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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 너울거리는 비릿한 것들/마경덕

에세이향기 2021. 12. 19. 12:50

파도에 너울거리는 비릿한 것들

 

 

  짜고 비릿한 것들이 내 기억 속에서 출렁거린다. 녹슨 양철지붕을 흔들던 사나운 바람 소리, 갯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 수정처럼 맑은 물의 뼈들, 길게 뱃고동을 울리며 장군도를 지나가던 여객선, 아득히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던 통통배 소리, 끼익끼익 적막한 밤바다를 헤집는 노 젓는 소리ⵈ 모두 바다의 숨소리였다. 밤바다는 내 머리맡까지 밀려와 철썩거렸다.

 

지척에 있는 장군도에 해마다 벚꽃이 피고 홀로 봄이 다녀갔다. 사람이 살지 않던 장군도는 급류가 흘러 가깝고도 먼 섬이었다. 마을 아낙들이 장군도까지 씨알 굵은 조개를 캐러 가다가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혀 죽을 뻔했다고 숙모는 몸서리쳤다.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우리 마을은 술병, 화병(火病)에 골병들고 노름과 폐병으로 가산을 탕진한 사내들과 바다에 남편을 잃은 과부의 눈물이 모여 살았다.

  땅 한 평 없어 농사를 지을 수도, 작은 덴마* 한 척 없어 고기잡이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술판에 둘러앉아 화투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는 의지를 짓눌러버리던 그때, 막일조차도 구하기 힘들었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처럼 여수의 바다는 오지게도 푸르고 오동도 동백은 핏빛으로 붉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쪽빛 바다를 보며 흘린 눈물은 밥이 되지 않기에 바닷가 여자들은 철따라 굴 조개 톳 꽃게 해삼 등 바다의 속살을 뜯어 먹고 목숨을 이어갔다. 남자들은 갯지렁이를 미끼로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고 여자들은 바닷가에 엎드려 하루를 보냈다.

  목수인 아버지 덕분에 밥을 굶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나는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또래였던 아랫마을 춘자는 헤엄을 치다가 파도에 쓸려가고 인자는 생일날 미역국에 숨어있던 억센 양태 아가미 가시가 목에 걸려 죽었다. 돌산에서 여수로 건너와 집집을 돌며 똥지게에 인분을 퍼가던 부끄럼 많은 소년은 밤바다에서 실종되고 끝내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또 누군가 사라진 날은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무당의 징 소리가 밤새 캄캄한 물밑을 더듬으며 먼바다까지 떠밀려갔다.

온갖 소리가 바다를 붙잡고 살았다. 이슥도록 갯가를 떠돌다가 아스라이 멀어지는 소리는 늘 산동네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왔다. 전날 밤 상여가 나갈 집에 모여 앉은 동네 청년들과 요령잡이 노인이 주거니 받거니 부르는 만가는 희미하게 바람결에 밀려 왔다가 거품처럼 사그라지고 한여름 밤길에서 만난 혼불처럼 멀어져갔다.

  상여꾼이 부르던 그 노래는 꺼진 불씨가 살아나듯 다시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가슴을 적시고 내 잠을 흔들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애끊는 리듬은,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바닥을 치며 울던 청승맞은 곡조여서 어린 가슴에 사무치곤 하였다.

침을 질질 흘리며 실없이 잘 웃던 종오는 나하고 같은 반이었지만 지적 장애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야무진 형이 둘 있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고기잡이 나섰다가 풍랑에 배가 뒤집혀 삼부자가 죽고 말았다. 키보다 큰 나뭇짐을 지고 장에 팔러 나가던 외아들을 잃고 실신한 일동이 엄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땅을 치며 울던 그 원통함처럼 밤에 만난 만가(輓歌)는 굽이굽이 한이 서려 있었다.

   아내가 폐병으로 먼저 떠나고 남겨준 병을 붙잡고 살던 폐병쟁이 황 씨, 평생 노름으로 일생을 보낸 노름쟁이 곰보 천 씨,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술로 일생을 보내다가 끝내 혼자 남겨진 지게꾼 학출이 아버지, 마당에 우물이 있던 그나마 살만하던 필자네 아버지, 술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버린 주정꾼 종란이 아버지도 모두 그 길을 따라갔는데 또 누구일까.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우리집 앞을 지나갈 꽃상여의 주인이 궁금했다. 동네 조무래기들은 잔칫집에 온 듯 흥겨운 얼굴로 만장을 붙잡고 상여를 뒤따라 가곤 했다.

  맘 놓고 울지도 못하던 기구한 팔자들은 초상집에 몰려들어 자신의 슬픔을 꺼내 제 설움에 울고 또 울었다. 한바탕 후련히 속을 털어내면 슬픔이 조금 사라졌을까.

  고향도 변하고 시대도 변해 꽃상여도 상여꾼도 사라졌지만 마지막 떠나는 고인에게 들려줄 위로의 노래는 지금도 내 기억의 곳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덴마 : ‘전마선’을 달리 부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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