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을 돌며/황진숙
트랙을 돈다. 어슴푸레한 빛이 발등에 내려앉는다. 하루를 완성하기엔 아직 몇 시간의 여유가 남아 있다. 한낮의 소요를 다독이며 뒤덮는 땅거미가 아늑하다. 새벽녘이 돋쳐 오르며 부산하다면 잦아드는 저물녘은 느슨하다. 등을 떠밀며 채근하는 대신, 소리 없이 깃들어 탕진한 하루를 쓸어준다.
땅이 풀리는 춘삼월이어서일까. 코끝에 흘러드는 냇내가 삽상하다. 조금 있으면 당도할 봄기운이 만연체로 파고든다. 쇠락하는 겨울과 솟아나는 봄이 걸쳐 놓은 적요 속으로 걷는다. 들릴 듯 말 듯 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른다. 앞으로 옆으로 뒤로 걸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무중력 상태다. 혼자 걸어도 둘이 걸어도 좋을,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평지가 가뿐하다.
어스름이 깊어지자 경기장을 둘러싼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 암전에 들었던 속내에도 등이 걸린다. 종일 바깥으로 치닫던 소리들이 소용돌이를 이뤄 에워싼다.
그랬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엉켜 뒤집히고 넘어지는 일상이었다. 끓어오르기만 할 뿐 뚜껑을 밀어 올릴 수 없는 처지가 답답했다. 병증이 깊어 요양을 요하는 아버지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식으로서의 고민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연을 끊자며 극단에 달한 동생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이 되고 싶다.
지천명이 코앞이건만, 한 번도 마음자리에 든 말을 쏟아낸 적이 없다. 출가외인이라며 두 딸의 삶에 모른 척, 선을 그어온 부모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마저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힘에 부치니 다급하게 전화하는 어머니에게 달려가면서도 부아가 치민다. 이제껏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온 내 삶이 통째로 흔들린다.
그저 옛날 시대를 살아온 세대라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다. 아버지 곁에 있다 보니 어머니마저 마음에 병이 들어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연세 지긋한 시골 어르신들한테도 동정심을 베풀던 내가 아니던가. 자식으로서 의무라고 받아들이자고 다짐하다가도 지금까지 나를 자식으로 생각이나 했냐며 도리질 치는 마음이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
몰아치는 회오리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걷고 내달린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탕진하고 한계에 치닫고 싶다.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고꾸라질 때까지 돌리라. 육신을 부리고 나면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올지 모른다. 옥죄었던 나를 풀어 헤치고 눌러둔 감정을 맘껏 발산시킨다.
한 바퀴, 두 바퀴 트랙을 돌수록 허벅지가 무지근해지고 장딴지가 당겨온다. 등골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심장이 고동친다. 온몸을 도는 혈류의 파동으로 오롯한 나를 느낀다. 부모님에 관해 자유롭다 못해 태무심했던 나도, 오로지 셈법으로만 따지며 얄팍하게 살아왔던 나도 나였기에 어긋나고 부대낀다.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아가듯 끓어 넘치는 사념이 가라앉는다. 무게를 짊어지고 싶지 않아 ‘내가 왜’라는 질문에 덤터기 씌운 핑계와 변명이 고개를 조아린다. 당신들이 그러했으니 나 역시 그리하겠다는 억지 논리로 무장했던 빗장이 풀린다. 외면하고 부정했던 내 안의 나를 만난다.
새된 소리가 썰물처럼 쓸려나가자 거친 숨소리가 잦아든다. 숨을 고르자 발바닥을 통해 전해져 오는 바닥의 탄성이 뇌리를 울린다. 단념이라고 할지 포기라고 할지 비워낸다고 할지 뭐라고 해도 좋다. 애쓰지 않으련다. 어둠 속에 지친 몸을 부리고 나면 다시 생동하는 물상처럼 무감각했던 영혼이 지극해진다.
조명이 빛을 발할수록 뒤를 따르는 그림자와 발걸음 소리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등 낮은 불빛 아래서 저녁을 먹던 피붙이들이 생각난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 두런거리는 말소리, 주고받는 온기로 따스했던 유년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라도 그 기억만으로도 휑했던 가슴이 따스해진다.
저 멀리 중중첩첩 주름진 산들로부터 바람이 온다. 무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한들 당분간은 유연하게 마주할 수 있겠다. 바람이 가고 나면 산빛은 초록으로 흐드러지고 가로수는 난분분 꽃잎을 흩날리겠지. 부풀어 오를 봄내음을 기다리며 트랙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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