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의 낮잠/박순태
마을 곳곳에서 낯익은 풍경이 걸음을 세운다. 텃밭 옥수수는 수정되는 시기에 맞춰 대궁이마다 뿌연 애향(愛香)이 풍긴다. 감자 씨알은 나날이 굵어가면서 주변 흙을 불룩하게 부풀어 올린다. 울도 담도 없다던 울바자를 따라 양대 콩은 벼름벼름 깍지를 뚫고나올 기세다. 모두 부풀고 일어나고 기를 세운다. 초여름 주말 오후가 조용히 기지개를 켜는 시골 풍경이다.
아내와 시골집을 들르는 길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온해진다. 고향을 찾아오는 길은 아무리 익숙하여도 매번 오관과 육감을 새롭게 살려낸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변환이 머릿속이 아니라 나이 든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고샅을 돌았다. 점심을 두둑하게 먹었건만 갑자기 허기가 진다.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리던 소죽솥, 토담에 널려있던 시래기, 주린 배를 눈으로 배부르게 했던 꽃을 고봉으로 단 뒤란의 살구나무까지 모두 사라진 탓일까. 사립짝을 끼고 너희 집, 우리 집 할 것 없이 먹을거리를 나눴던 고향집 담장에는 누런 솔이끼가 그대로 남아 있건만 마을 사람들은 추억을 인화한 채 하나 둘 대처로 떠나버린 까닭일까. 살랑살랑 꼬리 흔들어 주던 동네 강아지와 붉은 깃 세우고 목청 울리는 수탉이 어디서라도 달려오면 덜 썰렁하고 덜 허기질 것 같다. 동네 집들이 적막에 묻혔다.
옛집 마당에 들어섰다. 휑한 마당에 달랑 호미 한 자루가 뙤약볕 아래 뒹굴고 있다. 사그라진 몸피, 오목하게 휘어진 안쪽에 막 밭에서 돌아온 양 흙부스러기가 반쯤 묻어있다. 날은 흙을 긁어내느라 뭉툭해졌고 자루는 어머니 손바닥만큼 반들반들하다. 균형 잡혔던 세련미는 온데간데없고 완숙미가 묻어나오던 형체마저 가뭇하기만 하다. 반세기가 넘게 어머니와 함께한 호미를 보니, 물살에 제 살을 깎인 돌덩이가 연상된다. 부엌에서, 빨래터에서, 들판에서 허리 펼 시간 없이 몸을 움직였으면서도 아버지 등 뒤에서조차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않았던 어머니의 삶처럼 호미는 지금 조용히 마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코끝이 짠해온다.
옛집에 남아있는 농기구라고는 어머니의 호미뿐이다. 집안 식솔들과 운명을 같이했던 낫이며 곡괭이며 쇠스랑은 대부분 오래 전에 사라졌다. 처마 아래 한동안 걸려있던 삽은 집안 대주와 더불어 자취를 감췄다. 대가족이 들판에 나가 일하던 그 때는 식구 머릿수보다 연장 개수가 더 많았건만 이제 호미 주인과 호미뿐이다.
삶이란 관계를 맺어가는 긴 여정이다. 그 인연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맺어진다. 고즈넉한 헛간을 지켜보는 동안 이 방 저 방에서 식솔들이 도란도란 주고받던 이야기가 선연히 들려오고, 마당 호미에서는 어머니의 포근한 말씀들이 우러나온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손으로 살며시 보듬어 보니 오후의 따뜻한 온기가 어머니의 체온인 양 전해온다.
돌담에 뿌리 내린 민들레가 유난히 눈길을 잡는다. 땅에 뿌리내린 것만큼 잎이 반들반들하다. 돌과 돌 사이를 비집고 몸을 지탱하는 민들레에게서 질긴 생명력을 읽는다. 거름기 많은 땅 위의 것들에 뒤지지 않으려 씨앗도 맺었다. 그 힘이 앙증맞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해서 안타까움도 불러온다. 생명의 원천으로 햇빛과 비바람을 빌리고 돌 틈의 흙에서 자양분을 얻을지라도, 태생의 한계점을 이겨내려 한 안간힘이 민들레의 자양분 아닌가. 하찮게 보였던 민들레가 틈새 꽃을 피워낸 것을 보니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낯설고 물선 도회지의 달동네 허름한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공동 부엌이 딸린 이만 오천 원짜리 사글셋방이었다. 창문을 때리는 칼바람 소리를 들으며 아내의 차가운 손을 잡고 “우리 경제적 자립 하자”라며 차돌 같은 목소리를 던졌다. 소원이 담긴 말 한마디가 마음에 담겼을까, 아내의 눈빛이 아침노을 속의 해 같았고 잡힌 손이 따뜻해졌다. 문득 그때의 온기가 어머니의 손길에서 느꼈던 따뜻함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낯설기만 했던 직장과 동네에 살면서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신용이 따라주지 않아 은행 대출이 언감생심이었을 때 높은 이자를 지불하며 사채에 짓눌렸어도 시골집 민들레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담장 위의 민들레 잎에 손이 간다. 그 옛 시절처럼 푸른 잎사귀 끝에서 내 손가락에 전해주는 말이 부드럽다. ‘이제껏 열심히 사셨어요.’ 그건 위로이면서 함께 나누는 인고의 언어였다.
멈칫했던 발길을 마당에서 방으로 돌린다. 죽담을 지나 방문 앞에 섰다. 어머니는 낮잠에 빠져있다. 입에서 ‘쐬액 색’ 바람 소리가 난다. 굽은 허리에 팔베개를 한 채 얼굴은 문 쪽으로 향해 있다. 누군가 기다리다 잠에 드신 것 일까. 들판에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다. 호젓한 집 안에 파리 한 마리만 꿈나라에 떨어진 어머니 머리맡에서 보초를 선 듯 꼼짝 않는다. 싸늘한 바늘이 마음을 찔러온다. 곤한 몸으로 낮잠 든 어머니 몸이 오그라든 호미를 닮았다. 굽은 등, 보초병 노릇을 하는 파리 한 마리, 마당에 놓인 늙은 호미가 이루는 순간의 형상이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마당에서 잡풀을 뽑는 아내의 등을 한참 바라본다. 아내의 뒷모습에 지난날 어머니의 등이 얼비친다. 잘빠진 호미 같던 아내가 어느새 초로의 몸이 되었다. 아내의 시간도 이제 하현달로 넘어가고 있다. 삶이란 우주의 원리대로 돌고 돌며 굽은 등을 가진 또 하나의 호미가 되는 것인가. 니체는 영원회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돌아오니,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피어나고,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진정 모든 것이 부러졌다 다시 이어지는가 보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고 하더니 어머니와 아내는 헛간과 시골집을 함께 지키는가 싶다.
현실은 한 순간도 멎지 않는 흐름의 연속이다. 세상 모든 곳이 흐르고 출렁이고 뒤엉켜도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는 비바람도 잠시 멈춘다. 어머니의 품은 늙은 자식조차 품어주는 둥지이다. 나는 지금 그 둥지 안에서 호미에 고즈넉이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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