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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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쳇다리/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8. 4. 15:50

 

쳇다리/황진숙

정지문을 연다. 볕살 몇 조각이 고개를 들이민다. 어두컴컴한 시야에 들어오는 부뚜막이 휑뎅그렁하다. 터줏대감인 가마솥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고물상에 팔려 간 지 오래다. 이빨 빠진 잇몸처럼 돌아오지 못할 짝을 기다리는 아궁이가 스산하다. 종지를 놓아두던 살강이며 찬장이 사라진 곳에 쌓인 먼지와 처진 거미줄로 이미 부엌은 풍화에 들었다.

그을음이 까맣게 내려앉은 흙벽마저 기울고 있어 한때는 이곳이 부엌이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려나 보다. 밥물이 끓어 넘치는 소리, 타닥거리는 장작불 소리, 도마질 소리를 떠올리기가 왠지 객쩍어진다. 서늘한 기운에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낯익은 기물이 눈에 들어온다. 기력이 다한 듯 한쪽 귀퉁이에 기대어 있는 쳇다리다. 사시랑이 몸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맞고 있는 낯빛이 해쓱하다.

한번 맺은 인연을 저버리지 못해서일까. 모두가 떠난 곳에 홀로 남아 허물어져 가는 시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 주인인 양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과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는 적막 속에서 기어이 자리를 지킨다.

무수한 날의 무게를 받치느라 닳고 갈라진 삭신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콩나물시루 밑에 깔려 수시로 물벼락을 맞고 저보다 몇 배나 무거운 맷돌을 받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행여나 중심을 잃고 흔들릴까 봐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노루잠으로 연명하는 일상은 힘들기만 했다. 자배기 위에 걸터앉아 자루 속의 콩물이 다 빠질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다.

고단한 노역에 제 몸을 밀어 넣어야 했던 눈물의 짠 기가 땟물로 번져온다. 걸러지는 것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노고의 흔적이 세월 따라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었다. 생의 지문이 몇 겹으로 덧칠될수록 차라리 버림치가 되고도 싶었을 게다. 매끈했던 몸피가 거칠어질수록 아린 한숨으로 응어리졌을 속내가 쓸쓸하다. 더께에 묻혀 삭아가는 서러움이 애잔하다.

설핏 바람이 든다. 묵은 먼지가 풀썩거리는지 싸하다. 늙수그레한 육신에 눌러앉은 세월이 삐걱대며 미끄러진다. 일흔이 넘도록 하루도 편히 살아본 적 없는 생의 무게가 힘겹게 흘러내린다.

어머니는 볼 발그레한 꽃 같은 시절에 흩날리는 꽃바람 타고 종갓집에 시집왔다. 정을 붙일 변변한 의지처가 없었던 어머니는 설레는 마음으로 초례청에 들어섰다. 일생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 없는 아버지다. 종손으로 귀히 자란 탓에 모든 게 아버지 마음대로였다. 늘 술을 달고 살며 집안일은 뒷전이었다. 한 툭바리의 막걸리로 시작된 새참은 주전자 몇 동이를 비우고 나서야 달빛이 박꽃을 하얗게 비출 무렵에 끝이 났다. 그런 날이면 담을 넘는 아버지 목소리를 찾아 이 집 저 집을 돌았다. 고함을 치고 드잡이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서야 겨우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아버지는 세간살이를 마당으로 패대기치며 벼락을 쳤다. 여편네가 재수가 없어 망조가 들었다며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폭우가 내리는 한밤중, 마당귀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던 어머니는 욕설을 뒤집어쓴 채 사색이 되어 벌벌 떨어야 했다. 사고로 막내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는 화장터에서도, 큰아들의 숨이 끊어지는 중환자실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주망태가 되어 어딘가에 곤드라져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통곡조차 맘껏 할 수 없었다.

사는 일은 간절하다. 간절함이 넌더리 나도록 삶을 남루하게 만든다. 알코올의 독한 기운은 아버지를 세상으로부터 가두어 버렸다. 쌀독 긁는 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땔감 떨어진 아궁이가 허기에 몸부림쳐도, 너울거리는 세상이 전부인 아버지에게는 가 닿지 않았다. 사방이 하얀 벽면으로 둘러싸인 창살에 갇혀 자신의 존재마저 망각했다.

단지 여염집 평범한 아낙이기를 소망하는 어머니의 바람은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쳇다리에 얹힌 맷돌처럼 밀어낼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지아비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어머니는 온몸을 통째로 내놓았다. 빚쟁이처럼 달라붙는 가난에 뼈품을 팔아 호구를 연명하고, 등골이 타들어 가도록 날품을 팔아 자식의 학비를 댔다. 제 몸 하나 움켜쥘 새 없이 그러안은 고통으로 뼈마디에 실금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진창말이가 될 때까지 바라지했다. 지쳐 주저앉으면 떠받쳤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터진 손끝과 발끝으로 쓰디쓴 물을 들이며 무던히 버텼다.

어둠이 슬고 얼룩진 소리가 살아나면 닳고 닳은 관절에서 된소리가 났다. 그저 살아내야 하는 천형으로 묵묵부답이었던 가슴에선 삭은 바람이 새어 나왔다. 때로는 떠안은 무게에 짓눌리는 숨구멍을 틔워내고 싶었을 테다. 살품으로 들이치는 절망에 터져 나오는 신음마저 삼켰을 어머니가 처연하다. 성치 않은 다리를 절면서까지 기어코 완성해야 할 가족이 있어, 숱하게 바스러지며 건너왔을 속내가 저릿하다.

세월은 원망이나 미움도 무화시켜 버릴 나이로 어머니를 데려다 놓았다. 햇살 한 줌 들이지 못했던 어머니의 육신은 당신 것이 아닌 지 오래다. 여전히 시간 밖으로 물러나 있는 아버지의 기억이 되었다가, 하나둘 떠난 자식들의 체취가 되었다가, 스러져가는 빈집의 흔적이 되어 이울어간다.

홀연히 숨소리가 들린다. 쳇다리의 갈라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숨이 힘겹기만 하다. 쇠잔해진 숨 위로 햇살 한 올이 내려앉는다. 오롯이 당신의 시간을 가져본 적 없는 어머니가 이제야 지워준 무게를 벗고 고요 속으로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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