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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석종을 치고/김정화

에세이향기 2021. 6. 18. 11:56

빗방울이 석종을 치고 / 김정화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다. 한가로운 시골 마을 길모퉁이 위에 제법 편편한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돌에 빗방울 자국이 새겨진 곳, 찰나의 순간이 그대로 멈춘 영원의 세계, 일억 년 전에 만들어진 빗방울 화석지이다. 여리고 둥근 몸이 천길 벼랑으로 떨어져 내린 바닥이다. 수만 명이 다녀갔을 이곳. 자세히 보니 바위 곳곳에 콩알만 한 물방울 자국이 오목오목 파여 있다.

멈춘 빗방울이 금방이라도 탱탱하게 몸을 일으킬 것처럼 널부러졌다. 극심한 가뭄 뒤에 내렸던 빗줄기가 진흙 위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자국이다. 그 위에 퇴적물이 쌓이고 지층이 굳어지면서 마침내 빗방울 화석으로 재탄생된 것이라 한다. 중생대 백악기의 어느 하루, 지상에 내디딘 물의 발자국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빛나던 빗방울이 온몸을 바쳐 이루어낸 생의 업적이다. 흙이 물을 받들고 돌로써 거두어 빗자국을 지켜내었다.

화석이 된 빗방울은 햇살을 품고 물결을 안은 채 세월을 이겨낸다. 빗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눈동자를 담고, 바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리라, 빗방울이 새겨놓은 상형문자가 검은 반석 위에 선명하다. 억겁의 언어일까. 무량의 소리일까. 빗줄기가 쓴 육필원고라고 이름 붙여 본다.

세상에 흔적 없는 것이 있을까. 잎이 떨어진 가지 위에 엽흔이 남고, 새들이 지나간 자리에 발 도장이 찍히며, 상처 난 가슴에는 생채기가 생긴다. 강물도 물의 지문을 그리고, 모래밭에는 바람의 문양이 들썩인다. 열매도 베어 물면 잇자국이 선명하고 여름이 지나간 풀밭에 씨앗들이 영글듯이 흘러가는 것은 모두 자국을 남기는 법. 빗줄기가 오목새김되어 우흔으로 굳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붓글씨를 썼다. 스승은 체본을 쓸 때마다 뭇을 가다듬는 시간이 길었다. 붓끝으로 먹물을 몇 차례나 찍었다 놓았다 전주르며 애를 태웠는데, 첫 먹물 한 방울이 화선지 전체를 다스린다 하였다. 의기충천한 젊은 날이었으니 큰 것만 눈에 들고 작은 것은 안중에도 없을 때였다. 어설픈 실력으로 예서체 한 장을 후다닥 휘갈겨버리는 내 글씨를 두고 붓이 없고 먹이 없다고 하셨다. 필법만 익히려는 성급함을 누르고 초발심初發心을 가르쳐 주려 한 깊은 뜻을 그때는 몰랐다.

첫 번째 물방울을 경배한다. 그것이 먹물이 되든 빗방울로 흘러내리든, 허망한 운명을 예감하고도 처음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가장 용감하다. 여름 장마는 빗방울에서 시작되고, 땅의 가을은 이슬이 내리는 것으로부터 번지며, 이별도 눈물방울이 예고하지만 모두 물기가 마르면 지나가게 된다. 덧없이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이 물방울이라면, 안간 개개인 또한 언젠가 사위어들 수밖에 없는 한낱 물방울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물방울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고 했다. 한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노르웨이 신화 ‘에다’에도 천지창조는 물방울에서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물방울에서 태초의 거인과 암소가 태어나고 거인의 땀에서 또 다른 거인들이 탄생한다. 우주 전체가 물 한 방울에서 생성되었다고 하듯이, 이곳 빗방울 화석 하나하나마다 무한의 세상이 잠들어 있을 터이다. 그러기에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는 시 구절이 절절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많은 화석을 만났다. 중생대 공룡 발자국은 물론이고 낙관을 찍은 듯한 물떼새 발자국 화석도 보았으며, 바다의 잔물결 흔적이 굳어 연흔이 펴쳐진 해안은 몇 번이나 찾아갔다. 연구자들은 발자국 화석을 따라 생활 습승을 추정하고, 굳어버린 물결 모양만으로 수심과 물흐름도 밝혀내며, 빗방울 자국의 깊이만 보고도 빗줄기의 속도를 가늠한다. 훗날 현생의 인간도 화석으로 발견된다면, 후세인들은 얼마만큼이나 과거를 유추할 수 있을까. 뇌와 가슴 속을 관찰하고 생각과 속마음까지 측정해내는 것은 아닐는지.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후드득 빗줄기 쏟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거친 것을 다스리듯 빗방울이 화석 바위를 내리친다. 음각의 반원에 하나둘 물방울 고여 들고 마침내 생生과 멸滅이 만난다.

석종 소리 청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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