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다 해가 졌다 / 송연희
한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란 진정 고문이다. 묵은 추억이 남아 있는 집, 그곳에서의 기억을 떨쳐내는 일은 살점을 들어내고 목울대가 꺽꺽거리도록 상심케 하는 일이다. 사람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가 살았던 집을 처분했다. 그 안의 세간살이들은 내 손으로 덜어낼 수 없어 친척에게 부탁했다. 하나도 버릴 게 없더라는 말에 그저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의 삶은 늘 그랬다. 당신 손길이 지나가면 모든 것들이 개과천선을 했다. 하나같이 반들거리고 윤기나고 두 번 손댈 일 없이 깔끔하였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요양병원, 그곳에서 가져온 것들은 다 버려도 아까울 것 없는 것들이었다. 속옷, 손거울, 빗, 손톱깎이, 면봉, 물티슈 같은 잡다한 것.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작은 가방. 집을 나설 때면 목에 걸고 다녔고 끝까지 당신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유일한 것.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유족연금을 받던 우체국 통장과 도장, 핸드폰, 손수건, 겉장도 없는 수첩, 그리고 금은방에서 돌 반지를 넣어주는 작은 색동 지갑이 들어있었다. 수첩에는 친척들 집 주소, 보훈처, 딸, 손자, 손녀, 교회의 권사, 친구 몇 분의 이름이 다였다. 그리고 낙서처럼 써놓은 글이 있었다. 암호를 풀 듯 글자를 읽어 나갔다.
어제는 안 오길래 오늘은 오겠지 문 앞에 그림자만 얼씬해도 반갑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어디가 아픈가 하루 종일 너를 기다리다 해가 졌다.
남은 말이 더 있지만 정리하자면 딸을 기다리는 마음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눈 빠지게 기다렸던 그 시간에 딸은 어디에 있었을까. 면회가 되지 않는 상황을 핑계로 병원 1층에 먹을 거나 맡겼다. 전화로만 어떠냐 잘 지내느냐 건성으로 물었다. 밥을 못 먹겠다. 일주일째 똥을 못 눈다. 그럴 때마다 윽박지르듯 말했다. 억지로라도 먹으라고, 먹어야 산다고 언제 적 갖다 드린 건데 아직도 그게 남아 있느냐고 짜증을 냈다.
야야. 떡 같은 거 사 갖고 오지 마라. 매구 같은 간호사가 다 뺏어 갔다. 저들끼리 맛있다고 다 먹더라. 다시는 떡 사 오지 마라.
당신은 전생에 시인이었나 보다. 내 알량한 글재주가 당신에게서 왔던 걸 왜 미처 몰랐을까. 넋두리 같은 낙서에 목이 메어 그만 덮고 만다. 읽지 않는 게 나을 듯싶다. 아린 건지 시린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는 통증을 가까스로 달래고 문지르며 시간이 가길 기다리자. 지독한 흉통이 좀 가신 후에 그때 펼쳐보자.
언젠가 내가 버럭 역정을 냈던 적이 있었다. 이 말 저말 주고받다가 그만 내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내가 닭장 속의 닭 같구나. 모이 주러 오는 너만 기다린다."
그 말씀에 화를 내고 돌아와선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색동 지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본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까. 금반지가 들었을까. 아니야, 금붙이는 벌써 내게 다 주지 않았는가. 돈? 이제는 다 소용없다 하셨다. 네가 다 해다 주는데 돈 쓸 일이 뭐 있냐고 하였다.
이윽고 뭔가를 내심 기대하며 색동 지갑을 열었다. 몇 푼의 지전과 동전 몇 개. 겹겹이 미농지에 싼 게 있었다. 그것은… 내 정수리를 딱하고 친 그것은 오직 '너만'이었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너만은 아파도 안 되고, 옆을 떠나도 안 되고, 먼저 죽어도 안 되는 딸의 사진이었다. 사진을 일별한 순간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다. 그날 병실에서 들었던 소리, 엄마의 심정지를 알리는 뚜-- 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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