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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누름꽃 / 김희숙

에세이향기 2025. 2. 2. 10:45

누름꽃 / 김희숙

겨울 산은 묵직하다. 쌓인 눈 때문이 아니다. 겉옷 벗은 산은 생명을 키워낸 흙의 두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눈비 버티는 어깨에 육중한 바위까지 얹었다. 불갑산은 불가의 으뜸 고찰古刹을 품어서인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하중을 이기지 못한 산 그림자는 저수지 밑으로 가라앉는다. 세상사 밥그릇 무게는 또 얼마나 엄중한지. 자신이 가진 온 힘을 쏟아 지탱한다. 때로는 지친 몸이 밥숟가락 들 기력조차 없을 때도 생긴다. 이럴 땐 힘 얻을 곳으로 길을 나서는 것도 방법이다.

영광산림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살던 터에서 벗어나 한없는 가벼움으로 꾸민 정원이 있다기에 찾아왔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꽃밭이다. 흙 한 톨 없는 유리벽 안에 꽃들이 각기 다른 색을 뽐내고 있다. 가지 끝에 꽃송이를 매달거나 가지런히 빗어 내린 잔뿌리를 오롯이 내비친다. 입김을 불어넣는다면 금방이라도 오므린 꽃잎이 벌어져 하늘거리고 가느다란 잎줄기가 낭창거릴 듯 생생하다. 누름꽃이다. 댓잎이나 단풍잎을 문 창호지에 발라두던 어머니의 손길이다.

이곳 땅에서 자생하는 식물들로 이뤄졌다. 서릿발 선 흙덩이를 뚫은 변산바람꽃부터 살 에는 댑바람을 버텨낸 생강나무꽃, 푸름에 몫을 더하면서도 드러내지 않았던 매화말발도리, 거센 달구비를 헤치고 다음 계절을 불러온 붉노랑상사화, 가진 것을 훌훌 털어버릴 줄 아는 물억새, 아무리 매서운 추위도 때가 되면 물러간다는 희망을 품게 한 동백까지. 유리 정원에 백 가지 꽃이 피었다. 한결같이 가장 절정의 순간을 잡아두어서인지 빛나고 어여쁘다. 꽃누르미를 더듬는 눈길 사이로 옛 기억이 줄을 선다.

청소년과학경시대회를 앞두고 식물 표본을 제출해보자는 생물 선생님의 제안이었다. 그동안 나에게는 무릎 아래 초록인 것들은 그저 풀이었고 머리 위까지 자라는 것은 뭉뚱그려 나무였다. 질경이 토끼풀 뱀딸기 등 어른들에게 귀동냥한 이름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식물 나누는 기준이라야 소나 토끼가 잘 먹겠는가 논밭에서 뽑아 없애야 할 잡초인가 땔감으로 쓸 수 있는가 여부였다. 학교 주변에서 자라는 풀과 야생화를 캐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는 생경하면서도 호기심 반 부담 반이었다.

호미로 캐고 삽으로 팠다. 잎사귀 귀퉁이가 찢어지거나 뿌리줄기가 잘리면 안 되기에 한낱 풀들을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다뤘고 멋모르고 채집 후 헛짓을 했다가 뭉개지거나 생기가 없어져 버리기도 여러 번이다. 퉁퉁마디는 갯가에 무리로 자랐고 유홍초는 감나무 밭을 제집인 양 뻗어나갔다. 둑에서 쇠뜨기를 파오고 냇가에 떠다니는 마름을 건져왔다. 뿌리에 묻은 흙 부스러기를 씻어내고 신문지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작업을 되풀이하였다.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무거움의 도움이 절실했다. 교무실에서 전화번호부를 가져오고 책장에서 두꺼운 책만 골라와 신문지를 촘촘히 눌러주었다.

이삼 일마다 새 신문지로 갈아주었다. 물기 빼내는 일은 식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꽃누르미가 하나둘 완성되면서 스케치북에 생긴 모습대로 붙일 것인지 초생달이나 타원형으로 예술품처럼 꾸밀 것인지 구상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경시대회 짝이었던 남학생과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며 자주 부딪쳤다. 함께하는 일일수록 자신만이 옳다는 아집을 덜어내야 한다. 바짝 마른 잎사귀가 바스라지지 않도록 붙이고 사전에서 이름을 찾아주며 이야기 나누는 횟수가 잦아졌다.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양보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의견을 조율해나갔다. 부담을 나눠서인지 자신감도 얻었다. 두툼한 식물 표본집을 우편으로 보낼 적엔 남학생과 손바닥이 아프도록 마주쳤다. 풀숲을 지날 때 고개 숙여 헤집어 보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다.

우연히 찾은 네잎클로버는 책갈피에 끼워둔다. 잊고 지내다가 빛바랜 사진과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젊은 남자의 검게 그을린 낯빛은 웃음기가 없었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인의 배는 터질 듯 불룩하였다. 두 분 사이에 검정고무신 신은 여자 아이가 화환을 목에 건 채 상장을 가슴 앞에 들고 있는 사진이 책갈피에서 불쑥 떨어지던 날, 나는 시간이 멈춘 누름꽃 뭉치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졸업 사진이었다. 몇 년 뒤, 남자의 갑작스런 부음은 가족들을 당황시켰다. 가장이 하루아침에 먼 길을 떠났으니 마루에 차린 제단은 볼품이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졸업 사진에서 남자의 얼굴만 잘라 사진관으로 가져갔다. 눈빛은 형형하고 눈가에 주름 하나 없는데 무엇이 그토록 그를 짓눌렀을까. 도시로 떠난 형들 대신 발목을 붙들어 맨 논밭을 외면한 채 물가 낚시터만 맴돌았다. 해가 지나도 나아지지 않던 살림살이에 삶의 의지마저 접고 말았나 보다.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들을 두고 사각틀 속의 누름꽃이 되어 검은 띠를 둘렀다.

사진으로 시간을 새긴다. 복지관이나 관공서에서 홀로 사는 어르신들의 영정사진 찍어드리는 기부활동이 종종 있다. ‘영정사진’이라는 말은 거부감이 든다며 언젠가부터 장수를 기원하는 ‘장수사진’으로 불린다. 장수사진은 만수무강을 바라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생의 기록이기도 하다. 머리를 다듬고 간단한 메이크업을 해드리면 어르신들은 어색해하면서도 설레어한다. 수의와 관도 준비해 두었다는 말을 넌지시 뱉는다. 하지만 막상 의자에 앉으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진다. 카메라를 마주하며 생의 끝자락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노련한 사진사는 꾹꾹 눌러대는 셔터의 압박을 알기에 테스트 촬영부터 우스개소리를 곁들이고 본 촬영에서는 칭찬을 남발한다. 가벼운 농으로 무거워진 기분을 누른다. 어느 순간 긴장 풀린 입가로 살포시 미소가 번진다. 마지막 숙제를 해결한 양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다.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리라. 인화된 사진들은 저마다의 누름꽃으로 당당하게 내걸린다.

유리 상자 안 꽃누르미를 바라본다. 땅심으로 자라던 생명들이다. 흙을 떠나니 향내를 맡을 수도 손 내밀어 만질 수도 없다. 새순 돋아 잎을 키우고 단풍 들고 떨어지던 잎맥도 새들하고 씨앗을 품어야 하는 꽃술의 의무도 사라졌다. 피돌기가 멈춘 누름꽃은 과연 삶의 버거운 짐을 내려놓았을까. 피해야 할 비바람도 귀찮게 굴던 벌레도 없는 곳에서 자유는 얻었는지.

문득, 미동 없는 꽃가지에서 환청처럼 울림이 전해진다. 언젠가 한 줌의 재로 가벼워질 존재들 아닌가. 너무 무거워 말고 그냥 살라 한다. 생이란 사소한 일상의 반복과 밥벌이 무게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라고. 문밖에서 눈바람 냄새가 난다. 곧 잔 눈발이 날릴 낌새다. 발이 묶이기 전에 두고 온 터전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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