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5/04/06 9

이층 이발소 / 김정화

이층 이발소 / 김정화  삼색등이 빙글 돌아간다. 널브러진 판자 더미 옆에서 육지의 등대인 양 꿋꿋하다. 달동네 고갯길 모퉁이에 선 이층 이발소, 주변은 올해부터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주 명령이 떨어지자 철거촌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짓눌린 주민들은 예상보다 서둘러 짐을 꾸렸다. 몇 개의 점포들만 남아서 버티더니 지난달에는 단골 김밥집과 쌍둥이네 떡집도 시장으로 터전을 옮겨갔다.저 이발소, 유행에 뒤처지고, 미용실과의 한판 승부에 밀리고, 이제 개발의 대열에서마저 낙오될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나는 저곳을 드나든 적이 있다. 십오륙 년 전 이발사 부부의 연년생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가정집을 개조한 일층 이발소 문을 열고 이층으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계단길을 올랐다.이발사..

좋은 수필 2025.04.06

간/임영조

간임영조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다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한 입이 내는 奸과 諫 차이한 몸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입맛이 돌아야 살맛나는 세상에그 어려운 소금맛을 늬들이 알어?

좋은 시 2025.04.06

나비, 다시 읽다 / 허정진

나비, 다시 읽다 / 허정진     한 줄의 시(詩)가, 한 폭의 수채화가 거기 있다. 나풀나풀 날갯짓으로 투명한 오선지를 노래하듯이 오르내린다. 한복의 선과 색이 저렇고, 부채춤을 추느라 사뿐사뿐 버선발의 율동과 맵시가 저러할 것이다. 기류를 타는 새가 아니기에, 겅둥거리는 건들마 어깻죽지에 올라 우아하고 경쾌한 공중 발레를 펼친다. 점점이 허공을 꽃비로 수놓은 나빌레라, 분명 비행이 아니라 춤사위다. 그 몸짓에 현혹된 인간들이 아기의 ‘나비잠’이나 검불을 날리는 키를 ‘나비질’한다고 하고, 세수하고 대야의 물을 마당에 쫙 퍼지게 끼얹는 것도 ‘나비물’이라고 명명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현란한 손놀림도, 빙판 위 피겨 선수의 우아한 몸동작도 모두 나비 흉내를 내는 것이다. 육이오 전쟁의 전투 상황에서..

좋은 수필 2025.04.06

빈티지 / 길상호

빈티지 / 길상호넝쿨 장미는 찢어진 담장을 꿰매는 중민무늬 벽에는 꽃 단추도 여러 개 달아 놓았다어떤 호흡으로 걸어도 몸에 익숙한 골목낡은 사랑을  수선해 쓰는 우리는수시로 이곳에 와 어제와 오늘을 덧대곤 했다각이 풀린 주름의  계단에 앉아서로의 헐거워진 어깨에 기대 있으면가난은 또 다른 멋이 될 수  있었다빨랫줄에 걸린 달도 빛이 바래 있었지만거기서 번져오는 쿰쿰한 냄새 때문에 끝단이 닳아버린 우리의 손목은 부끄럽지 않았다그 골목에서 지울 수 없는 얼룩까지세상 하나뿐인 무늬로 바뀌곤 했다

좋은 시 2025.04.06

열리지 않는 문 / 남호순

열리지 않는 문 / 남호순​​1무너진 담장 너머 발을 들이며 헛기침으로 인기척한다공장 입구는 빚 받으러 온 사람에게 놀란 듯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마당 귀퉁이 놓고 싸움이 한창인 이끼와 잡초는한 자리씩 진급하려던 상사들의 영역처럼 넓어졌다칡넝쿨은 한 줄기 빛이라도 따라 오르려던의욕 앞선 젊은 용접공의 파란 불꽃으로 치솟아 있다​2연기의 살랑거림이 귓속말처럼 피어올라 소문으로 무성했던생산 현장은 풍문만 듣고 있다어둠에 감전되어 멍하게 있는 형광등은 거미 사슬에 돌돌 말린 기억스위치를 켜면 확, 빛의 파편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달려와 저마다 불빛을 발산할 것 같은데그들은 한쪽은 검게 멍들이고 다른 한쪽으로흐릿한 감도感度를 조절하며 일자리를 찾고 있다제 역할을 잊은 공구들 붉은 몸뚱이로 구석에 퍼질러져녹슬어 가..

좋은 시 2025.04.06

우리 동네 집들 / 박형권

우리 동네 집들 / 박형권좋은 사이들이 말을 할 때 가만히 눈매를 바라보는 것처럼손끝으로 입을 가리는 것처럼겨드랑이를 쿡 찌르고 깔깔대는 것처럼우리 동네 집들이 말을 한다파란 대문 집은 아직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서외등을 켜고군불  때는 집은 쇠죽 끓이는 소리로 오래된 말을 한다옥상에 노란 수조가 있는 집은 취직시험 볼 삼촌이 있어서옥탑방이 하얗게 말을 한다오랫동안 살을 맞댄 이웃집들은 오래된 부부처럼 닮아간다된장 맛이 같아지고 김치 맛이 같아지다가우리 담장 허물까 한다그러다가 한방 쓸까 한다돌아설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는 등으로 말을 한다뒤란으로 말을 한다 거기 목련 한 그루 심어둔다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한 집들은활짝 열린 입술로 키스할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인다 문을 열고 사람이 나..

좋은 시 2025.04.06

곶감 / 김정서

곶감 / 김정서  한 때 태가 고왔다모난 곳 없이 둥근 몸탱탱한 속살에 사치스럽지 않게 붉었었다높게 매달려 바람을 휘저을 때등불같이 환해서고독하거나 외롭지도 않았다 껍질 벗은 붉은 속살로처마 끝에 매달려단내를 풍기며 이름을 털어 낼 때어줍어줍 슬픈 건지 설운 건지차라리 편한 건지이슬 같은 눈물이 돌기도 했다 커다란 꽃받침에 업혀피고 지고 익어가던 시간들이한줄기 펄럭였던 바람임을 알 때쯤절로 베어나는 단맛에쫀득해진 이름이나쁘지 않다 그래 좋다

좋은 시 2025.04.06

장독대 / 심은섭

장독대 / 심은섭한평 남짓한 저곳은 한 여인의 성황당이며, 신전이다제단 위엔 한 자루의 촛불과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새벽마다 허공에 박아 놓은 광두정에나의 사주를 걸어 놓고 빈다생의 탄식으로 내 몸이 가물어질 때면 기우제을 지냈고,광야에서 내가 철없는 이념의 푯말로 서 있을 때찬송가를 울음으로 대신했다내 어깨 위에 까마귀가 내려앉아 짖어대거나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내 손금을 기웃거릴 때어설픈 신무神舞를 추기도 했다 폐광 속의 어둠을 닮아 내가 새벽을 잃어버린 날에도운명의 발 문수를 맡기고  얻어온 태양을내 정신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신전이 사라지고 제사장도 어디론가 사라진 지금,그 제단 위엔 그의 푸른 기억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좋은 시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