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5/04/15 5

희망과 허망 사이, 욕망 –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희망과 허망 사이, 욕망 –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진후영 2023. 5. 28. 12:52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문학동네 포에지49, 2022.6.9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P25 아내에게 들은 말이다. 공부방에서 초등학생 몇 명을 가르치는 아내에게 지인 소개로 상담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고, 자기 자녀를 맡기려는 데 교육비를 얼마나 깎아줄 수 있는지, 그 혜택을 먼저 물었다고 한다. 결국 상담은 틀어졌고, 나중에 그 지인이 그렇게 전화할 줄 몰랐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떤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혜택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요구한다고..

평론 2025.04.15

해 질 녘 풍경/강철수

해 질 녘 풍경/강철수 새파랗던 젊은 부부가 어느새 새하얀 할매, 할배가 되었다. 재를 넘고 내를 건너 여든 몇 해를 달려 이제 종점 부근인 해 질 녘에 와 있다. 젊어서는 일하랴 아이들 공부 시키랴 정신없이 돌아쳤고, 이후에는 손주놈들 재롱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바쁘고 좋을 때는 있는 둥 마는 둥 서로 무덤덤한 부부였다. 그러다 신혼 시절 버금가게 가까워진 건 해가 서산에 걸린 요즘이다.아이들이 회갑을 맞는가 하면 손주들이 시집 장가를 가기 시작하면서 노부부의 본가(本家)는 추수 끝난 휑한 들판이었다. 그 들판에 내려앉는 저녁놀,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말결도 부드러워지고 톤도 낮아졌다. ‘당신처럼 하면 우리 살림이 벌써 거덜..

좋은 수필 2025.04.15

아버지의 뒷모습 / 신달자

아버지의 뒷모습 / 신달자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손수건 한 장을 옆에 두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생긴 나의 버릇인데 이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도 어느 사이 손수건을 챙기게 된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선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나보다도 우선 아버지 자신이 감정에 헤프지 않고 절제 능력이 있으시니 나도 따라서 이유에 앞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상이 헤픈 나이지만 상대방이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면 한풀 물러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극히 우울한 마음이 되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으며 눈물부터 난다. 혈육이 무엇인데 이리 가슴이 아플 수가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며 다시 또 운다. 아버지는 올해로 86세..

좋은 수필 2025.04.15

감나무에 달린 잎새들/김규련

감나무에 달린 잎새들/김규련 무심한 나무도 조석으로 대하면 정이 묻어오는 것일까. 나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정문에 바짝 붙어 감나무 한 그루가 거목으로 서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싫든 좋든 출퇴근할 때마다 나뭇가지 밑으로 스치며 드나들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사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그러고 보니 묘하게도 애착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 어쩌다 마음이 황량할 때면 감나무 밑에 와 서성거리는 버릇이 생겼다.오늘도 괜히 감나무 밑에 와 머뭇거리고 섰다. 무성한 잎 사이로 여기저기 하늘 몇 자락이 쏟아지고 있다. 연신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하얀 감꽃 언저리엔, 아득히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가 아롱거린다. 웬일일까. 감꽃 목걸이를 드리운 소녀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옛날 어렵게 살던 무렵, 여름이면 으레 어머니는..

좋은 수필 2025.04.15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빗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 그릇에 처음으로 무늬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바늘 같은 걸로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 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데 비해 신석기의 빗살 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 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i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좋은 수필 202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