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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뚫린 여자 / 박영란

에세이향기 2025. 1. 15. 09:15
 
 

구멍 뚫린 여자/박영란

 

 

내 어깨와 팔을 지탱하던 힘줄 하나가 끊어졌다. ‘극상근’이라고 이름 불리는 하나가 고무줄처럼 끊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아울러 ‘어깨회전근개파열’이라는 병명이 주어졌다. 들여다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그곳에 무엇 때문에 이런 아수라장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긴 얼굴에 생긴 뾰루지 하나도 생겨난 이유를 모른다. 하물며 육백여 개의 근육과 약 이백 개의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자리한 오장육부와 그 사이로 정맥과 동맥이 어떻게 피돌기를 하는지, 어젯밤 먹은 야식이 위장을 거쳐 어떻게 대장으로 가서 똥이 되는지. 그 멀고도 가까운 내 안의 비밀을 어떻게 알겠는가.

바지의 고무줄도 끊어지면 버리든 갈아 끼워야 하듯, 사람에게도 이럴 때 수술이라는 방편이 있다. 아직은 버릴 수 없는 몸이기에, 어깨에 네 개의 구멍을 뚫어 그 안에서 뼈에 못을 박고 끊어진 힘줄을 끌어당겨 잇는 정밀한 일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졸지에 구멍 뚫린 여자가 되었다. 외견상 신체구조도 바뀌었다. 오른팔은 60도의 각도를 유지한 채 폭 4센티의 단단한 끈에 고정되어 버렸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이 끈은 등과 어깨를 지나 깁스와 연결되면서 큰 부피의 보조기까지 끌어당기고 있다. 수면 중에도 샤워를 할 때도 언제 어디서나 이 상태를 유지한다. 내 몸피는 어떤 경우에도 이 포지션을 잊지 않아야 한다. 어깨에 박은 나사못과 뼈와 힘줄이 자리를 잡고 한 덩어리로 굳어질 때까지 방심할 수 없는 자세다. 그렇게 해서 육십여 년의 수족이었던 오른팔과 손이 깁스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자 걸을 때 앉을 때 먹을 때 씻을 때…. 내 몸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주 서툴고 불편해졌다. 무엇 하나 예전처럼 원활하게 되는 게 없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단추를 끼워 넣는 것도 밥을 먹고 양치를 하는 그 사소한 작은 행위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비로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온전히 그 동작에 집중한다. 그나마 인체의 조직들이 두 개의 여분을 가지지 않았다면…. 만약 그런 상상을 해 보니 다행히도 눈이 두 개, 귀도 두 개, 팔과 다리도 두 개다. 좀 더 내부로 들어가면 신장과 폐등 대체할 무엇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인간에게 부여한 조물주의 한 수는 이런 것이 아닐까.

왼손은 차츰 자신의 능력을 깨달아간다. 오른손을 대신해서 해야 하는 일들에 비록 힘이 모자라고 재빠르지 못하지만 아주 주의 깊게 해 나간다. 나는 성마름을 누르고 인내를 기르면서, 왼손이 해내는 동작에 호흡을 맞춘다. 눈 깜짝할 사이 후다닥 해치웠던 행동들을 천천히 공들여한다. 아프고 당기고 힘줄이 다시 끊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매 순간 나를 제어한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는 주의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 대수롭지 않던 하루의 일과가 최고의 목표가 될 때 다소곳해지는 이 겸손은 뭘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하기 싫었던 것들이 그리워진다. 김장을 하는 번거로움이나 반찬을 만들어서 자식에게 보내고 어머니에게 가져가야 하는 시간들이 텅 비어졌다. 일상의 일들을 도우미와 남편이 해결해 준다. 내심 평생 바램은 남편에게 밥상 한 번 받아보는 거였는데, 그 소박한 앙심이 이렇게 풀어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국을 데우고 밥을 푸고 찬통의 뚜껑을 벗기고 숟가락을 놓으면서 나를 부른다. 물컵 하나 씻지 않던 남자가 생선을 굽고 큰 토막을 아내에게 놓아주고 가시를 추려주는 우직한 변화. 내 몸의 일부가 무너졌듯, 한 남자의 의식도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파열’이라는 고통 뒤에 한평생을 살아온 부부의 규칙에도 균열이 왔다.

왼쪽은 오른쪽을 버텨내고 오른쪽이 온전한 오른팔로 돌아오기 위해 버텨야 하는 시간은 대략 1년이다. 겨우 4주째 오른쪽 손가락의 신경이 살아나 본능을 깨운다. 고맙다. 평생의 노역에 생색 한 번 내지 않았던 오른손과 팔의 존재가 이제야 보인다. 신체의 개별적 개체들이 보내는 소리와 모양과 성질들에 마음을 기울인다. 수많은 세포와 신경과 혈관 등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신을 유지해왔고 평생 함께 가야 함에 유념한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은 몸과 마음이 상처를 입고 멈추어버렸을 때다. 구멍 뚫린 여자의 긴 독거는 시작되었다. 하루 세 번 아침, 점심, 저녁, 고무줄 도르래 막대기를 이용해 어깨와 팔을 잡아당기고 늘이면서 각도를 넓혀나간다. 인생의 재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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