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이 집을 어찌해야 하나/홍혜랑

에세이향기 2024. 3. 31. 09:58

이 집을 어찌해야 하나/홍혜랑

 

 

 

 

 

 

 

 결혼식을 마치고 폐백 드리러 시댁을 들어설 때, 새색시의 눈에 들어온 첫 인상印像은 한옥의 전통 기와지붕이었다. 60여 년 전 대관령 기슭 송림 사이로 보이던 전경前景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다. 노인이 된 새색시의 가슴에 아직도 선연한 그 기와지붕이 요즘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시댁의 택호는 과수원집이었다. 남편이 태어나던 해 시부는 농지를 갈아엎고 과수를 심었다. 쌀농사로는 아들을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 공부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30년 후 외아들은 가정을 이룬 후 다음 해 홀로 유럽으로 떠났고, 며느리는 백일이 채 안 된 갓난쟁이를 품에 안고 시댁으로 향했다. 12시간 걸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기차 여행이었다. 지금은 KTX로 2시간도 안 걸리는 주행길이다. 세월의 무상함이 이에서 더할 수 있을까. 열차 안에서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동백아가씨’는 아이를 품에 안은 열차 안의 내 모습을 어김없이 불러온다.

 

 동틀 무렵 청량리역을 출발한 기차는 동해 바다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해서야 종착역에 닿는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긴 여행이지만, 열차 안에서 유행가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할 새로운 환경으로 진입하는 시간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소위 최고학부를 나온 농촌의 며느리이고 보면 집성촌 문화가 아니었다 해도 남다른 주목을 받을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시부모님의 극진한 배려로 나의 행동반경은 집 마당 밖을 넘지 않았다. 부엌 밥솥에 불을 때고 있으면 동네 친척 어른들이 지켜보며 서울에서 공부한 새댁이 불을 잘 땐다고 대견해했다. 사랑방 쇠여물 솥에 불을 땔 때는 다행히 나 홀로였다. 활활 타는 가랑잎 불빛 앞에서 탈출의 집념을 불태웠다. 외국어 회화책을 한복 치마 허리춤에 숨기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 행선지는 딱히 유럽이 아니라 우주의 어디라도 좋았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타고난 실향 병은 학창 시절이 끝나고 어른이 되어도 치유되지 않았다. 첫돌 된 어린 것을 부모님이 맡으시기로 하고 며느리의 출국이 결정되었다. 떠날 날이 다가왔다. 어른들 말씀이 먹이던 젖을 미리 끊어야 한다고 했다. 양쪽 젖통이 땡땡하게 성이 나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 품에서 평화롭게 젖을 빨던 어린 생명에게 갑자기 양식을 끊어 버리 는 행위가 젖몸살보다 더 감내하기 힘든 아픔이어야 했거늘, 떠남을 욕망하는 맹목적 에너지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이유식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어린 것의 양식 걱정은 부모님의 몫이었다. 시부께서는 남편이 태어나던 해 과수를 심어 자식 교육 하나에 인생을 바쳤고, 나는 돌 지난 어린 것을 떼어놓고 미지의 세상으로 탈출하려는 역마병을 앓고 있었다. 같은 지붕 밑에서 일어났던 한 가족의 판이한 삶이 시대의 간극에서 왔다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첫돌부터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애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엄마의 빈 자리를 애써 외면했겠지만, 외면한다고 보이지 않을 자리가 아니었다. 할머니와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가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면 “엄마가 저 비행기 타고 오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문열 작가가 남북 분단의 아픔으로 헤어진 아버지를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나에게 아버지는 핏줄이 아니라 하나의 추상”이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내 딸에게도 기억에 없는 엄마 아빠는 이미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 추상이었을 것이다. 6년 후 수유동 집에서 아이는 난생처음으로 아빠를 상면했고, 비로소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었다. 짧지 않은 세월, 분리의 통증을 안고 살던 이산가족이 한 지붕 밑에 사는 것 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거늘, 불혹을 넘은 나이에 엄마는 불쑥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젖몸살을 앓으며 저를 떼어놓았던 엄마는 ‘추상’이었지만, 학생으로 돌아간 엄마의 빈 자리는 삶 속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는 마르셀의 인생론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외며느리의 빈자리도 그랬다. 조상님 제사, 부모님 생신 등 고향집 행사가 공교롭게 시험 기간과 겹칠 때 난감했다. 홀로 고향집으로 향하는 남편이 부모님께 얼마나 민망할지 눈에 선했다. 관습에 순종하지도 못하고 관습을 외면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삶이었다. 돌이켜 보면 긴긴 세월의 엉거주춤은 떠나지도 못하고 머물지도 못하는 자기탈출 욕구의 무망한 몸짓이자, 행선지 없는 집시의 제자리걸음이었다. 

 

 탈주의 그림자도, 귀향의 그림자도 멈춰 선 식영息影의 뜰 귀향은 고향을 가진 사람의 축복이다. 학창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살던 남편은 정년퇴임 후 드디어 낙향의 꿈을 이루었다. 자신의 어릴 적 꿈이 켜켜이 고여 있는 고향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를 평생 괴롭히던 지병도 고향의 품속에서 호전될 것이라는 소망과 함께 서울  의 서재도 통째로 옮겼다. 낙향 후 고향집에서 살던 10여 년이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누구에게도 특혜가 없었다. 그는 다시 서울의 아파트로 주거를 옮겨야 했다. 무엇보다 의료 기관의 접근성을 따라야 했다. 고향의 한옥은 빈집이 되었고, 어쩌 다 한번 들러보면 세포를 가진 생명체의 생로병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쇠락해 갔다. 모든 피조물은 무상하다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속도를 앞지르는 변화의 속도가 당혹스러웠다. 남편의 건강이 고향에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도 허락되지 않으면서 고향집은 점점 외로움 속에 남겨졌다.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한 사랑채 기와지붕이 근심의 시작이었다. 고택을 다루는 전문가도 더 이상 임기적 대증요법으로는 누수를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는 집이다. 기와뿐이 아니다. 사랑채 뒤뜰의 오죽림烏竹林은 담 밑으로 뿌리를 뻗어 안채 뒤꼍 장독대 주위에 대나무 정글을 이루었다. 관리되지 않는 오죽은 아카시아나 다름없는 볼품없는 나무가 되어 버리는구나. 큰일 때마다 집안 어른들의 일손이 분주하던 과방과 겨울을 지나 봄까지도 김장김치를 묻어 알맞게 보관했던 김치광의 지붕이 주저앉더니 황토 벽돌마저 무너져 내렸다. 만신창이 앞에 망연자실이다.

 

 시나브로가 아니라 덜컥덜컥 소리 내며 소멸하고 있는 이 집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인기척 없는 안마당 뜨락에 서니, 되돌릴 수 없는 삶의 그림자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그림자를 어찌 멈 추라 하겠는가. 식영息影의 세계는 지상에도, 내세에도 있을 리 없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인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인도 인생을 낭비한 죄인과 다를 바 없는 ‘게으른 종’이다. 사 람이 살지 않는 집이 빠르게 망가진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왜 그 런지 ‘합리적’ 이유를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신학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아기를 엄마든, 타인이든 아무도 안아 주지 않으면 머지않아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했다. 집도 사람의 온기로 생명을 이어간다는 진실을, 만들어진 전설쯤으로 생각하고 귀담아듣지 않았다. 고향집의 안위를 돌보며 오르내릴 여유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집이 저 지경 되기까지 나는 아기를 안아 주지 않은 둔감한 엄마였던 것이다.

 

 약관에 고향집을 떠난 남편이 평생 ‘지상의 나그네’라는 인생의 유한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 고향집은 그에게 영원 그 자체였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탈주의 열병을 앓던 천형의 실향민도 내색 없이 한 지붕 밑에 품어 주던 고향집이다. 아이들 4남매에겐 엄마의 바람 빠진 사랑을 채울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낙원 이었다.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만큼 슬플 때는 없다고 했다.

 

 이제 탈주의 그림자도, 귀향의 그림자도 쉬고 있는 식영息影의 뜰에는 고향 집을 지켜보는 노송들의 그림자만 청청하다. 바둑판 위에서 이세돌을 주눅들게 한 인공지능보다 더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것은 운명 앞에 겁먹었을 때의 어둠이다. 쇠락을 어찌 운명이라고 하겠는가. 이미 생명의 창조 때에 예정된 섭리인 것을.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두려워하고 슬퍼하는가?” 세네카의 일갈이 섬광처럼 내 영혼의 어둠을 가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여자, 실명 윤예선/이난호  (1) 2024.03.31
가랑잎처럼/허세욱  (1) 2024.03.31
클라고/윤기정  (1) 2024.03.31
바람의 말씀/윤경화  (1) 2024.03.31
국물/신달자  (0)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