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최소단위, 숟가락 / 마혜경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을 땐 말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 밥은 하루만큼의 태엽이고 끈끈한 다정함이다. 어둠과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밥이 그리워진다. 나에게 말은 의미의 모양이며 활짝 열리는 관계의 끈이다. 밥이 키운 말들이 따뜻한 손이 된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입은 소리를 찍어내는 틀이자 생명을 불어넣는 밥의 입구가 된다. 밥을 먹을 때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들어가는 밥과 나오려는 소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말하면서 밥을 먹을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온전히 들어가야 할 밥과 오롯이 나와야 할 소리가 같은 지점에서 만나면 무척 낯설어진다. 난 그날 이후로 목구멍에서의 이 어색한 조우를 정리했다. 밥은 밥대로, 소리는 소리대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는 밥을 먹고, 말할 때는 말을 하는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다하는 편이다. 누군가는 이 일을 고상함이나 침묵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날 아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기상 캐스터의 하얀 입김이 바람에 날리고, 아나운서가 한파주의보라고 여러 번 강조하던 12년 전 겨울. 아이들이 남긴 밥을 국에 말아 먹으며 날씨는 좀처럼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는데,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컥 복받치는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밥을 부둥켜 끌어안았다. 목에서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못하고 밥과 울음이 섞여 그만 무덤이 되고 말았다. 죽음이 이물감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날 내 목구멍에 걸린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마치 기억의 저편에서 발신한 부고장처럼 무언가 서글픈 마음이 도착하고야 만다.
사람이 쓰러지면 의지도 쓰러지려나. 두 노인만 사는 집, 욕실에서 쓰러져 바둥거리는 남자를 일흔이 넘은 여자가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우나. 젖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은 이미 바닥이 되었을 테니. 119에 신고를 한 뒤 두 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기지만 어깨가 문턱에 걸리고 만다. 욕실 바깥으로 간신히 머리까지 내놓았을 때, 남자가 컥컥 숨을 내뱉는다. 팔다리가 뻣뻣하고 말이 굳어버리고 정신이 흐릿하다. 곧이어 어깨가 들썩인다. 발작을 하는 남자를 그렇게 뉜 채 여자가 한 일은 주방으로 가는 것이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그릇에 밥을 담아 아침을 차린다. 그날 엄마의 모습은 내 심연 속에 오래 박혀있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감추고 싶은 그 일이 왠지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부유물처럼 떠오른다.
눈동자가 돌아가고 숨이 점선처럼 끊어져갈 때, 여자는 생명의 환대를 받으며 뜨거운 밥을 욱여넣는다. 남자가 꺼져가는 삶의 터널을 지나 마지막 목숨을 삼킬 때에도 여자는 목구멍 안으로 생명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서 퍼덕거리던 두 발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림이 잔잔해지면 들뜨던 어깨도 가라앉기 마련이다. 그날 엄마와 아버지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에 있었다. 꺼져가는 눈동자 위에 밥을 먹는 여자의 모습이 각인되고 남자는 눈을 감으면서 여자의 모습을 덮어버린다.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채 밥을 넘길 수 있을까. 누가 한 사람의 죽음을 구경하며 밥을 삼킬 수 있을까. 누가 죽음이 밥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장례식장의 밥은 '죽어가는 사람'의 배려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마지막 정성이다. 살아 있는 한 살려야 하는 노력이 죽음을 잠시 눈멀게 한다고 믿고 싶다. 불현듯 가버린 아버지가 사뭇 아쉽지만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엄마의 태도 또한 가슴에 슬픈 미련으로 남아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날의 그림 한 장이 내내 가슴을 미어터지게 만든다.
엄마는 서둘러 정리했다. 외투를 골라냈고 신발을 모았다. 책과 서류들을 재활용 상자에 쌓았으며, 돋보기와 노트, 시계는 서랍에 보관했다. 정리하다가 다시 흐트러뜨리고 그러다 다시 담아내기를 반복한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르진 않았다. 수북이 담긴 밥그릇을 바라볼 때면 엄마가 원시적인 인간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음식보다 먹이에 충실한 한 마리의 동물처럼 보인다. 꺼져가는 삶 앞에서 죽음을 반찬 삼아 먹이를 먹던 암컷인데 무엇이 두려울까. 한낱 배를 채우는 먹이일 뿐 그것은 사랑을 키워내지 못했다. 나의 목에 걸린 밥과 울음소리는 여태 무덤으로 서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밥은 산처럼 쌓여간다. 입은 더할 나위 없이 벌어져 먹이를 낚아채는 짐승 같다. 하필 왜 밥이었을까. "어떻게든 살렸어야지!"
남자의 떨리는 눈동자,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만 됐다며 무언의 부탁을 한다. 응급실에 자주 실려 가던 터라 몸과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탓이 크다. 오래전 남자와 여자는 약속을 했다. 누구든 먼저 쓰러지면 그냥 보내주기로.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겨서 여자를 나무라던 참이다. 그날 뒤늦은 약속이 지켜졌다. "곧 갈 테니 먼저 가." 귓속말로 남자를 배웅하고 땀에 젖은 몸을 끌고 간신히 주방으로 기어간다. 새끼들 때문에 조금 더 살아야 하는 여자는 저혈당 증세를 억누르기 위해 밥 한 숟가락 삼키고, 남자의 꺼져가는 눈빛을 바라보며 꺼억꺼억 울음을 삼키고.
엄마 입에 밥이 들어간다. 거울을 보듯 마주 앉아 나도 입에 밥을 넣는다. 눈처럼 하얀 밥이 그 겨울의 슬픔 위로 쌓인다. 아픈 말들을 잠재우고 조용히 밥을 먹으면 밥알이 알알이 구르며 마음을 읽는 시간이 다가온다. 말을 하지 않아도 하루만큼의 태엽이 감기고 끈끈한 다정함이 서로에게 도달한다. 엄마 입이 열리면 내 입도 크게 열려서 오롯이 밥의 시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엄마 가슴에 묻힌 아버지에게도 내 심연의 무덤에게도 살고 싶다는 의지가 닿아서 하루씩 살게 만든다. 밥을 먹으면 신기하게도 내일이 온다는 믿음이 쌓인다. 엄마를 필사하면서 알게 된 하나. 삶의 최소단위, 숟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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