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깨(耞) / 윤남석
“위잉 탁, 위잉 탁”
세 가닥의 휘추리가 공중제비를 넘더니 콩더미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잔뜩 움츠린 깍지속의 콩알이 메어칠 때마다 바들거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무자비한 휘추리의 두들김에 견디다 못해 타닥거리며 튕겨져 나온다. 도리깨질은 엇박자로 쳐야만 상대방이 내치는 휘추리와 맞닥뜨리지 않는다. 서로 호흡을 맞춰 상대방이 이미 두들긴 곳을 한 번 더 두들겨서 겉여문 콩깍지까지 터지게 한다. 그렇게 상대방이 진행하는 방향을 쫓아 어긋나게 두들기면서 타작마당을 자근자근 돌게 된다.
그 엇박자로 두들겨야 하는 도리깨질을 반 박자씩 애써 늦춰본다.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하시는 도리깨질이 자칫하면 내 도리깨와 맞부딪칠 수 있기에 속도를 조금 늦추며 리듬을 조절한다. 예전에 아버지와 척척 맞장구치던 당찬 도리깨질이 이젠 힘에 부쳐서인지 가쁘게 돌아가는 게 확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행여 어머니께서 눈치 채실까 봐, 표나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다가 그만 휘추리가 뒤엉켜지기도 한다. 어릴 적에 호기심 삼아 커다란 도리깨를 휘두르다 보면, 기름한 작대기 끝에서 팔랑개비같이 뱅그르르 돌아야만 하는데 이렇게 휘추리가 뒤틀려져서 뒤통수를 치기도 했었다. 타작도 못하는 놈이 도리깨만 나무란다는 옛말처럼 도리깨를 휙 내던지면서 씩씩 열을 내던 기억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게 한다.
한바탕 건하게 두들기고 나면, 콩더미를 뒤집어 다시 여무지게 모진 매질을 하고 나서 빈 쭉정이만 남은 콩대를 걷어치운다. 바싹 두드린 콩대를 치운 깔개 깔린 마당에 어머니가 다시 낫으로 매듭지은 콩다발을 풀며 가지런히 널어놓는다. 이렇게 몇 판을 벌여야 콩타작이 끝난다.
도리깨는 마주 보며 두들겨야 흥이 나지만, 어머니의 도리깨질이 아주 버거워 보이기에 이젠 좀 쉬시라며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마루로 억지로 잡아끌었다. 예전에도 어머니가 콩대를 낫으로 끌어 모아 뒤집거나하면 아버지가 후반전을 책임지곤 하셨다. 들마루에 걸터앉아 혼자 콩마당을 두들기는 자식을 바라보는 표정이 흐뭇해 보이지만, 눈빛은 어떤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 듯하다. 내가 두들기는 이 도리깨는 아버지가 쓰시던 것이다. 그 도리깨를 다잡은 자식과 엇박자로 두들겨보지만, 전에 아버지와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추며 두들기던 도리깨질이 절실할 게다. 좀 전에 내가 반 박자를 부러 늦추는 것도 얼추 짐작하셨을 게다. 드러내놓지 않고 당신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는 행동이 자칫 애간장 녹아든 허한 가슴에서 오히려 탄식을 끄집어내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이제껏 견지해온 꼿꼿했던 거벽스러움이 혹여 거슬리지나 않았는지, 그래서 이런 행동이 지난날의 회포에 더 진하게 젖어들게 하는 게 아닌지 못내 찜찜하기만 하다.
시골집에 있는 도리깨장부는 노간주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 노간주나무는 탄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단단하기에 괭이나 쇠스랑 등의 자루로도 많이 쓰이는 편이다. 도리깻열은 질긴 물푸레나무가지가 제일 좋다. 헛간에는 아버지가 쪄놓은 가느다란 물푸레 나뭇가지가 아직도 걸려있다. 휘추리가 부러지거나하면 즉시 도리깻열을 교체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놓으셨던 것이다. 노간주나무로 만든 도리깨장부에서 발하는 반드르르한 윤기에서도 당신의 손때와 감촉이 쉬이 느껴지지만, 헛간에 걸린 희끄무레한 물푸레나무에서도 생전의 찬찬함이 새삼스레 떠올려지기도 한다.
도리깨는 자루인 도리깨장부, 휘추리를 달 수 있게끔 비녀같이 생긴 도리깨꼭지, 서너 개의 휘추리로 구성된 도리깻열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예전에 아버지께서는 도리깨장쇠, 꼭두마리, 도리깨노리로 구분하셨다. 도리깨채를 일컫는 ‘장쇠’는 지게의 장나무에 가로지르는 장쇠처럼 지탱할 수 있게 받쳐주는 작대기를 지칭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꼭두마리’는 끄트머리가 회전시키는 역할을 하는 상모의 꼭지처럼 생긴 데서 이름 붙여진 것 같고, 도리깨아들이라고도 하는 ‘노리’는 채를 휘두를 때마다 뱅글뱅글 놀기 때문에 ‘놀다’란 동사에서 파생되어 붙여진 말이 아닌가 여겨진다. 백과사전에 수록된 장부, 꼭지, 열보다는 장쇠, 꼭두마리, 노리란 명칭에 더 애착이 간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용어이기에 낯익어서 더욱 아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일 게다.
도리깨는 재래식 타작 농구이지만 요즘에도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들깨나 팥, 콩을 많이 심는 농가에서는 탈곡기로 하지만, 먹을거리 정도만 농사짓는 집에서는 어김없이 도리깨를 꺼내어 든다.. 예전에는 집집이 발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철심 박힌 원통이 돌며 ‘웅웅’ 소리를 내던 족답식(足踏式)탈곡기가 한 대씩 있어서 나락이나 보리, 콩을 타작하곤 했는데, 경운기의 동력을 이용한 탈곡기와 뒤이어 나온 콤바인에 밀려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지만 도리깨는 그때나 지금이나 타작 용구로 자리를 지켜왔다. 도리깨를 꺼내어 메마른 휘추리에 물 한 바가지 부어서 두들겨도 부러지지 않고 원활히 돌아갈 수 있게끔 되알지게 손을 본 후, 곡식의 이삭을 두드려 알갱이를 떨게 된다.
도리깨질이 끝나고 콩팔칠팔하던 콩알을 고무래로 그러모았다. 반항기 가득한 콩알들이 깔개 밖에서 까슬까슬한 낯빛으로 노려본다. 수돗가까지 튀어나간 콩알은 빨랫대야에 빠져 자맥질에 겨웠던지 우둥퉁 부어있다. 어머니는 키로 검불 등을 까부는 나비질을 하신다. 어릴 때부터 쓰던 키는 군데군데 기웠고 시멘트 포대로 몇 번이고 덧발랐지만, 어머니의 노련한 까붐질 때문인지 쭉정이를 잘도 걸러낸다. 엇가리에 담겨 옥시글대는 콩알 사이에서 용케 몰방질을 피한 콩바구미들이 제 살길 찾으려고 바쁜 걸음으로 기어 나온다. 키로 까불어도 조그마한 돌이나 굵은 가시랭이는 일일이 손으로 가려내야한다. 멍석 위에 콩을 고르게 널며, 미처 까불리지 않은 쭉정이 등을 샅샅이 발라낸다.
올해는 참깨를 쪄서 길가에 줄가리를 쳐 쟁여놓았지만, 비가 너무 와서 꼬투리가 희뿌옇게 곰피는 바람에 이만저만 희떱게 군 게 아니었다. 게다가 들깨나 콩도 꼬투리가 여물 무렵에 비가 연이어 오는 통에 소출이 눈에 띄게 적은 편이다. 다직해야 작년의 절반을 조금 넘는 분량이다. 그것도 어머니가 물둑에까지 빼곡히 심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에도 억척스레 물둑에 심었기에 올해는 밭에만 심으라고 했는데, 기어코 물둑의 억센 풀들을 모조리 뽑고 오지게 심어서 가꾸었다. 무릎마디가 시원찮아 진통소염제를 흥건히 바르시곤 하던 것을 누차 보아왔거늘, 땡볕에서 물둑의 질긴 풀과 씨름하며 몇 됫박의 콩과 들깨를 더 건지려고 옷깃을 후줄근하게 적셨을 것이다. 자식들 한 줌이라도 더 보태어주려고 심었다지만, 그 몇 줌의 알곡은 어머니의 흉금을 축축이 적시던 땀과 이따금 쑤셔오는 무릎 통증이 여물어 빚어놓은 것은 아닐까 싶다.
멍석에 널어놓은 콩이 가을볕에 삼삼하게 말라간다. 세찬 도리깨질에 으깨어져 두 쪽 난 콩이 간간이 눈에 띈다. 도리깨질도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 두 쪽으로 갈라진 콩짜개 하나라도 소중해 보인다. 아마 콩 반쪽에도 뻐근하리만치 가슴 저려오게 하는 당신의 가없는 다독거림이 배어있기 때문일까.
보드레한 감촉의 볕기가 새콤새콤 익혀내는 가을마당에 금높은 진주알의 매끄러운 기운이 더없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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