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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미술은 애도에서 시작되었다/박영택

에세이향기 2025. 4. 13. 12:24

 

 
 

미술은 애도에서 시작되었다/박영택

죽음이란 생물의 생명이 소실되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원래 없던 내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나는 사실 부재였다. 완전한 무無였다. 그러니 무로 돌아가는 죽음이란 결코 탓할 일도 아니고 밑질 일도 아니다.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애써 외면하더라도 결국 모든 존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것만큼 엄정한 사실, 진실은 없다. 삶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조건 속에서 펼쳐진다. 한순간을 사는 것이 생명체의 조건이다. 누구도 그 조건을 위반하거나 거스를 수 없다. '생자필멸'인 것이다. 언젠가는 끝나지만 그것이 '언제' 종료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삶의 아이러니이고 매력이다. 이 순간을 산다는 의식,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심정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예리한 인식은 인간이라는 종에게서만 나타나는 근본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그리스신들은 인간을 질투했다고 한다. 영원히 사는 신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인간이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겪고 이를 의식하면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죽음을 본 그 어느 날 이후로 '만드는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사랑과 추억이라는 것도 생겼으리라. 모든 이미지는 죽음을 환생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열망에서 나온다. 매장 풍습을 처음으로 행한 이들은 네안 데르탈인이라고 한다. 네안데르탈인은 일부러 땅을 파고 죽은 사람을 매장해 시신을 존중하고 훼손을 막고자 했다. 그들은 죽음을 발견했으며 시신을 삶의 공간과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기 시작했다. 무덤은 두 가지 기능을 행한다. 하나는 죽음을 기념하는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일상적 삶 의 공간에서 멀리 떨어뜨려놓는 것이다. 의도적인 은폐고 삭제다. 비로소 지상은 산자의 공간이 되었고 지하는 죽은 이의 공간이 되었다. 이후 인간은 죽음을 좀더 세련되고 정치하게 이해하기 시작했고 죽음 이후를 꿈꾸기 시작했다. 모든 문화는 그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해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정의하고 이해하며 처리하는 방식 역시 항상 역사적이 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란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죽음은 단순히 생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믿음, 정서, 의례 등이 결부되는 복잡한 현상'이다.

그래서 아리에스는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 집단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므로 그 상처를 치유 해야 한다. (...) 죽음은 늘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이었다"라고 말한다.

한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치명적인 상처인 죽음은 오랫동안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네안데르탈인들은 무덤을 만들어 죽은 이를 애도했고 무덤 주변에 꽃을 뿌리기까지 했다. 추모의 감정이 싹텄으며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매개가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인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인 크로마뇽인들은 동굴벽화에 죽음을 묘사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불멸을 욕망하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었다. 제의이자 주술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애초에 이미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부재에 저항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망이다. 그러니까 잔인한 시간의 승리 앞에 사라져버린 모든 것들을 안쓰럽게 추억하고 가슴에 담아두기 위해 이미지는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란 것은 시간의 힘과 죽음에 대항하고 저항하려는 인간의 의지이지 않았을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받아들이되 대신 이미지를 빌려 그 죽음·시간에 저항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의 파괴에 '이미지'라는 재생으로 맞선다."" 부패와 소 멸, 죽음을 넘어서서 상처를 보존하고 육체를 연장하려고 하는 욕망, 시간의 지배를 거스르고 시신에 방부 처리를 해 썩어가는 냄새를 지운 것이 바로 최초의 미술 작품에 해당하는 이집트의미라였다. 시신이 부패하는 끔찍한 연쇄 과정을 차단하려는 시도가 미라를 만든 것이다. 이후 조각, 그림, 사진, 영상이 그 뒤를 이었다. 최초의 조각은 시신을 돌에 새기는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돌이라는 물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영속적 인 것이라고 믿었다. 당연히 돌에 새겨진 육체는 불멸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돌로 제작된 죽은 이의 몸, 그 이미지는 결코 부식될 이유가 없었고 믿을 만한 어떤 것이 되었다. 이미지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영생과 불멸의 삶을 살 수가 있었다. 주검이 주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던 이미지는 '죽음 의 해체에 이미지에 의한 구성'으로 맞선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결국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지의 어원은 '이마고imago'로,

귀신, 유령이라는 뜻이다. 죽은 이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낸 것을 지칭하는 이마고는 장례식에서 마치 영정 사진처럼 내놓거나 자기 집 안마당 벽감 또는 비밀 창고나 선반에 모셔두는 것이기도 했다. '피구라figura'는 원래는 귀신이라는 뜻이었다가 나중에 형상이라는 말이 되었다. '우상idol'은 '에이 돌론eidolon' 즉 사자의 망령이나 유령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또한 '기호sign'라는 말은 묘석을 뜻하는 '세마sema'에서 왔다. 아울러 종교 의례에 쓰는 말이었던 '재현representation'은 '장례 의식 을 위해 검은 포장이 덮인 텅 빈 관'을 가리킨다. 그것은 중세의 장례식에서 고인을 대신하는, 손으로 빚은 채색된 형상이란 뜻도 있다.

 
시간과 죽음을 이길 수 없었던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위안을 얻고 시간과 죽음에 저항하고 견뎌낸다. 이제 '진정한 생명'은 허구적 이미지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 몸속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재현물은 사라진 사람을 단순히 물질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 육신의 생리를 간직한 사람의 일부이자 궁극적인 연장이었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죽음은 무엇보다도 이미지 이고 또 이미지로 산다"라고 말했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에서부터 이집트의 고분, 로마 시대의 석관과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바니타스)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죽음은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현대미술에 와서는 이전처럼 죽음의 공포를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 삶에서 본질적인 죽음을 완전히 외면해오지는 않았다고 본다.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현존하는 데미안 허스트 같은 작가들의 작업은 일관되게 죽음이란 테마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례들이다.

우리의 전통 미술 역시 죽음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특히 민화를 비롯해 다양한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과 일상용품에 깃든 온갖 상징들은 모두 죽음과 긴밀히 연관된 것들이다. 신화와 종교란 결국 당대인들의 생사관을 해명하고 죽음 이후를 약속해주는 이데올로기였고 따라서 그 시대의 모든 이미지는 그 이념의 도상화, 주술적 이미지였다. 예를 들어 고구려 고분 미술은 죽은 이의 공간을 장엄하는 이미지로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가시화하고 불사와 불멸에 대한 약속을 굳게 하는 것들이다. 신라 시대 무덤 안에 넣은 토우는 대부분 성행위를 하는 남녀상과 출산하는 임신부의 모습을 형상한 것인데 그 모습들은 한결같이 생산의 상징이자 풍요의 상징이요. 고인이 부활하기를 바라는 남은 자들의 마음에 따른 것이다. 민화(십장생) 역시 무병장수를 꿈꾸는 도상들이고 산수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불사하는 신선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기도 한다. 모두 불사와 불멸에의 강한 희구를 드러내는 의미로 충만한 도상들이다. 그것은 늘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 시도다. 그러니 전통 사회에서 기능했던 이미지들은 예외 없이 죽음과 절실하게 맞닿아 있었던 셈이다.

반면 한국 근현대미술에서는 상대적으로 죽음을 다룬 이미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경험 혹은 근원적인 부재에 대한 사유를 반영하는 미술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의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컴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가능한한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근대기에 형성된 '순수 미술'은 미술이 오로지 아름답고 감각적인 것 들을 다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강제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누드와 아름답고 싱싱한 과일과 꽃 등을 반복해서 그렸으며 생명 있는 것들만이 예찬되었다. 어둡거나 죽은 것들은 추방 되었다. 알다시피 근대성은 합리성과 과학이란 이름으로 우리 주변의 삶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지우고자 했다. 이전에 신의 영역이었던 죽음은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극복할 대상으로 변해 버렸으며, 나아가 '삶의 기쁨'만이 충만한 현실 세계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죽음을 금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근대는 '영성의 문화'를 '물성의 문화'가 지배한 과정이기도 하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미술 내적인 문제만을 형식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한국 현대미술 또한 인간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 들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사회와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가능한 한 미술에서 배제되었다.

이처럼 미술이 '개념'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만으로 모든 것을 끌어들이며 영역을 확장한 결과, 인간 존재의 문제는 미술가들로부터 소외되었다. 외부 세계를 미적으로 재현하는 구상 미술과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수용과 번안으로 강제된 그간의 한국 현대미술에서 죽음과 같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주제를 다루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이는 서구 현대미술과도 조금은 구분되는 우리의 특별한 경우다. 분단 상황과 반공 이데올로기, 권위적인 정치권력과 통제된 사상,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 대부터 이어져온 순수주의 미술관이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로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그만큼 미술을 장식과 아름다움 속에서만 이해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분단, 4·19와 5·16, 70년대 군사독 재와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죽음과폭력, 희생을 경험해온 한국 미술인들의 작품 속에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예가 드물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80년 대 후반을 거치면서 비로소 사적인 경험과 동시대 현실에서 마 주하는 다양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다룬 작업이 조금씩 출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간 금기시되던 '죽음'은 최근 인문사회학적으로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죽음이 새삼 성찰의 대상으로, 문제적 대상으로 부상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다.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자살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졌고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등 안 타깝게 죽어간 이들 또한 늘어났다. 그만큼 죽음이 빈번한 사건이자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내모는 이 사회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한편 바람 직한 삶과 죽음의 조건에 대한 인식도 뒤를 잇고 있다는 생각이다. 타자의 죽음은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변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죽음에 주목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불가피하게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성의 측면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회적, 정치적, 인문적 문제로 부상했다. 당연히 미술이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라면 한국 사회 에서 빈번한 여러 죽음에 대해 작가들이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 아래 한국의 구체적인 정치와 현실. 그리고 사회·문화적 현상 속에서 왜 죽음이 초래되고 있으며 어떤 죽음이 문제적인지, 과연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미술에서도 긴요하게 요구되는 일이다. 미술이 인간 다운 삶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의 실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고 반성하려는 것은 당연한 시도로 보인다. 그러니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려는 미술은 결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이미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인 조건 속에 놓여 있다. 그 안에서 미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애도'일 것이다. 애도의 시간은 우리에게 죽은 자들이 떠나고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과 성찰, 애도를 통해 삶을 더 존중하게 된다. 죽음을 불러내고 그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기능이 미술 안 에는 숨 쉬고 있다. 애초에 미술은 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나 역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접하면서 혹은 앞으로 맞이 할 죽음을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죽음을 다룬 미술 작품을 감

상해왔다. 지난 몇 년간은 그렇게 죽음을 다룬 이미지와 함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 책은 죽음을 소재로 한 이미지에 기댄 단상으로, 1980년대에서 현재까지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 가들의 작업 속에 나타난 죽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동안 전시장에서 접한 작품들 중에서 죽음과 관련된 것들을 모아 그에 대한 단상을 적어나갔다.(기존의 내 책에서 다룬 작품은 가급적 제외했다.) 한국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것 의 형상화를 헤아려보면서 한국 현대미술에서 죽음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했다. 한국 현대미술 속에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정서, 그리고 작가들이 주목하는 죽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었다. 결국 이 책은 죽음을 다룬 미술 작품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독해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다소 고요하고 차가운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 대부분의 책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에 의해 수집하고 독해한 이미지들의 목록이 었다. 이번에는 죽음이다. 나이 쉰이 되면서 죽음에 대한 상념이 더욱 커졌다. 쉰이란 열의 다섯 배가 되는 수란 뜻인데 그렇 게 보낸 세월이 너무 아득하고 참담하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기적이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그사이에 죽은 지인들의 얼굴이 수시로 떠오른다. 나는 늘상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왔다. 삶은 삶이 아닌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을 필요로 하며 삶의 완성은 죽음임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