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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따라쟁이 / 김영관

에세이향기 2022. 5. 31. 04:08

따라쟁이 / 김영관

 

 

친구들의 모임에서였다. 한 친구가 얼마 전부터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데, 음식을 먹을 때 입가에 묻히거나 흘리는 일이 잦아 가족들의 시선을 받는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도 슬슬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듣던 나는 그가 내 말을 하는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엊그제였다. 손주들이 와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자 아내는 따지듯 말했다. 당신 입은 감각이 없어요. 순간 멍해하는 나에게 집사람은 강펀치를 날렸다.

“식탁에서 애들이 자꾸 당신 얼굴을 살피는 걸 못 느꼈어요.” 그러고 보니 내 옆에 앉은 큰 손녀가 두어 차례 휴지를 건네며 입을 닦으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요즈음 들어 밥을 먹다 음식을 잘 흘리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다 놓아다를 반복하다 아내의 지적에 잠시 잠깐 고민은 했지만 심각성은 몰랐다.

어머니가 산골에서 홀로 지내시다 명절 때 우리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온 가족이 큰 교자상에 마주 앉아 음식을 먹을 때 어머니는 음식을 흘리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음식을 먹다 말고 중간중간 속곳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입언저리를 닦곤 했다. 자연 손주들의 눈이 자주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가끔은 어머님이 미처 입가에 묻은 음식을 닦지 못할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손녀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어머니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일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밥상에 앉기 전 꼭 휴지를 준비했다. 그리곤 밥을 먹다 말고 입언저리를 닦았다. 휴지는 한 장을 사용했다. 처음에 닦을 땐 펴진 휴지였으나 닦을 때마다 한 번씩 휴지를 접었다. 밥을 다 먹을 때쯤에는 휴지는 메추리알이 되어있었다.

나는 생각을 거듭하다 결정했다. 명절 때 손주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땐 식탁에 앉을 자리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나와 어머니만의 상을 별도 준비하기로 했다. 그 후 어머니는 휴지 사용 횟수가 많지 않았다. 왠지 어머니의 밥 먹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당신이 자식 앞이라 부담을 덜 느끼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먼 길 가신지도 십 년이 넘었다. 내 나이가 칠십 중반을 넘어서자 어머니와 똑같은 일로 아내의 지적을 받는 건 물론이고 이젠 자식과 손주들의 곁눈질을 받게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따라쟁이가 되어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머니 행동을 쏙 빼닮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습관에도 DNA가 있는가. 그래서 피는 진하다고 하는 건가’ 마음속 넋두리를 뱉다, 뻔쩍 제정신이 들었다. 나이 들어 후천적인 노력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생활 습관을 애먼 피 탓을 하다니, 스스로를 나무랐다.

노년, 무디어지는 감각을 되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집 식탁에선 어머니처럼 휴지를 준비 자주자주 입가를 닦기로 했다. 외부에서 음식을 먹을 땐 항상 손수건을 무릎 위에 놓고 입가를 훔치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비 내리는 저녁 밥상 앞에서, 어머니 생각에 나는 어리광을 부렸다. ‘어머니 나도 어느새 따라쟁이가 되어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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