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황진숙
소리 한 톨 심을 수 없다. 손짓 발짓 한 번 내두를 수 없는 불모지다. 발화하지 못하는 언어가 쌓이고 살아온 동선이 퇴적된 음지다. 등줄기의 음영이 드리워진 적막한 그곳.
궁굴리지 못한 이력이 박히지만 핏줄과 힘줄처럼 도드라지지 않는다. 휘젓고 내저을 수 있는 손과 발의 자유에 비해 등은 직립의 운명에 포박되어 있다. 기둥 노릇을 하는 척추가 있어 일생을 곧추세운다. 휘어지고 틀어져서라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로 선다. 떠밀리고 나동그라져도 충격을 흡수하며 소명을 다한다.
떠받들어야 하는 천형으로 몸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목이 지탱하지 못해 넘어오는 머리의 무게는 온전히 등의 몫이다. 기우는 어깨를 지지하는 것도 등이다. 들거나 안을 수 없는 짐은 등이 짊어지고 걸머진다. 해가 이울 때까지 지워진 무게를 내려놓을 수도 없다. 종일 혹사당한 등을 바닥에 붙이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다. 수직의 본성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헌신하는 등이 우직하다.
“아악”
“촘촘히도 뭉쳤네요.”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지고 뒤이어 치료사의 말이 들린다. 등을 누르고 주무를수록 크고 작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살아온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등이 아프다며 통증을 내비쳤다. 치료용 베드 위에 엎드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제 시간을 다 써 버린 듯 굴곡을 훤히 드러낸다. 나직한 구릉을 올려놓은 것처럼 수북하다. 등골을 경계로 한쪽은 비대칭을 이루며 튀어나와 있기까지 하다. 쉼 없이 같은 자세로 일하다 보니 남편의 등은 비정상적으로 굽고 휘었다.
처음 나를 업어주던 등은 반듯하고 매끈했다. 딱딱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근육이 붙어 탄탄했다. 나만 믿으라며 등을 내주던 그가 듬직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안온했다. 업혀 있으면 화르르 꽃물 번지는 봄날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반드러울 줄만 알았다.
곧기만 했던 등 위로 세상바람이 얹히자 휘청거렸다. 거래처에 배달을 나간 직원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자 남편은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남의 돈을 빌려 시작한 일이었으니 여유가 없었다.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를 떠나 단칸방으로 옮겼다. 여름이면 지네가 출몰하고 겨울이면 곰팡이가 피는 낡은 집이었다. 벽 하나를 두고 길가의 차 소리와 발걸음소리, 인기척이 들리는 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휩쓸릴 것 같아 움츠러들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에는 무너지지 않으려나 응등그렸다.
나날의 노동으로 그는 부쩍 해쓱해졌다. 삶의 외곽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허위단심 애를 써 보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살아야 하는 부등가리살림이 그를 지치게 했다. 늦은 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날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짐을 내려놓지 못해 등을 펴지 못했다. 포물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애당초 반대한 일을 벌인 대가라는 원망으로 그를 한껏 밀어냈다.
어스름이 걷히면 그는 욱신거리는 등을 이끌고 또 하루를 향해 나아갔다. 등에 들러붙은 남루를 뒤로한 채 삶의 중력에 맞섰다. 등짝을 따라 흐르는 소금기에 절여지고 배어든 한기에 서늘해질 때까지 온 기운을 소진했다. 별달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흐트러짐 없이 버티는 건 허공을 들어 올려야 하는 등의 의무였는지 모른다.
허나 느닷없이 휘몰아치는 천둥벼락과 돌풍은 남편의 온몸을 훑으며 그간의 노력을 초토화시켰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남편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식재료를 급히 요청하는 거래처의 주문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태풍의 북상으로 도로는 휑했다. 회오리치는 강풍으로 가로수가 휘어지고 있었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간판 위로 빗줄기가 퍼부어댔다.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달리던 찰라 도시가 암흑에 들었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아 공사 중이던 도로 턱에 부딪쳐 오토바이가 미끄러졌다. 엎어지고 뒹굴면서 남편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남편은 찢어진 옷을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다. 피떡이 진 이마며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골절된 갈비뼈의 통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속울음을 삼키는 이처럼 아픔을 참고 있는 그를 보자 목이 메었다. 삭혀낸 고통으로 시퍼렇게 얼룩진 등을 보고 나서야 그가 감당한 노역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몸의 뒤에 있어서 등에게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번도 마음을 담아 쓸어주거나 보듬어 주지 못했다. 애당초 신이 부여한 널찍한 등짝은 스스로가 아닌, 이타를 위한 거라며 등의 노고를 당연시했다. 부러 내 짐까지 그의 등에 얹으며 짊어지길 강요하지 않았던가.
온몸의 감각을 등으로 모아온 시간들이었다. 칼날이 내리꽂힌다 한들 막을 방패 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로 지탱해 왔다. 결리고 저릿한 통증이 더는 버거웠는지 남편의 등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생의(生意)를 상실한 것이다.
궁핍한 생을 떠받들어온 등이 낮아지자 육신은 힘을 쓰지 못했다. 늑골을 보호하기 위한 복대로 지지만 할 뿐,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다.
그간 등은 아둔하리만치 침묵을 지켜왔다.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거나 호소하지 않았다. 가슴벼락에서 슬픔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두 다리가 절망에 접질릴수록 직립의 갈망으로 곧추세웠다. 세파에 너덜거리는 가슴팍이 기댈 수 있게, 허기를 껴안아 오그라든 뱃가죽이 맞닿을 수 있게 부동의 자세를 지켜왔다. 기댈 곳도 물러설 수도 없는 벼랑에서 무게를 이겨가며 인생항로를 그려왔다. 굴러 떨어져도 살아남아야 할 생존본능으로 살얼음판을 건너고 육중한 힘으로 폭풍한설을 뚫었다.
육신의 후방이면서 생의 전방인 등. 수많은 소리를 삼키고 각인된 기억으로 능선을 그리는 접경지대다. 마른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처럼 메마른 소리가 일어서고 허방 짚듯 푹 꺼지는 진동도 감지된다. 밀리고 쓸리느라 덧났을 마음이 고이고 바람 잘 날 없는 삶의 희로애락이 모여든다. 온갖 흔적으로 너덜해지고 비루해지는 생의 표지(表紙)다.
중중첩첩 등이 져 나른 고행으로 생 하나를 일으켰다. 등 너머를 꿈꾸며 숱하게 넘어섰기에 가족을 건사할 수 있었다. 불탄 자리에서 돋아나는 목숨처럼 거친 숨결을 여미고 황량한 벌판에 다시 서는 건, 나와 아이들의 등이 되기 위해서였으리라.
굽이굽이 견고해진 남편의 등을 바라본다. 굽은 등으로도 능히 세상사에 대처하는 그가 듬직하다. 기울어질 뿐,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성벽이다. 그의 등이 타전하는 강인함에 내 등을 맞대어 보리라.
기대고 싶은 그의 등 위로 잠시잠깐, 숨을 고르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편안한 미소가 비쳐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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