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알 약 두 개를 발견했다. 그 약은 남편의 옷장 서랍 속에 숨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그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상자 속의 또 다른 아주 작은 상자 안에 은밀히 감춰져 있었다. 우리 집 약들은 모두 거실 서랍장 안에 있었기에 나는 약에 쓰인 글씨를 자세히 들어다 보았다. 그 유명한 비아그라였다. 순간, 남편을 향한 울컥함이 잠시 비틀대며 뒷걸음질 쳤다. 야릇했다. 이렇듯 청초하고도 평온한 푸른빛의 약이 비아그라였다니. 사춘기 소년의 서랍 속에서 나온 포로노 잡지를 본 엄마의 느낌이랄까, 아니, 처음엔 그저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남편은 두 달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위암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중 갑작히 의식불명이 되어 인공호흡기를 매달고 20일을 헤매다 갔다. 애초에 주치의는 그의 생존 가능 기간을 3개월로 예견하였다. 나는 그 ‘3’이라는 숫자를 놓고 어느 날은 그의 죽음이 3미터 코앞에 와 있는 듯 했고, 또 어떤 날은 30미터 저 멀리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입원 달포 만에, 그것도 절반은 의식도 없이 지내느라 임종을 맞을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숨이 멎고 말았다.
남편이 눈감기 1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와 죽음에 관한 애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 해도 우리 나이 어느덧 예순을 넘겼으니, 이제는 피차 죽을 준비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운을 떼였다. 허나 그날의 대화는 쌍방 소통이 아닌 나만의 독백으로 끝이 났다. 죽음이란 단어를 올리자마자 남편은 웬일로 시큰둥해 하질 않는가. 눈치를 보아가며 다시 애기를 할라치면 그는 성마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가 언제일지 누가 알까만 그런 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된다는 게 남편의 초지일관 주장이었다.
사람이란 정말 한치 앞을 모르는 존재다. 죽음을 예비한답시고 나는 이따금 내 물품들을 정리하기도 했는데 정작 먼저 떠난 건 남편이다. 갑작스런 입원에다 임종까지의 기간도 짧아 남편은 아무런 신변 정리도 하지 못했다. 집안 도처엔 그의 손길과 체취가 스친 흔적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욕심껏 채워 주었던 냉장고의 음식들과 채 읽지 못한 신간들, 그리고 근래에 사들인 신발이며 우화한 곤충 껍질처럼 훌러덩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지금이라도 그가 먹고 입고신고 입을 것처럼 널려 있다. 그 무와 유가 주는 비현실적 느낌을 나는 아직 순연히 박아 드릴 자세가 돼 있질 못하다.
푸른 알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나 모르게 숨겨둔 이 약은 시험 삼아 두 알만 마련한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쓰고 남은 것일까. 남자들은 더러 그런 걸 주고받기도 한다니 말이다. 건장했던 남편은 사십 중후반을 넘기며 폐결핵에 폐기종에 고혈압에 갖가지 병치레를 하였다. 그러면서 예순을 넘겼고 잊을만하면 이런 저런 병세를 드러내며 애를 먹였다. 우린 덤덤히 살았기에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알량한 여편네인 나는 남편의 무기력과 병약함만 걱정했지 그도 욕망을 지닌 엄연한 남자라는 사실을 지나친 것이다. 그래 놓곤 남편쯤은 눈빛만 안다고 엄청난 착각을 하며 살아왔다.
나는 지금 알약을 손에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에 대한 집착이 유난했기에 나는 왠지 남편의 혼백이 아직 내 곁을 떠돌고 있을 것만 같다. 들통난 비밀에 민망해 할까봐 보이지도 않는 그를 향해 짐짓 웃음을 보낸다. 내 마음을 못 읽을까 소리 내어 농도 건넨다.
“당신 나한테 딱 걸렸지? 하지만 걱정 말라구. 놀랍거나 불쾌하진 않았거든. 되레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있지. 근데 말이야, 이 약의 용도가 날 의식한 건 아니었을 것 같네. 그건 육감이자 심증 같은 거지만 뭐, 그래도 상관은 없어.”
비아그라 두 알, 이 작은 알약이 주는 파장이 크다. 오만 상념의 발기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일련의 음습하고 통속적 연상은 새털처럼 날아가는데 한 존재의 가슴에 드리웠을 내밀한 욕망과 외로움의 무게만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색정이란 삶의 본령이자 에너지 같은 것, 그는 꺼져가는 자기 존재를 이 마법의 알약을 통해 되살리고 싶었던 걸까. 비아그라 비아그라, 헌 물건 내줄테니 새 물건 내어 다오. 그런 주문이라도 토하며 자신의 남성상이 아직 살아 있음을 극명하게 확인 받고 싶었던 걸까. 무릇 생명 지닌 존재는 그 생명성으로 이렇듯 애처로운가 보다. 그 욕망의 간절함과 순수함이라니, 대상이 마누라든 몸을 파는 여성이든 무슨 대수랴.
서산에 어둑발이 내리고 있다. 우린 필시 한 지붕 아래의 작은 두 섬이었나보다. 섬 하나는 이제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서산 너머, 자춤거리든 잔광마저 집어삼킨 아득한 몽리의 저 편 세계로 그는 되돌아간 것일까. 남편의 영정 사진을 다시 가슴에 품는다. 명치가 당기듯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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