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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현상과 본질/강돈묵

에세이향기 2025. 7. 10. 10:18

 

 
 
 
현상과 본질
-수필문학을 중심으로-
 
 
 
 
 
강 돈 묵
몇 년간 지상에 발표되는 신작수필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처지에서 살았다. 우리나라에는 수필을 전문으로 하는 문예지만 해도 월간이 4종, 격월간이 3종, 계간이 11종에 이른다. 이 잡지만을 근거로 해서 매달 발표되는 수필작품수를 추측해 보면 어림잡아 오백여 편이 족히 될 것이다. 그 중 반의반만 읽는다 해도 대략 한달에 보아야 하는 수필작품 편수가 백 이십여 편이다. 실로 많은 숫자다. 대략 수필집 세 권의 분량이 된다.
이 작업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니 고역 중의 고역이다. 그냥 자신의 기호에 따라 선별해서 읽어도 된다면 몰라도 반드시 읽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어깨에 놓인 상태에서 느껴야 하는 부담은 실로 크다. 물론 작품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정신 놓고 읽어 내린다면야 즐거움이 되겠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개의 경우 두세 편을 내리읽기에도 벅찬 경우가 많다. 머릿속에 잡히지도 않고 정리도 되지 않는 글을 계속 읽어나가야 하도록 지워진 짐은 견뎌내기에 힘든 일이다.
이런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적 현실인식은 수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되는 작품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한국 현대수필이 처한 현실이라면 하루 속히 고쳐야 할 문제이기에 번번이 월평을 할 때마다 입에 올려보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게 나타나지 않는다. 월평을 맡아 비평의 필봉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씩 지적하는 사항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리 외쳐 봐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다.
이런 현상의 지속은 수필가들의 수필에 대한 인식의 오류일 수도 있고, 더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은 그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여기는 작가도 제법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쓴 수필이 문학성을 획득하지 못하여 생활 작문 내지 신변잡기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훌륭한 수필로 믿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자신이 수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그 자체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수필 교육의 허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생각나는 대로 ‧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고 가르친 결과이다. 분명 ‘생각나는 대로’는 수필 내용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이고, ‘붓 가는 대로’는 형식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인데, 이 점을 학생들에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실책이다. 그러다 보니, 수필은 자연히 여기(餘技)의 문학으로 전락하고, 아무렇게나 끼적거리면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생활 작문, 설명문, 기행문, 일기, 편지글, 칼럼 등과 수필이 어떻게 다른지조차 모르는 처지에서 수필이 양산되다 보니, 수필의 진수를 내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의미 전달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은 작가의 자기 고백, 자기 드러내기이다. 그래서 수필은 작가와 독자가 이마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진지하게 고백하는 형식을 취한다. 마치 친구나 이웃에게 자신의 신변이나 신체적 특징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과 흡사하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기에 그 내용마저도 작가에게서 이탈하지 않는다.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취한다.
그래서 수필은 태생적으로 독자의 신뢰를 얻고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허물은 물론이고 자랑거리까지 들고 나오니, 아예 소설가처럼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이 독자에게는 약속이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는 수필가는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작가의 행동에 멍에가 되기도 한다. 글을 쓸 때마다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나기에 주춤하게 만드는 것이다.
수필은 작가의 체험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는 문학이다. 작가는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자신의 삶 속을 금이라도 캐듯이 샅샅이 뒤진다. 찾아낸 소재를 독자에게 내보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찾아낸 소재가 나름대로는 신선하다고 생각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별거 아니란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설복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즉, 문학적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체험 속에서 선택된 소재가 사유와 상상을 거쳐야만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상상은 작가의 체험과 삶이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수필은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얻게 된다.
생활 체험 속에서 사냥해낸 소재는 반드시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하여 해석해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고백의 문학’, ‘개성의 문학’, ‘작가의 심적 나상’이라는 수필의 특성에 충실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신적 작용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지루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해 놓고 수필을 썼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체험 속에서 사냥해낸 소재는 반드시 주제의 통솔 하에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재구성할 때에 상상의 힘과 지적 구성력을 빌려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필이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여 상상마저 붙잡아맬 일은 아니다. 글의 분위기와 주제에 맞추어 충분히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수필을 썼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비전환적 표현이라 해도 작가가 선택한 소재들을 설정된 주제에 맞추어 끊고 붙이고 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이란 것은 개별적이고 우발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작가는 선택한 제재를 자신의 삶을 토대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석한 결과로 주제를 만들어 이것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그에 따라 제재를 재구성하여 집필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과정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집필에 들어가면 글이 주제가 없는 생명력조차 상실한 것이 되고 만다. 집필 전에 해석에 이어 주제가 만들어져야만 첫 문장부터 주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흔히 수필에는 예시 단락과 일반화 단락이 있다고 한다. 예시 단락에서는 제재를 소개하고, 일반화 단락에서는 그 제재가 내포하고 있는 특질을 찾아 의미화, 주제화, 일반화, 형상화를 하게 된다. 예시 단락에서 활용되는 것이 작가의 삶의 모습이다. 수필이 이 단락으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멈추게 되면 글은 신변잡기에 머물게 된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날 수필의 문제점은 바로 예시 단락만을 써 놓고 수필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반드시 소재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태져야 수필로서 온전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나 의미부여가 이루어져야 작품의 제재가 되는 것이다. 의미부여 이전의 것은 단순한 소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미부여가 되지 않는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수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체험에 대한 의미부여는 체험자체의 성격보다 작가의 체험 수용자세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용자세는 작가의 삶이 크게 좌우하게 되며, 작가만의 인생관, 세계관, 문학관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해내는 작업을 등한시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것은 바로 현상을 그대로 적는 것이 문학이라고 오판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문학은 현상을 적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본질을 적는 것이다.
그러면 현상과 본질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현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현상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또 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현상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눈을 감고 취침에 들기 전까지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물상들의 모습이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도 현상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삶이 들어가 어떠한 해석을 내리기 이전의 모습이 바로 현상인 것이다. 이 현상은 의미부여가 되기 이전이라서 단순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작가라면 이 현상을 가지고 집필에 들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그 사물이나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거치게 한다. 한편의 수필을 쓸 때에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상상을 통해 미적구조로 재구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재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서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고, 수기이거나 생활 작문이다.
분명 수필은 작가의 일상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수필은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을 찾아서 미적 관조를 통해 본질을 들려줌으로써 감동을 주는 문학이다. 황필호가 이 일상에 대하여 말하는 자리에서 ‘모든 수필은 상식과 관습으로부터 출발하고,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고 지적한 것은, 수필이 상식으로 상식을 극복하고, 관습을 통해 관습의 근거를 파악하고, 일상 언어를 통해 일상성 이상을 탐구하는 것이 수필의 특징임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수필은 작가의 신변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자기도취, 자기연민의 영토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문학성과 예술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작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보다 더 충실한 고민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본질이다. 사물이나 사건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낼 때에 비로소 수필은 출발한다. 물론 다른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소재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형상화를 시도할 때 수필은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작가의 삶 속에서 취택한 소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해석해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가치명제로서의 수필은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필의 정체는 작가가 취택한 소재가 지닌 본질적이고 내적인 의미를 밝혀내는 의미화 작업이라고 하겠다. 의미화는 다른 사람이 기웃거리거나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색다른 과정을 거쳐야 효과적이다


본질을 찾아 적은 윤석희의 “자전거타기”를 살펴보자. 기행수필의 영역을 넓혀 놓은 윤석희의 수필은 우리에게 새로운 맛을 제공해 준다. 흔히 기행수필이 빠지기 쉬운 여정의 소개도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작가에게 있어서 여행은 일상이고 삶 그 자체이다. 그 일상이 분바름이 없이 생 얼굴로 독자 앞에 나선다. 이러한 창작태도는 윤석희에 있어서는 개성으로 존립한다.
 
만만찮은 무게로 앞에서 운전하는 사람에게 짐이 되었다. 짐은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또한 운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잡고 있었다. 운전하기 편하도록 느슨하게 잡으라 하지 않았는가. 그가 활개 치며 갈 수 있도록 해주지 못한 것이다. 나 때문에 속력도 줄이고 넘어지고 했다. 그를 위축시키고 자유로운 행동을 막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의 삶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농촌에서 사는 것으로 남편을 크게 돕고 있다고 내세웠지만 실은 의존만 하고 있다. 의지하면서 나약하게 살았다. 그를 잡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남편의 삶에 덤으로 얹혀살고 있다. 부는 바람은 그가 정면에 맞고 그의 등 뒤에서 피하고 있다. 모든 결정도 책임도 떠맡기고 주어진 일만 하면서 편하게 산 것이다. 가계부 한번 적어본 적이 없다. 그저 시장 볼 돈 한두 푼만 주머니에 있으면 걱정 없이 살았다. 고지서 한 장 챙기는 것까지 남편 몫이었다. 그가 섬세하고 치밀할 것도 아니다. 매사에 덤벙거리며 셈도 어두운 사람이다. 그런데도 생활의 모든 역할을 도맡아 왔다. 크게 바라지 않고 욕심 내지 않는 것만으로 그를 편하게 해 준다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현실감이 전혀 없고 수동적인 자세로 따라 가고 있으니 끌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대출금 통장뿐인 세상을 꾸려가기가 혼자서 벅차지 않았겠는가.
삶의 여로는 스스로 조종해야 함을 문득 절감한다.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짐을 남편에게 얹고 살아온 것이 안쓰럽다. 짐을 부리고 난 안락함 속에 찬바람이 스며든다. 주체가 내가 아닌 삶 속에서 느끼는 고독함이다.
이제라도 자전거를 배워야겠다. 자전거 두 대를 샀다. 얼굴이 깨지고 몸을 다치더라도 용기를 낼 것이다. -윤석희의 <자전거 타기>에서
 
인도에서 여행 중에 모든 일행이 자전거로 이동하는데, 작가만이 탈 줄을 모른다. 남편의 자전거 뒤에 얹혀서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남편에게 의지하여 제 혼자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부끄럽다. 그래서 자전거를 배우겠다는 글이다.
여기서 보면 ‘자전거 타기’라는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작가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매개체로 활용한다. 아주 자그마한 사건이고 소재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다 빗대서 표현했다. 남편의 뒤에 붙어서 이동하는 장면을 기술한 것은 그래서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작가의 부부생활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짧은 글에다 다 얹어 놓았다. 즉, 남편의 자전거 뒤에 얹혀서 이동하기는 ‘홀로서기를 못하고 의지함’이다. 이것의 본질이 형상화된 것이 남편에게 의지하고만 산 자신의 지난 세월인 것이다.
수필은 일상성 속에 묻혀 있는 삶의 진실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미학적으로 재구조화하고 나아가서 문학 언어로 형상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는 문학 장르라고 했다.


이은희의 “검댕이”를 보자. 수필의 창작 동기는 여러 유형이 있겠으나 대상과 인간세계를 접목시켜 형상화하는 것도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소재가 갖는 의미를 발굴하고, 그것을 인간세계에 접목시켜 해석해 내는 능력이 없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소재라 해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야기와 멀리 존재하면 별다른 가치가 없다.


그렇다. 검댕이의 자유를 향한 무모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1.5센티미터의 구멍에 온 몸을 던졌을 것을 상상하니, 전기충격을 받은 듯 온몸이 짜릿해 왔다. 그랬다. 나의 삶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인생살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줄 알았다. 비껴보고, 누워볼 수 있는 삶을 몰랐던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가벼운 것을 즐기며, 내면의 깊이를 모르는 지금까지의 삶이 아니었던가. 그래 지극히 사소한 것, 가끔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아주 작은 감성을 도외시했다. 철망에 긁혀 생채기투성이가 될 정도의 적극적인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보였다.
식구들이 집을 비운 오후. 녀석이 왕성한 혈기로 사방을 활개 치며 돌아다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서서히 베란다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재로 돌아와서도 진정되지 않는 마음은 온통 그 녀석에게 가 있다. 이윽고 ‘툭’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드디어 자유를 찾았구나.’ 작은 탄성이 일었다. 먼발치에서 둘러보니 역시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녀석이 기어가는 속도를 계산하며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힘이 빠져 왔다. 두 어깨가 축 처졌다. 검댕이가 없는 쓸쓸한 보금자리. 검댕이의 탈출은 가족들에겐 언제까지나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이은희의 <검댕이>에서
 
네모난 석쇠의 맞모금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사슴벌레 이야기다. 갇힌 울타리에서 거듭 탈출을 시도하는 사슴벌레를 바라보면서 일상의 삶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여기서 사슴벌레가 석쇠를 빠져 나오는 것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나 갇힘, 탈출, 자유 등의 해석을 거쳐 자유를 허락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합리화시키고 있다. 결국 이 수필에서 탈출을 하는 사슴벌레는 현실의 역경을 끝없이 개척해 나가고 있는 작가 자신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검댕이에게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창문 밖으로 옮겨주질 않는다. 제 힘으로 스스로 탈출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체험에 대한 의미부여는 체험자체의 성격보다 작가의 체험 수용자세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용자세는 작가의 삶이 크게 좌우하게 되며, 작가만의 인생관, 세계관, 문학관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해내는 작업을 등한시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것은 바로 현상을 그대로 적는 것이 문학이라고 오판하는 행위에서 온다. 문학은 반드시 현상을 적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적는 것이다.


김사랑의 “두물머리”도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세상의 모든 물상은 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어우러져 관계하며 존재한다. 이것은 물상뿐만이 아니라 사건마저도 그렇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도 가지고 있는 존재 의미가 있고, 흐르는 물도 반드시 거기에는 원인이 달려 있다. 하찮은 물상이라도 다 서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자연 속에서 소재를 선택할 때는 그런 안목이 없이는 불가하다.
 
부르튼 발을 끌고 수종사에 오르니, 눈앞에서 한강 물이 굽이친다. 저 도도히 흐르는 두 줄기 강물이 함께 만나 어우러지는 곳. 두물머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거대한 강을 이루는 합수지점. 한강 물이 저리도 장대하게 보인 적이 있었던가. 지나다 옆에서 본 한강 물은 언제나 그렇고 그랬다. 한번은 장마 끝에 찾아오니 벌건 물이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돌려세웠는데, 오늘은 다르게 장대한 모습으로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물은 장대한 모습으로 경계의 다툼도 없이 쉽게 융화하고 있다. 그 장대함은 오르막길에서 지친 나의 가쁜 숨을 이내 삼켜버린다. 바다 같은 저 넓은 물결. 서로 탓하지 않고 쉽게 어우러지는 저 물결의 가슴.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원한 전경은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저 물길처럼 품어주고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나무란다. 그래, 모두가 다 저렇게 안아 들이며 사는 거야. 그늘 한점 없는 땡볕에 서서 아주 오랫동안 두물머리의 속삭임에 귀를 열어놓는다.
사찰 내의 삼정헌, 다도실 앞에 서 있다. 차를 한잔하고 싶은 충동에 이곳까지 왔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멈추었다. 차 맛이 간절했지만 푯말이 내 발을 닦아세운다.
-김사랑의 <두물머리>에서
 
수필은 이미 있었던 체험들을 새롭게 배열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다. 그 배열과 정리는 세상의 모든 물상이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음으로 그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한편의 짧은 수필로도 우주세계의 질서를 읽을 수 있다.
수종사에 어렵게 올라 북한강의 물과 남한강의 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사람의 삶이 어찌 순탄만 하겠는가. 우여곡절의 삶은 수종사에 오르는 고통으로 대변한다. 그 고통 끝에 당도한 수종사. 그곳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는 커다란 우주의 질서이다. 물줄기가 서로 다툼이 없이 수월하게 상대를 받아들이고, 한 몸이 된다. 속 좁은 인간들만이 약삭빠른 셈으로 고통에 싸인다.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되는 자연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두물머리. 두 줄기 물이 함께 합류하는 것은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골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호응하고, 어부의 뱃노래소리와 갈매기가 화음을 맞추는 조화는 작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세계이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커다란 깨달음이 있었기에 작가는 물과 같은 인간이기를 희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졸고 “옥수숫대”를 한번 살펴보자. 작가는 선택한 제재를 매체로 하여 자연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그러면서 상상을 통해 과거의 체험을 일구어내기도 한다. 그것은 소재와 인간과 우주가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존재한다는 공존의 사고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기초 인식 위에서 상상적 체험을 반복하다보면 아주 색다른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밭두둑에서 주위 풀들의 시기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자라 씨앗을 남기고 말라버린 옥수숫대를 바라본다. 동부 덩굴이 기어올라도 어깨를 내어주고 며느리밑씻개가 까칠한 손으로 타고 올라도 싫은 내색 없이 그 인고의 세월을 산 옥수수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성치 못한 몸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낸 아버지의 교훈을 만난다. 말라버린 옥수숫대에 걸쳐 있는 이파리를 보면서 아버지의 수의를 생각한다. 깡마른 몸에 둘러쳐졌던 아버지의 수의. 이생에서 난 상처를 모두 감싸주던 수의. 아버지는 그 수의 하나만 걸치고 떠나셨다. 자식들을 위해 모두 벗어놓고 가셨다.
싸한 바람이 분다. 이 바람이 코끝을 떠나면 나는 다시 옥수수 씨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가뭄과 홍수를 이겨내며 여린 작물들의 바람막이 노릇을 하는 옥수수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할 것이다. 내 안에 없는 듯이 있는 아버지를 추억할 것이다. -졸고 <옥수숫대>에서
 
언덕배기에 서 있는 말라버린 옥수숫대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홀로 서서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옥수숫대는 수의를 걸쳤던 아버지다. 깡마른 옥수숫대, 줄기를 넝쿨식물에 감기면서 고난의 삶을 살다간 옥수수에서 자식들 건사하고 늘 희생만 하고 떠나신 아버지를 회상한다. 이 글은 밭둑에 홀로 말라버린 옥수숫대의 안쓰러움, 측은함, 희생 등의 관계어를 끄집어내어 결국은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수필은 선택된 제재가 갖는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서 독자에게 말할 주제를 형상화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수필의 창작은 우선 무엇을 쓸까 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그것을 충족시킬 소재를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거꾸로 제재에서 얻은 인상을 바탕으로 무슨 주제를 만들까 하는 역순도 가능하다. 어떤 절차에 따라 창작하든 주제를 선정하고 미적구조를 이용해서 사물의 속성을 살펴 인간의 속성을 유추해 내는 과정은 거쳐야 한다. 그래야 형상화가 이루어진다.
수필은 반드시 사물이나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한편의 수필을 쓸 때에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상상을 통해 미적구조로 재구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재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서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고, 수기이거나 생활 작문에 멈추게 된다.
수필은 작가의 삶이 그대로 표현되는 문학 장르이다. 그것은 상상을 통해 재구조화해야 더 큰 의미를 함유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현상을 적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작가의 삶과 소재가 부딪쳐 새로운 의미를 찾아 형상화하여 표현해야만 수필은 생명력을 얻는다. 사물이나 사건, 즉 만물이 존재하는 이 세계의 본질을 찾아 독자에게 제시하여야 하는 문학이 수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