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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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별이 되어 / 김필령

에세이향기 2025. 1. 2. 09:33

별이 되어 / 김필령 

 
 

밑에 길게 드러누운 황토밭,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느린 훈시를 듣고 서 있는 아이들처럼 어린 감나무들이 고개를 떨구고 줄지어 서 있다. 붉고 푸른 단풍나무가 밭둑을 따라 담장처럼 빙 둘러쳐져 있어 산밭은 더욱 아늑하고 고요하다.

땡볕이 내리쬐는 오후, 신발을 벗고 밭고랑을 타고 들어가 한 뼘 자란 풀을 뽑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픔보다 더 큰 슬픔이 있으랴.’ 한 움큼씩 뿌리째 뽑혀 올라올 때마다 창자가 끊겨 나간듯이 배를 쥐어짠다. 구토가 일어난다. 피눈물이 고이고 두 무릎은 어느새 땅에 꽂혀있다.

산밭에 오르는 두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아가면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있었다. 흙벽은 허물어지고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낡은 기둥이 겨우 지탱하고 있다. 마당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그곳에 어둠이 웅크리고 있어 대낮에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대나무 숲이 우거진 틈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서면 잠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짐승이라도 금방 튀어 나올 것 같은 동굴처럼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두현이네 가족은 마당에 잡풀을 베어내고 다급하게 문짝도 고쳐 달았다. 바람이 숭숭거리는 흙벽도 야무지게 틀어막았다. 다 낡아 쓰러져가는 기둥은 쇠파이프로 고정시키고, 지붕에는 푸른 천막을 치고 얼기설기 끈으로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꽁꽁 묶고,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이 어설픈 움막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마치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찾아든 것처럼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그곳에 엄마, 아빠, 누이, 그리고 두현이 네 식구가 둥지를 틀었다.

어느 날, 밭일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두현이를 만났다. 그 집을 기웃거리다가 마당에서 나무를 다듬고 있는 두현이를 보고 매번 지나쳤지만, 오늘은 오고가던 좁은 길에서 마주친 것이다. “어디 다녀오니?” 첫마디를 건넸다. 서로가 인사를 나누지 않았을 뿐 얼굴은 익히 알고 있는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현이는 움칫거리며 약간의 경계심을 보였다. 여기에 이사 온 후로 처음 사람을 만난 것처럼 신기하기라도 한듯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목걸이 만들려고 나무를 찾다가 그냥 돌아오는 길이에요.” 떠듬떠듬 그의 말하는 태도에서 덩치에 비해 마음의 나이는 어린아이에서 멈춰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현이는 스무 살 청년이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아이다. 유일한 그의 취미생활은 집에서 홀로 나무를 깎아서 목걸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엄마 아빠가 직장에 나가시고 동생은 학교에 가면 혼자 덩그러니 남아 나무를 가지고 동그랗게, 네모, 세모 형태의 모양을 작게 다듬어서 색깔별로 줄에 매달아 벽 한 편에 걸어두는 것이었다. 마루에 앉아서 방안의 벽면을 보면 두현이의 작품이 나란히 걸려있다. 목걸이 모양보다도 형형색색의 줄들이 더 화려하다.

밭일을 하다가 지치면 평상에 누워 두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낮잠을 들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두현이네 가족과 같이 밥을 먹고 동화책도 함께 읽었다. 두현이네 집에 갈 때마다 동화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간 것은, 그 책을 함께 읽어내려갈 때 흐물흐물한 그의 눈이 햇빛이 비치는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 이해하며 가슴 한편에 차곡차곡 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책으로 인해 우리 사이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스무 살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나이 예닐곱 살의 두현이는 사람의 생김새를 가지고 절대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맑고 순수한 그의 영혼은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착하고 예쁜 그의 영혼은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모든 사물의 소리를 바르게 들으며, 모든 사물과 바르게 소통할 줄 안다.

하루는 윷가락처럼 작고 반으로 쪼개진 나무에 구멍을 뚫어 파랑 털실로 장식한 목걸이를 내게 걸어주었다. 투박하지만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감동과 탄성을 쏟아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아주며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 두현이의 어깨가 으쓱이는 모습을 보며 나의 마음도 덩달아 출렁거렸다.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목걸이를 손바닥 위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겉은 희고 속은 검은 띠가 굵직하게 들어차 있는 다릅나무였다. 다릅나무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다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현이는 그 나무의 숨겨진 이름의 뜻을 알고 목걸이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의 겉과 속을 보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현이와 좀 더 사이가 깊어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 집 주인이 산 밭을 일구는 일로 인해 그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사업실패로 인하여 오갈 곳이 없어 겨우 그곳에 터를 잡고 안정감을 찾아가던 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두현이네 가족은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던 두현이 아버지의 어깨는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거운 바위덩어리가 짓누르는 듯 온 가족은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두현이 삼촌에게 연락을 받고 그의 가족은 서둘러 서울로 떠났다.

저만치 뽑혀 나온 풀들은 땡볕에 시들해지고 생기를 잃어간다.

해 질 녘, 잔풀까지 말끔히 뽑혀나간 자리에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본다.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였는가.’ 두현이의 내면에 흐르는 맑고 깨끗한 영혼이, 가슴으로 뜨는 별이 되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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