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당신들 - 이주옥
당신이라는 단어가 어느 날 새삼스럽게 다가들었다. 당신, 세상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또 있다는 것이 고마워서다. 인생의 가장 적요한 시간에 나 아닌, 그 당신이 빼꼼히 들여다봐 줄 때 더없이 따뜻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슬픔에 빠져 있다가 그 슬픔에서 빠져 나갈 때 가장 힘이 되어주는 것도 당신이다. ‘당신’이란 이름은 그저 2인칭으로 갇혀 있을 때는 막연한 거리에 있다. 그러나 그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 내게로 걸어왔을 때는 가장 따뜻하고 친밀한 이름이 된다.
세상엔 많은 당신이 있다. 또한 무한정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당신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쓰이는 곳은 부부 사이일 것이다. 당신이란 이름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부를 때는 너와 나를 지나 우리가 되어 한 세상을 이룬,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가장 친밀한 관계로 나란히 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겪어야 하는 무한 질량의 책임을 동반한다. 부부간의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지만 처음엔 그리 쉽게 나오는 말은 아니다. 혀끝에서 맴돌다가 입 밖으로 나가기까지 수십 번, 수백 번 굴림을 반복할 것이다. 아마 맨살을 스스럼없이 보여도 아무렇지 않게 될 때쯤 자연스럽게 부르게 될까. 그러다가 익숙해지면 더없이 만만해지고 경계가 무뎌지고 경직도 풀리는 것 같다. 그때의 당신은 낭창거리기까지 하다.
당신은 인간관계의 시소 끝에서 얼마간의 질량을 갖고 분명 친숙한 궤적으로 쌓인다. 하지만 때로는 그 질량 위에서 팽팽하게 버티며 균형의 저울이 되기도 한다. 누가 더 힘을 써서 더 아래로 기울어지는 무게를 갖느냐는 그때그때 감정의 경중이나 형편의 수위에 따라 달라진다. 알게 모르게 묵직한 중량이나 거리를 가지면 당신은 저만치 내려앉아 있다. 또 어쩌다 소신이나 자아를 잃고 무작정 헤살거리는 감정의 끝에서 내려다보면 손끝에 닿을 듯 가깝다.
결혼 후 얼마 안 가 남편이 내게 당신이라고 했을 때 등줄기로 벌건 열기가 한소끔 솟아올랐다 사그라졌다. 조금은 낯설고도 겁났던 부름이었다. 쉽게 무를 수 없는 관계와 서로 간 예속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무게와 우려였을까. 나는 아직 남편에게 흔연스럽게 당신이라 부르지 못한다. 여전히 남편이 가까이 있을 땐 화장실 세면대 물을 틀고 볼 일을 보고 여전히 남편 앞에서 옷을 갈아입지 못한다. 남편은 결혼 27년 동안, 그런 낮으나 견고한 아내의 문지방을 훌쩍 넘지 못하고 한 발은 밖으로 뺀 채 주춤거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부부간의 가장 일반적인 호칭 앞에서 여전히 민망해하고 익숙하지 못한 걸까. 가끔 입안에서 굴려 보지만 혀끝을 벗어나지 못하고 얼쯤한다. 그건 부부가 갖는 무한 질량의 책임 앞에서 회피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다시 혀를 굴려본다. 당신. 여전히 입안에서만 낭창거린다.
그렇게 남편에겐 선뜻 쓰지 못하는 호칭을 가끔 부모님께, 특히 아버지께 편지를 쓸 때 자주 쓴다. 고교시절, 어버이날에 즈음해서 부모님께 편지쓰기 과제가 있었다. 그때 난 꽤 성숙한 사유의 물결을 타면서 나만의 상념에 도취해 있었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 비장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마지막 줄에 “당신의 남은 생 앞에 5월에 부는 싱그러운 바람이 한번쯤 불어오기를 바란다.”고 썼던 것 같다. 상투적인 아버지란 말 대신 ‘당신’이란 호칭을 쓰며 사뭇 어른 티를 냈다. 어느 날 나를 불러 앉힌 아버지는 진지한 얼굴로 ‘싱그러움’의 뜻을 설명 해보라고 했다. 아버지 연세와 나의 그 시절에 어울리는 맞춤형 설명을 또박또박하던 내 눈을, 조금은 경외감을 가진 채 바라보시던 아버지. 나 또한 한 인간인 ‘당신’으로 마주 하던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자신의 물리적 아픔 앞에서 또는 자식인 내가 드린 정신적 아픔 앞에서 종종 애틋하고 죄스런 ‘당신’이 되어 나를 울렸다.
연세 지긋한 어른을 지칭할 때도 간혹 조심스럽게 당신이라고 할 때가 있다. 내 격을 보이는 데도 그리 천박하지 않고 실례가 되지 않는 호칭이다. 그때는 대략 진지한 의사 전달을 하거나 정중한 답을 할 때 붙이게 된다. 특히 어르신을 칭할 때면 한 사람 생애가 더 없는 무게와 경외를 갖는 의미로 다가들기도 한다. 당신 다음에 ‘께서’를 붙이면 극존칭으로 손색이 없기도 하다. 대부분 구술보다는 문장 속에 담기기 쉬운 당신이란 호칭엔 다소 경직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진솔한 눈물이 묻어있고 연민이 따라갈 때가 많다. 그때의 당신은 묵직하다.
하지만 어쩌다 관계를 정립하는 분명한 이름 대신 타인에게 칭하는 애매한 ‘당신’은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함의 문턱에 걸려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 땐 꽤 아슬아슬한 경계의 말이 되는 듯하다. 혹여 바라보는 눈빛이 미혹함으로 비춰지면 그때의 ‘당신’은 불시에 노곤해지고 때론 의식의 바닥까지 침몰한다. 그러다 그 인연에 다소 억지스러움이 동반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금세 풀린 옷섶을 여미 듯 정갈함으로 무장하고 관계는 구겨진 종이컵만 놓인 공원 벤치처럼 황량해진다.
당신’이 입 밖으로 나와 강렬하고 날카로울 때가 있다. 흔히 서로 이해타산이 맞지 않을 때, 시비가 붙었을 때다. 눈꼬리를 날카롭게 올리면서 허리에 한 손을 얹고 코앞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 멱살잡이까지 가는 데 거침없는 화살이 되기도 한다. 기분이 내려앉거나 흥분됐을 때 날카롭게 외치는 당신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리꽂히며 관계에 냉기가 흐르고 흐트러진다. 그 날의 ‘당신’은 비속함으로 단숨에 낙하한다. 그 순간 상하관계도 무너지고 수직관계도 끊어진다. 그때의 당신은 날선 칼이 된다.
당신이란, 한 없이 정중하고 다정하기도 하지만 또 한없이 천박해지기도 하는 다소 요망한 단어일까. 당신은 곱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 때론 가장 가깝기도 하고 가장 멀기도 하다. 더없이 가까운 당신이기에 또한 낯선 타인이 될 수도 있는 예민한 ‘당신’, 너무 가까워서 뭉개지고 또는 너무 멀어서 참혹해지는 이름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격하되며 관계의 반전을 주기에 또한 당신은 맛깔스럽기도 하다. 머물다 차갑게 떠나가고 또다시 뭉실하게 다가드는 나의 당신들을 통해 삶의 자락은 가끔 향기롭고 가끔 춥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내 인생의 여울 위에 놓인 당신들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을 조용히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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