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조/황진숙
반란이다. 소리소문 없이 출몰한다. 가끔 기별은 있었지만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예고도 없이 야밤에 들이닥쳤다. 붉어지는 얼굴을 보며 자고 나면 괜찮겠지. 며칠 있으면 가라앉으려니 했다.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한다. 얼굴에서 가슴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벌겋게 데운다. 따갑고 화끈거린다. 내 숨통을 틀어쥐고 숨 쉴 적마다 콧구멍으로 입으로 뜨거운 김을 쏟아낸다. 작정하고 열을 내며 달려드니 속수무책이다.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빨아들이며 사막화시킨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균열을 일으킨다. 내 천(川) 자 주름, 팔자주름, 삼 주름 등 고인 주름은 모두 저리 가라며 새로운 골을 긋는다. 턱에 볼에 이마에 뾰루지를 올리며 철퍼덕 자리 깔고 누워 버린다.
오만 성깔을 부리는 홍조를 달래기 위해 진정팩으로 얼굴을 덮는다.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복식호흡을 한다. 냉수를 들이켜고 찬물로 샤워를 해 본다. 잠시 잠깐일 뿐, 불길은 쉬이 잡히지 않는다. 속은 까맣게 타는데 얼굴은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참다못해 맞불을 놓는다. 삼복더위에 보양식이 제격이니 이열치열이렷다. 소뼈로 우린 사골국물을 들여보낸다. 뜨거운 기운에 깜짝 놀라 도망가겠지. 웬걸, 얼마 지나지 않아 된서리를 맞는다. 온몸이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가렵다. 진국의 명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홍조에 합류하여 열을 상승시킨다. 맥을 못 추는 방책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이제껏 마시던 우유와 커피도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살아온 방식이 통째로 거부당하는 느낌이다.
하는 수 없이 묘책을 찾으러 병원엘 간다.
“별수 없습니다. 내려놓으세요.”
의사의 말이 뇌리를 울린다. 어느 날인가부터 철쭉꽃 피는 봄을 맞으면서 흥취에 젖지 못했다. 벼락 치는 여름의 두려움과 붉게 익어가는 가을의 풍요로움, 시린 가을의 찬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바삐 살았다고 핑계를 댄다. 너무 많은 짐이었다고 한탄도 해 본다. 잡고 있다고 내 것이 될 수 없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지 못했다. ‘하루에 참을 인(忍) 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의 당호처럼 내뱉지 못한 응어리가 불덩이가 되지는 않았을까. 내지르지도 삭히지도 못한 묵은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른다. 겉으로 드러난 감정을 삭이기 위해 퇴고를 자주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도 귓가를 맴돈다. 되돌아보는 시간을 생략한 채 살아온 나날이 뜨끔하다.
내려놓으라는 추상적인 단어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들추느라 아득해진다. 팍팍하게 사느라 여백을 두지 않았기에, 마음 한 가닥 내려놓을 자리를 찾지 못해 난감하다. 그간 시선을 주고 살았던 것들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것 같다. 일상에 휘둘리고 홍조에 시달리고···. 마냥 청춘인 줄 알았던 몸이 내지르는 호소에 귀가 얼얼하다. 휑한 가슴을 안고 진료실 문을 나선다.
밖으로 나오니 잎잎이 물든 은행나무 잎으로 거리가 훤하다. 저무는 시간이 저리 고울까. 구르는 황금빛이 아까울 정도다. 바람에 흩날리던 잎새 한 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옷깃에 달라붙는다. 저마다 무게를 놓고 바닥으로 내려앉는데, 계절을 따라가지 못하는 풋내기가 떨어지지 않으려 기를 쓴다. 미련스럽게 몸부림치는 궤적이 마음을 흔든다. 너도 별수 없구나. 떼어 버리려다가 하릴없이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데리고 온다.
돌아오자마자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든다. 중간 부분을 펼쳐서 나뭇잎을 끼워 넣는다. 구부러진 몸을 반듯하게 펼 수 있도록 심지에 바짝 붙인다. 구입하고서도 차일피일 읽기를 미뤄뒀으나, 며칠 후면 잘 마른 잎과 함께 이 책을 읽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바람에 쫓기던 잎의 당혹감도 사그라졌을 테지. 잎맥 가득히 피돌기 하느라 누리지 못했던 저만의 시간에 닿아 있을 것이다. 물기가 걷히고 냄새가 가셔 느슨해진 저를 음미할 것이다. 나 역시 나를 보지 못해 지나쳐온 시간을 나뭇잎에 비춰보며 조금은 가붓해지기를 소망한다. 오래 참았다가 뱉어내는 숨처럼 서서히 헐거워지기를, 붉은 낯빛이 온화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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