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황진숙
밭에 섰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밭들. 다랑이 밭 같다. 산기슭 제법 깊숙이 위치한 밭이지만 어김없이 봄은 여기에도 찾아오고 있다. 굳었던 땅들은 부드러워지면서 숨구멍을 연다. 숨구멍 사이를 스치는 흙 내음이 진하다. 그 내음에 대지의 감각들은 자리를 털며 기지개를 켠다. 밭고랑에서 움튼 풀씨들의 얼굴이 해맑다. 척박했던 땅 속에서 시린 계절을 보내고 수런수런 올라온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봄바람이 휘감아 전해준 청명함에 묵묵했던 밭도 한결 온화해진다. 밭의 품이 넉넉함으로 푸근하다. 그 모습이 아버지의 품과 같이 따사롭다.
모아 놓은 고춧대 옆으로 희멀건 돌멩이 하나가 보인다. 나직이 소리가 난다. 소리를 따라 밭둑을 걷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저만치 모로 움푹 팬 발자국 하나가 있다. 투박한 밑창 무늬의 발자국은 왼쪽으로 치우쳐 깊이 박혀 있다. 아버지의 발자국이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다리 골절상을 입으셨다. 두 번의 수술을 하였지만 잘 아물지 않은 탓에 절름발이가 되었다. 오른쪽에 힘을 싣지 못하는 까닭에, 왼쪽 다리에 힘이 더 가해져 발자국은 왼쪽으로 더 깊이 나 있다. 그 발자국은 늘 밭고랑을 향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장남을 화장시킨 다음날도. 지독하다고 소리치는 딸년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아버지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을 뿐이다. 육남매의 장남으로서, 한 여인의 지아비로서, 사남매의 아비로서 늘 무겁기만 한 봇짐을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 그 무게만큼 깊이 새겨졌던 발자국. 일흔이 넘어 지친 육신에 짐 하나가 더 생긴 아버지. 온전한 발자국 하나 만들지 못하는 아버지의 삶이 애잔하다.
지난날 산 숲정이를 하나의 밭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날을 들녘에서 보냈다. 새벽부터 어스름 짙어질 무렵까지 아버지의 발자국은 밭둑을 맴돌았다. 끼니때면 동네 점방에서 사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게 전부였다. 해가 산자락을 넘을 무렵이면 취기가 오른 아버지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곤 하셨다. 노래 한 곡조에 삶의 고단함을 풀어낸 것이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어둠이 잠겨들면 아버지의 경운기 소리는 탈탈거리며 고샅을 돌았다. 허청대는 경운기와 한 몸이 된 퀭한 눈의 아버지.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아버지의 굽은 등을 비춰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심을 씨앗들이 잘 자라길 바라며 흙을 갈아엎었다. 쇠스랑으로 단단한 흙을 고르며 이랑을 만드셨다. 호미로 돌을 골라가며 두둑을 올리고 고랑을 치셨다. 아버지는 쏟아지는 장대비로 스며드는 물길을 돌리기 위해 흙짐을 짊어졌고, 멧돼지의 발길질을 막기 위해 돌담을 올리셨다. 아버지의 땀방울은 소담한 열매가 되어 자식의 배를 불렸다. 몸을 낮춰 키워낸 채마들은 자식의 키를 키웠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몸은 작아져만 갔다.
그땐 왜 몰랐을까? 아버지는 버거운 삶의 무게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피눈물 나는 생의 설움을 모두 다 밭의 숨결에 토해 내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숨결에 기대어 다시금 자박자박 걷고 있었다는 것을. 절룩거리며 걷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풍상고초를 겪은 밭 같아 애처롭다.
밭은 단지 머무르게 할 뿐이다. 씨앗들은 머물면서 열매를 맺는다. 비상하는 새들은 머무르며 쉼표를 찍는다. 석양의 노을은 머무르며 여운을 남긴다. 낙목한천에 놀란 미물들은 언 땅 밑으로 생명의 숨결을 머무르게 한다. 고요한 가슴 속 자식 잃은 애비의 울림도 머무르게 하고, 가장의 짓눌린 무게도 머무르게 한다. 들녘의 침묵 속에 잔잔히 잦아들게 한다. 우듬지 까치 소리가 여명을 깨운다. 풀잎에 새벽이슬이 아롱지면 멈췄던 삶의 맥박은 다시 뛰고, 지난날 고단했던 삶의 속살은 굳은살이 되어 단단해진다.
머물렀던 것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겨진 밭. 어린 자식들이 다 자라 제 둥지를 찾아 떠난 후에도 빈 밭을 홀로 지키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가슴은 텅 빈 밭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밭의 적요함은 본성이 지닌 허무함이다. 가진 것 없는 허무함이 아닌, 제 것을 고집하지 않는 허무함이다. 밭은 한 번도 제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가진 것이 없기에 내세울 일도 고집할 일도 없다. 아버지는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품에 주렁주렁 매달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평생 자신의 밭은 비워두고 사셨다. 내세울 것 하나 없이 오롯이 품기 위해 수많은 감정의 골을 담아내고 비워온 아버지. 쉼 없이 담금질해온 아버지의 앙상한 가슴팍이 서러움으로 여울져 온다.
올해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이랑을 타 놓으셨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삶을 살아내시겠지. 매해 같은 삶을 살아내지만, 올해엔 유독 아버지의 모습이 봄빛 찬란하게 피어나는 매화꽃처럼 향기롭다.
오도카니 패어 있는 아버지의 저 발자국. 잔잔히 일렁이는 내 마음에도 아로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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