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해석과 문학적 형상화
강 돈 묵
수필은 작가의 체험 속에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소재를 선택하고, 그것의 본질을 찾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장르이다. 어느 장르보다 작가의 삶이 작품의 밑바탕이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찾아낸 소재를 독자들에게 내보이기에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삶 그대로를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삶 그대로를 송두리째 내놓았다가는 어설픈 작가로 낙인 되고 만다. 문학은 있는 현상을 적는 것이 아니고 본질을 적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물상들은 현상이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건들도 현상이다. 아무리 수필이 비전환적 표현이라 해도 이 현상만을 기록하고 말면 글은 수필이 될 수 없다. 현상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해석해내어 형상화시키는 작가의 노력이 얹어져야 수필로서 온전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본질을 찾기 이전의 현상은 단순한 소재일 뿐이다. 문학적 소재로 바꾸는 작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의미부여가 되지 않는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수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어설픈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소재가 나름대로는 신선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별거 아니란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설복되어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잊는 경우도 있다. 분명 수필은 작가의 일상을 소재로 하여 창조한다. 그러나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을 찾아서 미적 관조를 통해 본질을 들려줌으로써 감동은 가능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수필이 작가의 신변사에서 멈추고, 늘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자기도취, 자기연민의 영토를 고집하는 경우가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소재에서 찾아낸 본질은 형상화과정을 거쳐야 한 편의 수필이 완성된다. 사물이나 사건들이 함유하고 있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형상화라 한다. 그러나 형상화가 갖는 의미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개념만을 한정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구체적 사물이나 사건이라도 감각적으로 강화시켜 겉으로 드러낼 때에는 형상화라 한다. 이 형상화는 해석의 결과물이 구체적 형체를 갖추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상화가 올바로 되었을 때 수필은 성공할 수 있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작가는 선택한 소재를 자신의 삶을 토대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했다. 해석한 결과로 주제를 만들어 이것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이제는 강구하고, 그에 따라 소재를 재구성하여 집필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과정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집필에 들어가면 글이 주제가 없고 전달이 불가해서 생명력조차 상실하고 만다. 집필 전에 해석에 이어 주제가 만들어져야만 첫 문장부터 주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또 작가의 체험 속에서 선택한 소재는 반드시 주제의 통솔 하에 재구성되어야 한다. 재구성할 때에는 상상의 힘과 지적 구성력을 빌려와야 한다. 수필이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여 상상마저 붙잡아맬 일은 아니다. 상상은 작가의 체험과 삶이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의 일환이다. 수필은 글의 분위기와 주제에 맞추어 충분히 재구성해야 성공한다. 자신의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수필을 썼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허구를 부정한다 해도 작가는 선택한 소재들을 설정된 주제에 맞추어 도려내고 붙이고 순서를 바꾸는 작업, 즉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들이란 개별적이고 우발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도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구성이 요구된다.
아무리 참신한 해석을 하고, 재구성을 하였다고 해도 형상화가 어설프면 수필은 성공할 수 없다. 소재에 대한 신선한 해석이 이루어졌는데 형상화가 이에 따라주지 못하면 글은 관념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신선한 해석에 딱 맞는 형상화가 이루어지면 독자가 느끼는 감동은 훨씬 크게 된다.
김이경의 <나의 블랙홀>
김이경이 독자 앞에 들고 나온 소재는 너무도 평범한 것이다. 주부라면 한번쯤 경험했을 법한 음식물의 보관 이야기다. 부패되지 않고 보관할 수 있다는 편리로 마구 넣다보니, 쓰레기 창고가 되더라는 지적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김이경은 그 상태의 묘사에 작가적 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독자들에게 내놓을 메시지를 찾아낸다. 그것은 작가의 사물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없이는 불가한 세계이다.
냉동실 묘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독자는 별다른 느낌이 없다.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뒤를 이어 나오는 ‘끝없이 꺼내다 봉지 하나가 발등에 떨어졌다. 얼른 피했기 망정이지 자칫 사고가 날 뻔했다. 언제 넣어뒀는지도 모르는 사골국은 돌덩이였다.’에서는 생각이 달라진다. 이 글에서 앞으로 전개될 방향을 암시해 주는 계산된 기술이다. 별생각 없이 취했던 행동이 훗날 피해를 초래할 수 있음을 제시해 놓고 이야기의 화두를 꺼내는 것이다.
냉동실의 묘사에서 자연스레 열거하게 되는 음식물의 제시는 질서를 가지고 독자 앞에 나선다. 가루 식자재, 양념 식자재, 장기보관 식자재, 그리고는 먹다 남은 식자재에 이르러 쓰레기통으로 연결시킨다. 여기쯤 오면 냉동실의 상태를 쉽게 그릴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시각에 의존한 묘사를 전개한다. 냉장고 안의 상태를 일별하려니 자연적인 현상이겠지만, 어쩌면 이 글에서는 비로소 발견하는 상황이라 다른 감각기관은 활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각에 의한 글의 전개는 전에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일상이기에 적절하게 효과를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냉장실과 채소 칸을 뒤적인다. 여기도 만만치 않은 상태이다. 그 결과 얻은 것은 ‘웬만한 이삿짐’이라는 것이다. 그래 버릴 것은 버리고 둘 것은 정리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게으른 삶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돈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송이와 더덕이 물러 있고, 굴비는 성에를 뒤집어쓰고 있다. 작가는 이쯤에서 소재의 소개를 마무리한다. 이제는 이런 현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래야 작가가 독자에게 던질 메시지를 구할 수 있다.
문만 열면 한여름도 서늘해지던 냉기와 첫 만남. 그것은 상할 것 같은 반찬 몇 가지 앞에서 수줍은 유혹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마구잡이로 채워 넣은 것들은 욕심이었고 절약으로 포장된 낭비일 뿐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서툰 삶이었다. 그러다가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받아 삼키는 블랙홀. 그 곳이 삶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었던가.
문득 난 하루하루를 이렇게 냉장고에 밀어 넣듯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비를 내던져놓고 꽁치 도막이나 졸였던 나는 지금도 양파나 오이를 챙기느라 자연산 송이와 더덕이 물러지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리되지 못한 채 조금씩 밀려들어간 시간들이 곰팡이가 피는지 성에가 끼는지 모르는 채 잊은 것은 아닌지. 햇볕이 그리운 기억들을 얼음 속에 가두어놓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뒤섞어버린 시간과 기억들이 어느 순간 돌덩이가 되어 발등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나설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삶과 철학을 가지고 나선다. 그래야 자신만의 차별화된 글을 쓸 수 있다. 작가 김이경은 냉장고를 정리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읽어 내리고 있다. 욕망에 찬 서툰 삶, 절약으로 포장된 낭비, 교각살우(矯角殺牛)하듯 작은 것을 도모하다 큰 것을 상실하는 어리석은 일상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종내에는 작가가 독자에게 제시할 메시지를 들고 나선다. ‘정리되지 못한 채 조금씩 밀려들어간 시간들이 곰팡이가 피는지 성에가 끼는지 모르는 채 잊은 것은 아닌지. 햇볕이 그리운 기억들을 얼음 속에 가두어놓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뒤섞어버린 시간과 기억들이 어느 순간 돌덩이가 되어 발등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소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서 그것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쓴이가 본 현상을 그대로 줄글로 적어놓은 것은 문학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순한 현상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 찾기는 취택한 소재를 처음 대하는 듯이 바라보는 ‘낯설게 하기’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 글은 일상에서 접하기 쉬운 소재에 작가의 예리한 시각이 동원되어 본질을 읽어내었기에 성공하고 있다. 바라본 현상을 적고 말면 독자는 식상해 버리지만, 이 글에서와 같이 참신한 해석을 거쳐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면 진지함 속에 자신을 남겨두지 않을 수가 없다.
송복련의 <가위>
짧으면서도 상큼한 글이다.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무심히 하는 가위질에서도 의미를 찾아나서는 작가만의 길이 있다. 비록 하찮은 가위질이지만 작가 송복련을 통하여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결과는 작가의 ‘낯설게 하기’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세계이다.
작가는 신문을 갈무리하기 위해 가위질을 하게 된다. 오랜만에 듣는 가위소리에 지난 과거가 되살아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이다.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우리의 삶이다.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위소리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가족들의 옷가지를 지으시던 어머니의 사랑이 있고, 그 속에서 화목했던 가족의 모습도 생생하다. 긴 머리도 손수 잘라 주시던 어머니의 가위소리가 써억썩 되살아난다. 자식들을 다 씻기시고 손톱발톱을 깨끗이 잘라 주시던 자상하신 아버지의 모습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 즐겁고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무에 좋은 일만 계속되었겠는가. 어머니가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깎아 주실 때에 느껴야 했던 무거운 촉감을 기억한다. 상큼한 소리에는 무거운 지루함이 함께 했던 것이다.
가위에 얽힌 추억은 많다. 색종이 오리기, 종이인형 오리기, 문화면의 기억해 둘만한 기사 오리기 등 다양하다. 여기까지가 소재를 이끌어낸 배경이다. 이제 제대로 주제에 접근해야 한다. 가위로 오려내면, 선택되는 부분과 버려지는 부분으로 갈라지게 된다. 버려지는 부분이 더 클 수도 있고 자투리일 경우도 있다. 가위는 이렇게 예리하고 직설적으로 갈라놓는다. 차가울 정도로 명쾌하고 단호하다. 작가는 같이 붙어 있다가 확연히 다른 두 세계로 갈라서는 두 운명에 착안한다. 선택되는 안과 버려지는 밖의 현저한 차이를 들고 나온다. 쓸모와 쓸모없음의 차이는 그대로 안과 밖이다. 그동안 이 둘의 기구한 명암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비로소 작가는 ‘낯설게 하기’에 의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모든 삶으로 전이되어 간다.
여기서 작가는 이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밖이라서 버려져야 했던 운명도 이제는 지켜본다. 친구도 가려가며 사귀고, 오감은 늘 바른 길을 고집하며 안쪽과 함께하면서 바깥을 소외시켰던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가위질 하지 말라’고. 세상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쓸모를 잃고 직장에서 명퇴를 강요당하는 분위기처럼 느껴진다. 가위 앞에서 삭제될 운명에 놓여있는 우리들의 고단한 삶을 반영했다. 그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들을 돌아보며 인생의 쓴맛을 본 자들을 생각했다. 섣불리 가위를 들었다가 잘려나간 다시 품지 못하는 것들. 함부로 가위질한 오려낸 바깥은 주변을 서성이다 수없이 삭제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쓸모만으로 모든 선택의 기준을 삼는다면 너무 심심하고 삭막하리라. 식상할 정도로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맞는다면 살맛을 잃어버릴 같아 잘려나간 바깥을 돌아본다. 내게 중요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잘려나간 것들은 저마다 같지 않은 취향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먹고 사는 일처럼 중요한 게 없고 반듯한 길을 모두가 바라지만 한 가지만 고집한다면 답답하지 않을까. 둘 다 품어서 어우렁더우렁 지내는 데서 사람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오히려 예술의 세계는 시선의 바깥쪽에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가위로 잘라질 때 안과 밖은 닮은꼴의 테두리를 나누어 가진다. 덜어낸 만큼 텅 빈 고요가 깃드는 밖은 언제 뒤바뀔지 누가 아는가.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며 가위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 글에서는 소용되는 부분으로 대접을 받는 존재와 불용으로 버려지는 존재를 ‘안’과 ‘밖’으로 대치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나름 독자들에게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글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질 않고 세태로 옮겨서 오늘날 빚어지고 있는 퇴출당하는 직장인, 밖으로 밀려난 자, 인생 쓴맛을 본 자들과 연결되고 있다. 또 소용과 불용의 의미도 짚어본다. 내게 중요한 것이 남에게는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가름의 척도에는 판단하는 사람의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람 냄새 나는 삶에 대한 동경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제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당하는 쪽의 입장에서 사유는 시작되고 있다. 어떤 입장에서 판단하든 판단 당하는 쪽의 이야기다. 하지만 ‘가위’는 자르는 쪽의 역할을 담당한 물체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은 합당하지가 않다. ‘가위’라는 제목과 ‘가위질을 하면서’는 글의 방향이 확연히 다르다. 제목의 역할은 독자를 글 앞에 잡아두는 일을 하면서도 앞으로 전개될 글에 대한 방향성과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이양주의 <석굴암 고해성사>
이 글은 저녁 무렵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듯한 심정에 빠져 먼 이국의 하늘 아래 서 있다.’로 시작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국’은 작가의 현재의 처지를 고백한 것이다. 작가는 분명 불교신자인데 성당에 들어가서 접신의 의미를 되새기며, 고해성사에 대해 깊이 빠져 있다.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소리가 성당 구석구석을 메우고, 마침내는 작가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울린다. 보랏빛이 감도는 공간을 헤집고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는 분명 천상을 향해 기도드리는 접신의 동작일 것이라 추측한다. 소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작가는 그 안에서 저녁 빛이 스러지는 것도 보고,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져 있던 성화(聖畵)가 부드럽게 지워지는 것도 목격한다. 또 많은 성물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며 다가옴도 느낀다. 벽 쪽에 세워진 고해소에는 세월의 손때가 많이 묻어난다. 고해소를 접하는 순간 작가가 가지고 있던 고해소에 대한 생각이 허리를 펴며 일어선다. 모두가 생소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작은 의자에 내 몸을 앉힌다. 고백하는 자의 말과 들어주는 자가 공존하는 방. 사방이 막힌 공간이 너무나 좁다. 가슴이 콱 막힌다. 들어주는 자의 자리가 이렇게 좁고 어두운 줄 몰랐다. 그냥 여유 있게 들어주는 줄 알았다. 인간의 언어를 걸러 하늘로 연결하는 통로는 밝고 넓은 줄 알았다.
자신의 어둠을 털어내려는 자에게 어둠을 걷어내어 주려는 자도 함께 어둠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고통의 탄식을 쏟아 놓을 때 하나 된 마음으로 아파해야 한다는 뜻인가. 예수가 인간의 고통과 짐을 함께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기꺼이 내려오지 않듯이, 신의 심부름꾼으로서 고행을 하라는 뜻일까.
고백은 말하는 자만이 주인공인 줄 알았다. 듣는 자의 심중이 어떠한 것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고백의 자세를 생각해본다. 자신의 중압감에서만 벗어나면 된다고 하는 이기적인 고백이라면 멈추어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진실하고 간절해야 한다고.
고해소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는 죄인의 자리이니 좁아도 당연하다 여겼고, 들어주는 자는 인간의 언어를 걸러 하늘로 연결하는 역을 하니 전혀 다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를 하늘로 연결하는 통로는 밝고 넓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좁은 공간이라 답답하다. 여기서 작가는 고백하는 자와 들어주는 자가 같은 처지가 되어 함께 자리해야 함은 일찍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기꺼이 내려오지 않음과 상통한다고 읽어낸다. 그가 신의 심부름꾼이었듯이 고백을 들어주는 사제도 같은 처지라는 것이다. 고해소 안에서의 주인공은 고백하는 자만이 아니고 들어주는 자도 주인공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말하는 자나 들어주는 자 모두 진실하고 간절해야 된다고 인식한다.
작가가 이국 땅 성당 안에서 인식한 고해의 의미는 자신이 석굴암에서 겪었던 과거와 만나면서 하나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전국 교사불자회 수련회에서 시조창을 가르치기 위해 석굴암에 초청되어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사설시조 ‘팔만대장~’을 부르며 소리 공양을 올리게 된다. ‘팔만대장 부처님께 비나이다. 나와 임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하며 소리를 이어가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솟구친다.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한 임이 둘이라 고백한 작가는 어머니와 자신의 안에 있는 ‘참나(眞我)’를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염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눈물이 복받쳐서 창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이미 세상 풍파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휩쓸리면서 순수하고 지혜롭던 처음의 ‘참나’가 아니었기에 온갖 슬픔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같이 한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소리를 멈추지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지고 무언가 모르는 기운이 심연 깊숙이 닿는 느낌이고, 원죄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가 모두 사해 받은 느낌을 받는다.
석굴암 대불은 아무 말 없었는데 용서와 위로를 전해 받은 느낌이 들었다. 가벼워지고 편안해진 느낌과 함께 평화가 내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나는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 것 같았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듯 여운에서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니 선생님들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 몫까지 대신 울어 준 게 아닌지. 나와 선생님들의 슬픔의 근원과 마음속의 기원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선생님들이 다가와, 살면서 이런 느낌 처음이라고, 고맙다며 내 손을 잡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가 진정으로 해 보았던 고해성사가 아닌가 싶다. 기도란 구함이나 물음보다 참회가 우선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참회야말로 깨달음이란 생각이 든다.
이 글에서는 전혀 다른 두 종교의 처지를 한 자리에 앉혀 놓음으로써 극적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진정한 기도는 참회에서 온다고 하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제시하기 위해 작가는 시공을 초월한 그리고 이국에서 느낀 감정을 끌어다 하나의 구조 속에 놓음으로써 효과를 보고 있다. 이는 현상에서의 구조를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여 제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인 것이다. 수필은 이와 같이 작가의 상상의 힘과 지적 구성력을 동원하여 완성을 도모할 때에 소기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는 문학이다.
이번에는 소재의 해석과 그 결과 얻어진 본질의 형상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삶의 한 부분이 문학적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가의 사유와 상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소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 드러나고, 깊은 의미를 갖는 글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또 선택되어 해석이 가해진 소재들은 재구성의 단계를 거쳐야 온전히 독자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수필은 독자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게 된다. 수필가들의 치열한 작가정신과 부단한 노력은 우리 수필문단을 살찌우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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