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고택에서 / 박시윤

에세이향기 2025. 1. 16. 10:18

고택에서 / 박시윤  

관가정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른 봄의 따스함이 길 곳곳에 아지랑이로 내려앉아 있다. 온화한 지붕의 선에 시선이 머문다.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고요하고 옛것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은 바쁜 걸음마저 느리게 만들어 놓는다. 여린 봄바람에 바싹 마른 흙먼지가 회오리처럼 일다가 사라지다. 막 잎을 돋우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의 그늘과, 남몰래 하늘을 받드는 찔레의 군락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여린 순을 베어 무니 5월의 싱그러움이 입속으로 들어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친다. 찔레의 향기에 사로잡혀 갈 길을 잃은 지 오래다. 아득히 먼 옛날로 접어드는 시간의 길목처럼 잠시 동안 어지러움이 일었다. 현실에서 멀어져 머무는 동안 나의 마음은 600년을 거슬러 푸덕한 아낙이 되어 있었다.

 눈썹 담이 보인다. 낮게 드리워진 담 너머 숨겨진 시간들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긴다. 다급히 들어선 걸음이 마당의 고요를 깨문다. 오랜 잠을 깨웠는지 마당 아래로 수북이 쌓인 세월들이 일어나 일렁인다. 수백 년 세월의 흐름을 익히며 고요히 흘러왔을 이야기들이 하나, 둘 눈을 뜨며 수군대기 시작한다. 향나무의 푸른빛과, 이미 담을 넘어 버린 기름진 가지들을 본다. 받쳐 놓지 않으면 쏟아질 듯하 밑둥치가 나무가 늙었음을 말해 준다. 모두가 나무의 자태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나 깊은 뿌리를 가슴에 바기고도 옛것을 온전히 지켜내는 마당은 어머니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말이 없다. 그 누구도 마당을 보지 않는다. 수많은 발들의 흔적을 떠안고 숨죽이고 있는 마당은 온통 상처가 가득한데도 아무도 마당을 쓸어 주는 이는 없다. 태연하게 사라져 간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흩어져 가는 시간들을 기다리지 않으며 역사의 알맹이들을 품고 오늘의 고택을 만들어 왔을 마당이다.

 주춧돌과 기둥에 시선이 머문다. 색이 바랜 마다이과 고택 사이에 서 있다. 이것이 종가에서 제일로 손꼽는 기둥이리라. 오랜 세월 목조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며, 한치도 어긋남도 없이 기둥은 570년을 지내고도 품위를 넉넉히 유지해 왔다. 무릇 기둥이란 고요하면서도 강하게 서 있기를 원한다. 가문 대대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고도 또 다른 기둥을 길러내고 있다. 빈틈없는 선비의 얼이 서려 있는 기둥을 부여잡고도 평생 마당은 칠거지악과 삼강오륜을 가슴에 새기며 씨를 받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을 것이다. 기둥은 기둥을 이어 조선 오백 년의 양반 문화와 현대 문화를 하나로 잇고 있다. 세월의 미묘한 빛이 머무는 기둥 곁에 나는 여인의 모습으로 마음 한 조각을 떼어 놓는다.

 빗장이 열려 있다. 늘 열려 있는 문처럼 낯선 내가 들어서는데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는다. 들어선 마당에 처마가 그림자로 내려 있고 좁은 마당으로 사각형 빛이 들어온다.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사방이 꽉 막힌 네모진 구조가 조금은 답답해 보인다.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여인의 마음처럼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을 지켜야 할 것이리라. 잠시 걸터앉은 마루에 한바탕 바람이 들이닥친다. 답답한 구조건만 처마 구석까지 바람과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제야 하늘을 본다. 좁지만 끝없이 높은 하늘이다. 옛 여인들은 이 좁은 집에서 평생 지아비를 섬기고, 집을 섬겼을 것이다. 고택 목조의 촘촘한 구조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있다. 여인들의 눈물도, 고택의 눅눅함도 빛과 바람은 안다. 때에 맞춰 여인도 나무도 고루 숨을 쉴 수 있도록 달려와 치마폭에 안긴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겨 오는 빛과 바람은 향기요 빛이요 자식이었다.

무엇하나 함부로 자리하지 않았다. 고르게 내리쬐는 빛의 갈라짐이나 파고듦이 세월을 비추는 흔적처럼 고택은 역사를 머금고 있었다. 종부의 손때 묻은 마루며, 닳을 대로 달 ㅎ은 문고리의 반지르르함, 문살을 잡고 안과 밖을 넘보는 창호지가 강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것이 평야를 바라보는 부지런하고 넉넉한 옛 여인의 마음 같다. 눈썹 담 너머 고요히 펼쳐진 너른 들판을 바라본다. 잠시지만 종부가 떠받들던 기둥도 만져 본다. 오백 년을 흘러온 종부의 마음이 손끝으로 흐르며, 천 년을 향해 가고 있다.

 쪽문을 지나 가문의 숨결 사당을 지난다. 문은 닫혀 있다. 자연과 한데 어울리며 옛 모양 그대로 지니고 있어 더욱더 운치가 있다. 껍질을 벗고도 당당하게 서 있는 배롱나무를 보며 내 몸이 가려워 왔다. 덕지덕지 군더더기를 너무도 많이 걸치고, 숨기고 있는 내 몸이다. 나는 배롱나무 아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의 껍질을 비틀어 벗어 볼까 한다.

 가문의 터전을 잘 보존하는 게 후손의 도리이리라. 양동마을을 돌아 나오며 거미줄처럼 휘감았던 길을 되돌아본다. 대대로 이어져 온 음양오행에 따라 지어져 마을은 더더욱 운치가 깊다. 종가의 은은한 처마 선이 아름답다. 단아한 용마루며, 적절히 빛을 감싸는 월성 손씨 종가에 한가로운 햇볕이 감돈다. 태생의 유전자처럼 녹아 내리는 하루의 햇살이 양동마을의 고택에 깊은 유서로 남는다. 오래 되었다는 것, 늙어 간다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 한가로이 한옥채에 머무는 기둥과, 마당과, 빛과 바람이 학같이 깨끗한 한 선비의 가족을 잔영으로 남긴다.

보이지 않는 빛의 길

나는 또 시간의 흐름을 따라 길을 간다

한가로운 햇볕 슬며시 손 내밀면

옷고름부터 풀고 볼까

차가운 문고리 후끈 달아올라

대청마루 비스듬히

창호 문에 걸린 하루

바람과 나누는 미묘한 눈빛

그렇게

끝없이 고쳐 가는 기억도

어렵사리 건사된 우주의 빛도

결국, 오래가지 못했으니

애틋한 초가에

간지러운 발자국 몇 점 남길 거면

그냥 돌아나 가지

그리운 건

네가 아니던가

점점이 박힌

너에 대한 유서를​

고택 대청마루에 적어두고

너를 향한 마음은

끝없는 빛만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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