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집 김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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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을 들어서자 아버지는 도리깨질이 한창이다. 어여차, 휘모리장단으로 타작마당을 내리친다. 앞산 뒷산을 쩌렁쩌렁 울린다. 토실한 올콩들이 사방으로 콩콩 튄다. 작은 솟을대문을 열자 오래된 종마루와 쌀뒤주가 보인다. 늙은 쥐들이 뒤란으로 달아난다. 천장엔 세월의 더께에 그을린 묵은 홍어가 매달려있다. 아버지의 바람기를 막으려는 어머니의 주술이 통했을까? 아니라는 듯 홍어가 바람에 꼬리를 살랑댄다. 가마솥엔 보리밥 한 그릇이 따끈하게 데워져있다. 부뚜막에 앉아서 허기를 채우고 어머니 옆에 가만히 눕는다. 얼마만일까. 어머니의 숨소리가 꿈결처럼 아늑하다. 꿈일까? 봉창에 비친 달빛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왔다. 지붕을 타고 오르던 만삭의 박이 달빛에 처연하다. 만곡선으로 이어진 초가 위로 한 망태기의 별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정녕 꿈일까? 멀리 도릿대를 돌아가는 기적소리에 그만 오래된 집 한 채가 폭삭 무너져 내린다.
세상에 그런 집은 없다. 나는 지금 허물어져가는 옛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유년의 태가 묻힌 마당을 서성이며 그저 사라져간 먼 시간의 얼레를 자늑자늑 당기고 있을 뿐이다. 어느 왕조의 유적지도 아니건만 흙 한 줌 질그릇 한 조각에도 애틋한 시선이 머문다. 모든 것이 떠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토담은 무너지고 감나무는 베어졌다. 솟을대문도 초가지붕도 옛 동무도 사라졌다. 무너진 텃밭엔 누군가 심어 놓은 청무만이 쇠잔한 가을을 지키고 있다. 우물가엔 이끼 낀 전설만이 새파랗게 눈 뜨고 있다.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휘감고 도는 바람만이 옛 소년의 쓸쓸한 귀가를 반기는 듯하다. 절실함은 가장 늦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늦었다 싶을 땐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이다. 그립고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과거에 있다. 그래서 과거로 가는 길은 퇴행성관절염처럼 저리고 아프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무치는 것이 집이다. 집은 세상의 모든 그리움의 원형질이 간직된 곳이다. '집'이라는 글자를 조음하는 순간 눈 까만 아이들이 오 오르르 모여든다. 아랫입술이 달작지근해지고 어느새 마음 한 자락이 따뜻해져 온다. 탈곡기 몽당비 시렁의 호박 신줏단지 거미줄까지 어느 것 하나 그립고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옛날 가난만 풍구질하던 먼먼 산촌의 누옥이었지만 집안은 언제나 보름달처럼 꽉 찼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또 모든 것이 풍족했다. 어머니의 젖줄을 물고 아이들이 박꽃처럼 순하게 자라나던 곳, 아버지의 투전놀이에 어머니의 잔소리가 늙어가던 곳, 보리누름 넘실대는 산등성에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누이와 보리피리를 불던 곳,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숯 검댕이 얼굴로 돌아가던 곳, "이놈아 까마귀가 할배요 하것다."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코 묻은 떼를 씻어 내던 곳이 집이다.
어느 땐가 모두들 집을 떠났다. 패랭이 꽃 같은 아이들이 가난에 떠밀려 쭉 뻗은 길을 따라 상경열차를 탔다. 쭉 뻗은 길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출구이자 출셋길이다. 성공해서 돌아오겠노라는 맹세를 어머니의 물 묻은 손에 새겨 두고 나 또한 70년대의 마지막 기차를 탔다. 그러나 성공은 좀체 잡히지 않는 신기루였다. 도시의 삶이란 비정하기 마련이다. 삶의 돌부리에 걸려 자주 넘어졌다. 그럴 때면 도시의 쪽방에 누워 고향을 생각했다. "야야 밥 묵어라!"는 어머니의 음성이 경전처럼 들리던, 그 정겨운 집을 생각하며 상한 마음을 쓸기도 했다. 그렇게 지치고 외로울 때면 생각나던 곳이 집이다.
달캉거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은 포근했다. 산마루에 오르면 꾸부정한 사랫길을 따라 눈이 먼저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따끈한 아랫목에 앉으면 나는 금세 아이처럼 순해진다. 어머니가 끓여준 호박죽을 배불리 먹고 봉창 달이 이울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버지의 비질 소리에 눈을 떴다가도 집이라는 안도감에 다시 곤한 아침잠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집에서의 하룻밤으로 세상살이 다친 상처를 씻기도 하고 모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어쩌면 그 시절 집은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나만의 성소聖所였는지도 모른다.
집은 누군가의 기다림이 소진되던 공간이기도 했다. 사는 동안 귀향열차를 몇 번이나 탔던가. 자식을 기다리며 어머니는 또 집 앞 동구 밖을 몇 번이나 서성거렸을까? 언제나 다음다음이란 말로 훗날을 기약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이 클수록 움켜쥐어야할 양은 많아졌다. 자연히 다음이란 구실도 잦아졌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도 멀어졌다. 너무 멀리 왔고 더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집이 보였다. 훗날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이 소진된 자리는 쓸쓸했다. 집은 무너지고 어머니는 떠났다. 내 그리움의 발원지가 사라진 것이다. 쇠락한 폐지를 서성이며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매순간 욕망을 부풀리며 쫒긴 세월, 뒤늦은 후회가 갈바람에 바스락거린다. 다음이란 말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다. '훗날'은 미쳐 어머니까지 예매해 두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던 어머니와의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너무 늦은 귀가였다.
지명知命의 언덕에 앉아서 옛집을 생각한다. 아슴아슴 마음의 촉지도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의 집은 밥풀 꽃 하얗게 피어있는 산비탈로 간다. 구비치는 강섶으로 가고 둥근 박 둥근 달빛으로 간다. 박꽃 같은 누이들이 자라던 뒤란으로 가고 순정한 첫 마음을 만나러 가는, 그 먼 기억모퉁이에 나의 옛집이 있다. 사는 동안 누구나 길을 떠난다. 꿈을 안고 출셋길을 떠나고 배움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종국에는 집으로 돌아간다. 오동나무 저녁연기 피어오르던 옛집으로 돌아간다. 집은 삶의 근원이자 모태(母胎)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그리움이 저장된 마음의 곳간이기 때문이다.
앞산 무덤이 가을볕에 봉긋하게 부풀어 올랐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둥근 집 한 칸을 마련했다. 영원한 안식의 집에 드신 것이다. 가을 나이가 되어서야 나도 온전한 집 한 칸을 마련한다. 번잡함도 욕망도 가라앉은 내 마음의 공지에 늦게나마 빈 집 한 채를 들인다. 삶이 팍팍할 때마다 나는 이 집을 자주 들여다 볼 것이다. 사방에 어둑발이 내린다. 산 꿩 울음마저 그친 폐촌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어둠이 길을 닫기 전에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한다. 비록 삭막한 도회지이지만 지금은 내가 아이들의 집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