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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이삭꽃 / 허문정

에세이향기 2022. 8. 1. 03:45

이삭꽃 / 허문정

 

 

연세가 많으신 분의 등을 밀어 드렸다. 흘깃 가슴팍을 보니 돌보지 않은 무덤처럼 젖가슴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건포도 같은 젖꼭지는 생의 꼬투리인 양 맺혀 있다. 긴 여정의 마침표 같기도 하고 욕망의 마지막 징표로도 보였다. 고개 숙인 이삭 같은 모습에서 순간 꽃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게 바로‘이삭 꽃*’이구나!

잘 영근 이삭은 생의 마무리이자 눈부신 완성이다. 그 자체로 풍요이며 만족이다. 완숙한 몸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며, 새봄에 싹을 틔울 희망의 기다림이다. 하지만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여인네의 젖꼭지는 완숙의 느낌을 넘어 처연함으로 다가온다. 떨어져 거름이 되기 위한 무표정한 순종, 그 비움이 쓸쓸하게 느껴져 삼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처럼 고귀한 꽃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살아온 날에 대해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어린 날,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서 벼이삭을 주워보았다. 그때 벼이삭에서 싹이 튼 것을 보았다. 가을이지만 한 번 더 싹을 틔워 결실을 보여줄 심산이었을까. 임종하는 자리에서 입만 달싹거리는 사람처럼 벼이삭이 틔운 싹은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벼이삭이 보여준 새싹은 자기 존재의 마지막 확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난蘭도 너무 보대끼면 본능을 다하여 꽃을 피운다고 한다. 자기의 소진에 대한 절박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병이 깊어진 뒤였다. 희던 젖가슴이 바위처럼 변하더니 생을 무겁게 눌러 버렸다. 염을 하며 어머니의 몸을 보았다. ‘우리 엄마 참으로 곱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주검을 두고 곱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만 어머니는 정말 고왔다. 여자의 몸은 무조건 가리라고만 하시던 어머니, 생전의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속 몸은 젖가슴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젖을 먹일 때면 과장 없이 젖통이 아기 머리만이나 했다. 젖이 줄줄 흘러나와 수건을 받쳐놓기도 하던 어머니의 가슴은 이때가 아마 가장 환하던 시기였다.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그림을 보면 젊은 여인이 늙은 남자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언뜻 보면 외설적 표현에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 사이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연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은 여자가 딸 페로이고 늙은 남자는 아버지 키몬이다. 사형수 아버지는 감옥에 갇혀있다. 처형되는 날까지 음식물 반입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굶주리며 죽어가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딸은 몰래 감방에 들어 젖을 먹이는 것이다. 효를 다 하는 그녀의 안간힘이 영락없는 한국판 심청전이다.

이처럼 어린아이를 기르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여자의 젖은 거룩한 생명수다. 가슴에 고인 흰 젖으로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윤택한 젖을 지닌 여인은 그 자체로 성체이며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다.

삶이 재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머니의 젖이 흘러넘치던 그 시절로 돌리겠다. 한 쪽 젖은 물고 한 쪽 젖은 두 손으로 감싸 안아 생애 최고의 식사를 만끽하고 싶다.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 속에 내 눈 쏙 집어넣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젖가슴이 아프지 않은 그 환하던 시절로 어머니를 돌려드리고 싶다. 청상과부의 외동딸로 자라 홀시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집 맏며느리였고, 결혼할 당시의 남편은 철부지 고등학생이었으니 마음속 응어리가 얼마나 깊었을까. 속 시원히 울어보지 못한 어머니가 우리에게 젖을 먹이던 순간만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애써 ‘이삭 꽃’이라 의미를 부여하며 나이 든 여인의 젖꼭지를 바라보는 내 눈이 시리다. “자네 피부색이 참 곱네!”하시며 자신의 젊은 날은 한사코 아끼시는 그 말속에 상념과 연민이 스민 듯해 등을 미는 두 손에 정성을 다했다. 기름기라고는 없는 살가죽은 살살 밀어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다. 생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헌신하신 그분 앞에 두둑한 내 뱃살이 송구스러웠다. 자신의 몫을 성실히 살아내고 몸 가벼워진 당신의 마른 젖꼭지가 유난히 아름다웠다.

머잖은 날에 내 가슴에도 초겨울의 스산함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날을 쓸쓸해하거나 회한에 젖지 않겠다. 아니 마른 젖꼭지를 ‘이삭 꽃’이라 당당히 내밀어 보이며 자랑스러워하겠다.

내가 이름 짓고 내가 피워 올린 생애의 가장 아름답고 귀한 꽃,‘ 이삭 꽃’을!

* 이삭 꽃 - 명사, 식물‘수상화’와는 별개로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가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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