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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바람의 말씀/윤경화

에세이향기 2024. 3. 31. 01:16

바람의 말씀 




                                                                                                              윤경화




곡풍이 장딴지에 힘을 주며 박차고 올라올 때면 나는 긴장한다. 산기슭에 있는 제비집 같은 내 거처가 난장판이 되기 때문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물물이 한 번씩 지나가는 바람 중에 유독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녀석의 횡포가 심하다.


어쩌다 잊어버리고 장독 위에 돌을 얹지 않은 날이면 뚜껑은 비행접시가 되어 날고 만다. 거기에다 미처 구름이 재를 넘지 못할 때는 비까지 쏟아진다. 초가을에 마른 바람이 간간이 불고 볕이 좋은 때 장독 속을 말리려다 기습을 당하면 장을 마저 먹을 때까지 마음이 불편하다.


산기슭에 있는 내 거처에는 바람이란 바람은 죄다 지나간다. 산꼭대기에서 바람이 내리칠 때는 채전이나 뜰은 가랑잎의 정거장이 된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낙엽들은 그들의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유난히 상처가 많은 잎사귀에 마음이 가고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 사계절 내내 바람의 등쌀에 내 삶이 더 번잡스러운 듯도 하지만 이처럼 새로운 사색의 뜰이 마련되는 것은 선물이다. 이런 순간을 나는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낙엽을 긁어 퇴비장에 모아 놓는다. 이 일은 꽤 의미 있는 일인 듯싶다. 이들은 봄이 올 때까지 바람의 말씀을 되새기며 구수한 냄새와 함께 묵상에 들었다가 텃밭을 나와 한 말씀을 올린다. 상추와 얼갈이배추, 열무로 우리의 밥상에 올라앉아 법문을 하듯이 ‘네가 한 입 베어 문 상추쌈이 집 뒤에 있는 문복산의 한꼭 귀퉁이여.’라고.


‘문복산의 한쪽 귀퉁이’가 무엇인가. 우주의 한 조각이 아닌가. 이는 삶의 경서로 마음의 눈을 뜨면 어느 곳에도 세상의 이치가 담겨 있다는 말씀이다. 살이의 갈피갈피에 포개진 바람이 전하는 말씀이 얼마나 많았을까. 책상에서 늙어버린 읽지 못한 고전을 뽐아 든 듯 늦은 깨달음에 안타까움이 인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주지 않음에 상그러웠던 마음을 밤송이처럼 안고 살아온 시간들이 부끄럽다. 남편의 조기 퇴직 이후 가족이 걸어온 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람이 지나가는 외길이었다. 오직 한길만 아는 대장장이의 망치처럼 쉴 새 없이 바람은 우리를 두들기며 지나갔다. 골바람이나 산바람이 휘몰아칠 때는 풀처럼 허리를 깊게 꺾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상처가 나면 쓰다듬고 움켜쥔 채.


남편과 나는 소비자의 입장만 훈련이 되었던 사람이라 장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순한 바람도 감당하기 버거운 광풍이 될 때도 있었다. 손님은 매우 까다로운 철학서와 같았다. 어떤 학설이나 이론도 학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이 되듯이 서비스도 그와 같아 융통성 없는 우리의 사업일기는 맑은 날이 없었다. 늘 초보 운전자처럼 바쁘기만 했지, 주변의 사정이나 흐름을 짚어나갈 마음의 여유를 감히 내지 못했다. 여차하면 장독 뚜껑이 날아갈 판이지만 바람의 말씀을 살필 수가 없었다.


사업을 위한 수업료는 지독하게 비쌌다. 정말 장독 뚜껑이 날아갔다. 집이 날아가고 아이 공부방도 날아갔다. 허리를 깊이 꺾이게 하는 골짜기의 바람이 무서운 기세로 밀고 올라왔던 것이다. 산바람도 허섭스레기만 잔뜩 남기고 지나갔다.
날뛰던 바람이 조용해졌다. 거친 바람이 지나간 뒤의 고요함 속은 텅 비어 있었고 그곳엔 세상의 실핏줄이 드러나 있었다. 그 빛깔은 맑고 연한 녹색이었다. 싱그러운 생명력을 담은 바람의 말씀이었다. 우연히 시장의 거리에서 만난 검소하고 편해 보이는 젊은 사람이 나에게 바람의 말씀처럼 다가왔다. 청년은 우리의 비어 있는 뜰에 심을 씨앗을 주었다. 그의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을 외상으로 주었다. 찬찬히 천천히 정성스럽게 돌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나에게 없는 것을 얻었다.


스스로 낮아지니 바람이 두고 간 교본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가 구하는 것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가냘픈 개양귀비꽃이 돌풍에 제 몸을 주고 씨방이 빵빵하도록 씨앗을 키우는 것도 보였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 수천수만 송이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일상 속에서 나의 힘으로 무엇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천천히 뿌리를 내리는 일이며 용기가 생기는 일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속옷이 젖도록 땀을 흘리는 사이, 나의 겉과 속이 여물어가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미열과 현기증이 사라졌다. 아이를 위해 빛깔 고운 꽃잎도 주저함 없이 내주었다. 강한 부모가 되었다.


바람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코피가 쏟아지도록 거꾸러뜨릴 때도 있었지만 몸과 마음의 구석구석에 그의 움막을 짓고 들락거리며 나를 키우고 단련시켰다. 그동안 나도 바람의 말씀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매사에 맞설 일이 아니라 흐름에 맡기며 다른 존재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은 주변과 나를 복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창가에 앉아 바람의 아랫도리에 서는 근육을 본다. 아직도 그의 위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말씀은 조금 읽을 수 있다. 배수구를 말끔히 비워 주고 웃자란 나뭇가지도 알맞게 쳐주며 길을 열어준다. 비가 실린 바람이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답지 않지만 바람의 말씀을 듣고 내가 마련한 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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