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나무 도마/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6. 09:49

 

나무 도마/황진숙

 

동토의 찬기로 단단하게 자랐을까. 산비탈의 바람으로 광활하게 커 나갔을까. 직선으로 흐르다가 곡선으로 물결치는 나뭇결이 옹골지다. 쇄골만 남은 노거수의 심지마냥 공고하다. 세상을 돌아 나온 듯 붉은 빛깔이 묵직하다. 한 생을 그어놓은 목리 위에 또 다른 생을 써 내려가는 도마.

솔수펑이에서 건너왔을 터이다. 운명선처럼 뻗은 결 따라가면 흙속에 파묻힌 홀씨 하나 만날 것만 같다. 수없이 오가는 계절 속에서 어딘가에 박혀 있었을 씨앗이 눈을 뜬다. 봄볕 한줄기에 깨금발 들고 꽃바람에 고개를 내민다. 파고드는 바람의 귀엣말에 움싹을 틔운다. 소쩍새 우는 소리로 허공이 낭창거리면 흥에 겨워 키를 늘린다. 초록길을 따라 이파리를 달고 꽃을 피우며 도란거린다.

세월이 가고 덩치를 키우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북하게 쌓인 햇살을 잡아채고 영토를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나무껍질을 덧입고 뿌리를 내릴수록 파문이 일었다. 소나무라는 어엿한 이름을 얻자 지순했던 시절은 잊혀 갔다.

나무에서 도마가 되는 일은 내가 나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내게서 멀어진 지난날은 얼마나 천방지축이었던가. 우렛소리에 눌리고 몰아치는 폭우에 초주검이 된 날은 마음에 가시를 돋웠다. 폭설로 나뭇가지가 휘어지거나 부러지면 독기를 품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으며 겁 없이 찔러댔다. 허공으로 마디를 늘여 발아래 그늘을 차지했다. 늙은 몸으로라도 꽃을 피우기 위해 더 깊이 뿌리를 묻고 다른 생명이 자라지 못하게 타감물질을 분비했다. 제 땅이라고 금을 그어 누구라도 침범하는 것을 막아섰다. 나목들이 마지막 남은 잎을 지워 버릴 적에 한 잎도 떨어뜨리지 않고 움켜쥔 탐심이었다. 볕살이 이파리에게 부려놓은 빛깔을 사계절 내내 제 색으로 틀어쥔 나날이었다.

톱날이 밑동에 파고들고 몸통이 잘리자 득의만만한 기세가 수그러든다. 뿌리가 딛고 있던 흙을 떠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힘이 모아지지도 쥐어지지도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닥에 눕는 일이었다. 무력한 생목(生木)이 되어 껍질이 벗겨진다. 그간 날로 두꺼워지는 외피를 두르고 사느라 맥동을 느낄 수 없었다. 상처가 나면 진액을 분비해 덮어주는 껍질이 있어 마음껏 휘둘러왔다. 긁히고 팰 거죽이 사라지니 내두를 수도 휘저을 수도 없다. 응달에 방치된 채 무게를 잃으며 말라간다.

지나는 바람에 진이 빠지고 가벼워지자 둥글게 말아 넣은 시간이 네모나게 재단된다. 거침없이 부피를 늘인 몸피는 깎이고 다듬어져 편평해진다. 쟁여놓은 나이테까지 대패에 밀리자 온전한 나신이 된다. 남아 있는 탐욕이 거스러미를 따라 일어서보지만 사포에 제거된다. 줄어든 몸피로 잘리고 다져지는 것들을 받쳐준다. 드나드는 것들의 등짝이 되어 내리치는 칼날을 받아낸다.

넘치는 긍지에서 칼집 투성이의 궁지로, 이름을 내건 나무에서 무명의 도마로 내몰리기까지. 생애의 전부였을 자긍심이 벗겨지고 칼질이 난무하는 상처 속으로 침잠한다. 내달리고 굽이치느라 들이지 못한 고요 속에서 그악스러웠던 시간을 거둬들인다.

한 칼 한 칼 낮아지는 호흡으로 생것의 숨결을 갈앉힌다. 살점이 닳고 파이도록 그네들의 냄새와 색을 뒤집어쓴다. 들썩이며 아우성치는 날것의 소리, 웃자란 채마들의 억센 숨결, 매운 것들이 내뿜는 맵싸한 향내, 비릿하게 몰려오는 기척들을 쓸어 담는다. 토막 난 시간을 버무리고 명을 다한 목숨들을 잠재운다.

생의 여울목을 지났건만, 곡절을 겪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목탁처럼 재탄생하지 못했다. 감탄해 마지않는 고가구로 거듭나지도 못하였다. 고이 모셔두는 고서의 반열은 언감생심이다. 등을 대고 눕거나 앉은뱅이가 되어 붙박이로 사는 게 다다. 갈라진 마디에 쓴물이 고이고 차디찬 한기로 얼얼해져도 벗어날 수 없다. 관통할 듯 한 칼날에 버려지며 세상을 들인다. 수천 갈래의 상흔으로 협곡을 만들며 기울어간다.

칼의 율격에 따라 쓸리고 마모되는 몸은 움푹해진다. 잎 푸르른 시절의 해사한 몸빛을 찾아볼 수 없게 퇴색된다. 이울어가는 정물처럼 주저앉고 내려앉은 등뼈에서 익숙한 기억이 다가온다.

으스러질지도 모르는 척추 때문에 부러진 뼈에 심을 박지 못하는 그의 시간이 흔들린다. 무위의 날에 들기까지 성치 않은 몸으로 굴러왔다. 가슴이 결리고 다리가 저리도록 땅만 훔켜쥐었다. 가난한 집의 장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몸으로 하는 노동뿐이었다. 그 대가가 농토였으니 지키고 넓히기 위해 한 생을 죄다 부렸다.

한때는 그도 거칠게 치받았다. 이런저런 굴곡으로 절름발이가 되어 뿌리가 드러났을 때에는 마구잡이로 할퀴어댔다. 땅에 대한 집착으로 물꼬를 내주는 데에 인색하게 굴고 경계 짓고 있는 남의 농지를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드잡이를 했다. 온전치 못한 몸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를 궁벽진 곳으로 몰아갔다.

성마르게 변한 그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소나무가 제 품에 든 볕살을 놓지 못해 아래가지는 죽고 윗가지만 살아남듯 한 마지기의 땅은 불렸을지 몰라도 차디찬 주위의 시선이 그 자신을 헤집었다.

그런들, 쉴 틈 없이 가한 무두질로 그의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뼛심을 다해 식솔을 품었으니 날로 낮아져만 갔다. 깎여 나간 흔적 위에 더께가 내려앉아도 무덤덤한 도마처럼 날것의 고통에 이골이 날 정도로 무디어졌다.

빗장을 내지르며 소리치던 지난날의 고함도, 존재를 드러내던 몸짓도 잦아들었다. 저물 녘 노을이 붉게 타오르며 그를 비춰보지만 바래진 그는 고요히 머물 뿐이다. 생과 겯고틀던 그의 한살이가 시나브로 사위어간다.

온갖 냄새와 소리로 또 다른 결이 씌워져야 빛나는 몸, 온몸으로 진저리치고 나면 물로 헹궈 정갈해지는 도마. 잘라내어진 가슴으로 들어앉힌 풍경이 순하다.

흐르고 흘러 둥글어진 나무 도마의 마디를 오랫동안 읽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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