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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마리아가 만나다 / 사윤수

에세이향기 2025. 1. 16. 09:38

부처와 마리아가 만나다 / 사윤수

 

 

 어느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웨이터에게 안심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고기는 마블링이 좋은 부위로 미디움으로 익혀주시고 소스에 후추는 조그만 넣으세요. 수프는 호박수프로 묽게, 그리고 샐러드는 올리브유를 듬뿍 뿌려주세요.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주방 쪽으로 걸어가서 주방장에게 시큰둥하게 전달한다. 안심, 하나! 

 

 종교가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저마다 다른 숭배의 대상과 계율도 결국 구원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귀결된다. 부처님 오신 날에 신부와 수녀가 법당을 찾아가고 크리스마스 때는 승려가 교회에 가서 성탄을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물며 불교에서는 일찍이 차별과 분별을 없애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전하지 않았던가.

 

 경주 남산의 수많은 석불 가운데 <불곡감실석조여래좌상>을 보면 나는 메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가 생각난다. 감실부처는 7세기 작품이고 피에타는 15세기 작품이니 감실부처의 나이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감실부처가 잠시 미켈란젤로에게 가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가 아득한 신라 땅을 향해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던 건 아닌지 상상해 보곤 한다.

 

 아뜩한 단애에 바투 서서 바위에 부처를 새기고 단단한 돌을 쪼아 그 속의 부처를 불러냈던 석공들의 정신은 어떠했을까. 석공들의 취향이 달랐는지, 상전의 요구에 따랐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많은 석조불상의 표정이 다 다르다. 내가 십대 때 본 석굴암 본존불은 눈꼬리가 너무 찢어지고 입술은 새침해서 그때는 왠지 부처의 얼굴이 심술궂게 보였는데 감실부처를 처음 보는 순간 그 모습은 치자꽃 향기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슬픈 듯 아픈 듯 내려다보는 조각품 피에타처럼 감실부처의 무릎에 누우면 그분도 자비로운 눈빛으로 내 영혼을 어루만져줄 것만 같았다.

 

 감실부처가 특히나 각별한 까닭이 몇 가지 있다. 양각, 음각, 선각으로 새겨놓은 마애불상은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인체보다 큰 환조불상은 장엄하면서 동시에 권위가 엿보인다. 그런 불상들이 높은 곳이나 벼랑에 있으면 바라보기가 어렵다. 감실부처는 중생의 이런 투정을 애초에 헤아린 듯 감실 안에 실제 한 사람이 꼭 맞게 들어앉은 크기와, 보는 이의 눈높이에 편안히 있다. 얼굴도 평범하여 어느 순간은 마치 우리들의 잃어버린 자화상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를 두고 극찬을 하지만 내가 석굴암 본존불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처럼 모나리자에 대한 극찬에도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정면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모습은 왠지 마주보기가 어색하고, 미소도 뭔가 불편하여 그다시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나의 감상 소감이다. 예술품을 두고 우열을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자리자의 미소가 그토록 아름답다 하니 그에 비한다면 감실부처의 미소는 위대함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물론 부처가 무슨 칭송을 바라지도 않을 터이니 감실부처의 미소가 얼마나 지극한 깊이를 가지는지, 그 깊이를 어떻게 마음에 담을 수 있는지는 오로지 바라보는 자의 몫이다.

 

 감실부처의 모습을 두고 평범하다고 말했지만 아무렴 그저 평범하기만 할까. 처음 모습은 어떠했는지, 기나긴 세월 동안 들이치는 비바람과 사람들의 손에 깎여 현재는 다소 변한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추측들은 중요하지 않다. 감실부처는 그 모든 시간을 넘어 우리와 가장 닮은 모습으로 가장 가깍ㅂ게 지금 현현해 있다. 오죽하면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 '할매부처'라는 애칭까지 생겼겠는가.

 

 감실부처는 저마다 바라보는 위치와 빛의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조쌀한 할머니로 보이고, 내 눈에는 스스러운 아가씨나 새댁 같다. 옆에서 보면 갓맑은 미소년 같다가, 또 다른 지점에서는 내 나이를 맞춰보라며 시치미를 뚝 떼고 앉은 산신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심연을 헤아릴 수 없는 그 미소가 감실부처의 트리이드마크이다. 사진작가들도 인물 사진 찍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하물며 단단한 돌덩이를 쪼아서 그토록 지고한 해안解顔을 만들었으니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던 석공의 영혼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감실부처의 미소는 더욱 초연하고 초월적이다.

 

 아무튼, 박물관 속에 있는 작품들은 더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가 "영원하지 않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다. 자연 속에 있는 예술품들은 태양과 달빛을 조명으로 삼고 비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꺼이 소멸을 받아들인다. 감실부처의 미소도 알게 모르게 쇠락해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본 그 미소는 우리의 가슴에 영롱하게 남는다.

 

 작년에는 동짓날에 맞추어 감실부처를 찾아갔다. 바람이 차가웠으나 햇빛은 화창했다. 감실부처는 탑곡과 불곡의 도린곁 나지막한 곳에 있다. 터는 양지바르고 무척 아늑하여 갈 때마다 주변 평지에 벌러덩 누워본다. 그대로 부처의 품이다. 나는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신의 품이라면 어디든지 좋다. 쪽빛 하늘이 광배처럼 솔숲에 스미고 새들은 옹달샘에 헹군 듯 맑은 목청으로 지저귄다. 다람쥐가 도리반도리반 뛰어간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을 때는 저 들짐승들이 이 신전을 찾아오겠지. 부처도 잠시 묵상을 접고 나와서 숲의 만물과 술래잡기를 하며 노실까?

 

 오전 열한 시가 지나자 해가 서서히 감실 위로 흐른다. 화강암 천정이 부처의 이마에 시나브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열한 시 사십 분, 사십일 분, 이 분……한 해 가운데 감실 속으로 햇빛이 가장 깊이 깃드는 순간이다. 하늘의 스포트라이트가 조도를 높이며 감실을 비추니 부처의 상호相好가 눈부시게 빛난다. 해탈이 거기에 있다. 극명한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며 감실 둘레의 그림자가 쓰개치마 마냥 부처의 발치까지 감싼다. 그 모습은 아! 성모 마리아가 까만 미사포를 쓰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나는 그때 알았다. 불이법문, 부처와 마리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세상 모든 생명이 그분들의 같은 자식이라는 것을.

 

 동짓달 둥근 달이 휘영청 떠오르는 날이면 할머니부처는 새들이랑 다람쥐랑 산토끼를 불러 모아놓고 달빛 아래 조곤조곤 옛얘기도 들려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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