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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자전거/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6. 09:56

아버지와 자전거/황진숙

“아버지, 내일 제가 모시러 갈게요.”

“됐다. 번거롭다. 오지 마라.”

입원 중이던 아버지가 퇴원한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부딪쳐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다.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전화했다. 통화는 늘 단답형이다. 짧게 끝난다. 자식들이 걱정할까 싶어 당신 말씀만 하고 끊는다.

다음날, 직장에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갔다. 차를 주차하고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이미 짐을 꾸려 휠체어를 타고 나와 있었다.

이제 일흔인데 아흔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굽은 등이 눈에 띄었다. 고된 농사일과 삶의 이런저런 굴곡으로 꼿꼿하던 허리는 구부정해졌다. 백발의 머리가 수척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초췌하게 만들었다. 저분이 어릴 적 자전거에 날 태우고 학교에 데려다 주던 분인가. 젊었을 적 다부졌던 아버지가 생각나 문득 서러워졌다.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하는 장남으로, 사 남매의 아버지로, 지아비로 힘에 부쳤을 것이다. 회사를 다니며 고된 농사일까지 하루도 쉴 틈 없이 시간을 부렸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오빠와 나를 불러 동네 점방에 막걸리 심부름을 보냈다. 남은 잔돈은 심부름하는 사람 차지가 되어 우리는 서로 가겠다고 우겼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곤 했다. 노래 한 소절을 안주 삼아 그날의 피로와 힘듦을 풀어냈다.

어느 해 여름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불빛이 번쩍거리며 사방이 캄캄해졌다. 곧이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등교를 준비하던 나는 궁싯거리며 뜰로 내려섰다. 우산을 쓰고 가려는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막걸리를 드시고 곯아떨어졌던 아버지가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기다려라. 아빠가 태워다 줄게.”

아버지는 자전거 앞에 작은 안장을 걸치고 나를 태웠다. 한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쥐었다.

“꽉 잡아라.”

아버지는 삼 킬로 거리에 있는 학교를 향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동네를 벗어나면 학교로 가는 길은 이차선 도로다. 그날따라 차량이 줄을 이었다. 거센 빗줄기가 자전거를 밀고 있었다. 경적을 울리는 차를 피해 옆으로 비켜서는 순간, 강풍이 불어왔다. 잡고 있던 우산이 날아가 버리고 놓친 핸들로 자전거가 비틀댔다. 이미 중심을 잃은 자전거는 도로 옆 도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놀란 나는 울음이 터졌다. 고꾸라진 와중에도 분홍색 꽃무늬 치마에 튄 흙탕물이 눈에 들어왔다. 전날 엄마가 장에 가서 사다 준 치마인데 이렇게 더러워지다니. 무릎이 까진 아픔보다 얼룩진 치마에 속이 상해 엉엉 울었다. 우는 날 달래느라 아버지는 잠바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아버지 팔뚝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를 본 나는 더욱 겁에 질려 울음소리가 커졌다.

“아빠, 피 피나와.”

아버지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이빨로 찢어 대충 묶었다. 그리고는 나를 등에 업었다. 반은 뒤집힌 우산으로 날 가리고 당신은 비를 맞으며 학교로 뛰어갔다. 그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깊이 잠이 들어 버렸고, 병원에 다녀온 아버지가 팔뚝이 찢어져 여러 바늘을 꿰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아버지 팔뚝에는 그 날의 상처자국이 선명하다. 우는 딸이 걱정돼 당신 팔에서 피가 나는 아픔도 잊은 채 헐레벌떡 뛰던 아버지. 살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그날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오롯이 나를 위해 빗속을 뛰던 모습이.

세월이 흘러 나 또한 부모가 되었다. 이렇게 노구가 된 아버지를 마주하고 보니 마음이 아려온다. 젊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죽만 남은 아버지의 노년이 서글프다.

아버지는 여전이 내 아버지이기에 됐다며 손사래 친다. 이제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기에 든든히 지켜 드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가만히 다가가 아버지를 꼭 안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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