 소재로 한 우리의 시 중에서 이런 명료하고도 객관화된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먹는 감, 까치밥 감이 아닌 지친 자에게 따뜻한 등불로 형상화 시키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아침에 눈 떠 내가 보이지 않거든

떠난 줄 알게

어디로 갔는지 알려고 하지 말게

소식 전할 메모 한 장 남겨 두지 않았다고

섭섭해 말게

작별의 말들이 무슨 소용인가

말없이 몰래 떠나는 적막의 아름다움

너를 사랑한 아름다움으로 생각해주게

가깝고도 멀리

있는 듯 없이 그렇게 살다 가세

 

그래도 차마 뜨거운 마음 숨길 수 없으면

어이, 어이, 한 번쯤 나를 불러나 주게

 

-「꽃잎」 전문

 

김정순 시에서 「감」처럼 아주 명징하게 객관화된 시이다. 어느 순간 사라진 꽃잎을 안타까워하는 화자의 심성이 어쩜 이리도 절제되고 절절할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어제까지 화자에게 미소를 짓게 해주던 그 예쁜 꽃잎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시들어 어제의 자태를 잃어버렸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아쉬움을 화자는 “소식 전할 메모 한 장” 없어도 “섭섭해”서는 안 된다고, 헤어짐에 “작별의 말들이 무슨 소용”인지 스스로 자신을 위무한다. 종내는 “가깝고도 멀리/있는 듯 없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화자 자신에게 청한다. 마치 노스님의 자연의 ‘인연’을 너무 묶지 말라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너무 크다면 “차마 그 뜨거운 마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움이 크다면 “어이, 어이” 하고 자신을 불러주기를 소박하게 말한다. 꽃잎 한 장의 상실에 이렇게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서, 그것도 유장한 미사여구를 붙여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고도 담백한 절제된 감성의 언어로 슬픔을 표현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언어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구절들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들만 본다면 “그의 멍울 선명하게 빛나네/잊으려했던 상처 생생하게 살아나네”(「동백꽃, 비에 젖네」) 라고 비오는 날의 동백꽃 이미지를 그리고 있으며 “봄이 저물자 꽃의 잇몸에서/이빨 하나가 쑥 빠진다”(「꽃의 진화」)는 봄꽃에 대한 표현, “무턱대고 촐랑촐랑 나왔다가/무차별 쏘아대는 네온사인에 하얗게 질렸다”(「초승달」)는 달에 대한 이미지가 새롭다. 또 “옹알이도 서툴던 영산홍은 그새 말문이 터졌다/철부지 수선화도/젖가슴을 부둥켜안고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늦잠」)는 나른한 봄의 이미지를 표현하면서 영산홍을 ‘옹알이 서툰 아이’처럼 만들었고 수선화는 ‘철부지’로 표현했다. 또 다른 달의 이미지를 “세상 물정 모르는 달빛이 따라와/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린다”(하현달)고 구축할 정도로 주제에 대한 이미지 창출이 마치 몸에 배인 옷처럼 자연스럽다. 이는 김정순 시인만의 탁월한 자연순화적 이미지로 독자들이 앞으로 더욱 더 깊이 있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김정순 시인은 이번 시집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의 시들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다. 산의 계곡이 그냥 계곡이 아니라 수천 년 수만 년의 물길로 만들어졌듯이, 강의 모래톱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 듯 자신의 연륜에 맞는 눈높이를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시인의 언어미가 주목될 수밖에 없다. 특히 서경적이면서도 서정성이 뛰어난 시편들, 이미지를 아주 객관화시킨 절제된 시편들이 우리가 김정순 실인을 새삼 주목해 보아야할 부분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