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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찾아서

에세이향기 2021. 7. 30. 14:22

월간 <시사문단> 2021. 7월호 평론 부문 당선작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찾아서

마경덕 시인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신원석 (시인. 평론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집과 직장에서, 학교. 때론 커피숍이나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스물네 시간을 보낸다. 적어도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기상(起床)과 동시에 우리들에게는 또 다른 하루치의 세상이 주어진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최초의 사건들이 또 하루치만큼 줄지어 달려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생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지금껏 우리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내일이 버젓이 살아 있지만, 우리는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깊이 회의한다. ‘지겹다’는 푸념이 공식처럼 따라붙는 것도 다반사. 이런 반복적 일상 속에서 우리들은 그저 ‘깨어진 뱃조각’이나 다름이 없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 널브러진 채, 어디론가 막연히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우리 생의 하루치를 짊어지고 어디론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시인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망망대해 위를 흐르는 시간을 불러 세우고 다짜고짜 말을 거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와 똑같이 세상 속을 부유하면서도, 더없이 막막한 세상의 깊이를 재고, 침몰하지 않기 위해 알맞은 부력을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그것들을 우리 앞에 힘겹게 부려놓는 여린 손길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슬픈 손길에는 우리의 마음을 쓸며 지나는 무게가 있다. 그 무게만큼 우리의 마음에는 빛이 들고, 그 빛의 존재가 바로 시인은 존재이며, 존재 의미일 것이다.

마경덕 시인에게 시 쓰기란 생과 맞닿아 있는 사물들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다가가서는 한참을 응시하며 사물에게 말들을 건넨다. 시인과 눈 맞춤을 한 사물들은 제 안에 가두어 두었던 시간을 무장 해제하고, 다시 현재의 시간 속으로 흘려 보낸다. 지금은 형체마저 희미해졌을 존재자들이 다시 두 팔과 두 다리를 저으며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숨바꼭질을 잘하는 술래처럼, 여기저기 숨어 있는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여지없이 감지해 낸다. 제 몸을 들킨 존재자들은 자책할 시간도 없이 마법에 걸린 듯 줄지어 걸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마경덕 시인은 술래가 되어 독자를 대신해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찾아 헤맨다. 우리는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동안 시인이 건져 올린 시어들을 딛고 존재자가 숨어 있음 직한 곳을 찾아 함께 떠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휘감은 채 흘러가고 있는 현재의 바다에서 이미 흘러가 버렸거나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간의 낯선 역류를, 우리는 이미 익숙한 듯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어들을 이정표처럼 세워 두고, 우리를 안내한다. 그렇게 이정표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닷속에 침몰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적절한 삶의 부력’을, 시인이 이미 우리 발밑에 부려두고 떠났음을.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신발論」 전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는 일어난 일, 즉 특수를 이야기하고 시는 일어날 듯한 일, 즉 보편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시가 역사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시를 ‘특수’를 통해 ‘보편’을 이야기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것’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경덕 시인은 시인만의 감식안(鑑識眼)과 직관력으로 웅크리고 숨어 있는 보편자를 찾아 우리의 감각적인 체계의 틀 안에서 활짝 펼쳐 보인다.

일기처럼 시작되는 이 시는, 단순히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리’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시인은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며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존재자들을 불러 모으는 시인의 작업들은 주로 일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이 아픈 고백은 일상 속에 가려져 있던 이면을 들추어내고, 우리를 ‘신발’의 존재자가 있는 세계로 이끈다.

쇼핑몰이나 시장, 혹은 길거리나 백화점에서 골라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십 년을 끌고 다니면 그만인 신발. 바쁜 출근길에는 뒤축을 구겨 신기도 하지만, 가끔 풀린 끈이나 묶어주고 세탁기에 넣어 빨거나, 구둣솔로 몇 번 닦아 주면 그만일 이 신발을, 시인은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였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주객전도의 발상을 통해 시인은 시간을 불러 세우고, 지나온 삶을 응시한다. 열심히 달려왔으나, 한 번도 스스로 달려온 적이 없는 수동적인 삶을 더는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떠나간 배들을 기억하면서 시인은 다시 생의 부레에 힘껏 공기를 불어 넣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 쓰기는 이렇듯 생에 매몰되지 않고자 하는 치열한 의식이며, ‘적절한 삶의 부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차에 태우고 안전밸트를 매어 주네.

낯익은 사내 웃으면서 손수 시동을 걸어주네. 참 친절도 해라.

죽음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니! 순간 끔찍한 공포를 잊고 말았네.

다녀올게요. 무사히 잘 다녀올게요.

옆자리엔 임신 중인 아내와 뒷좌석엔 어린 아들놈이 타고 있었네.

문을 닫으며 사내가 또 웃었네. 무사할 거야. 별 일 아니야.

그 인자한 눈이 그렇게 말했네. 나는 널 낳은 아비야. 너에게 팔과 다리를 준 아비야.

자그마치 네 몸값이 얼만지 아니?

그래요. 억대가 넘는 몸값을 알아요. 복제인간을 만드신 위대한 아버지.

내 가족의 갈비뼈는 아버지의 것과 비슷해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 한 대를 위해 일가족을 거느린 아버지.

이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요.

도무지 방어防禦를 모르는 제 이름은 더미*거든요.

아, 아버지 아무 걱정 마세요…….

이제 액셀을 밟고 벽을 향해 달려가면 되나요?

 

*더미(dummy)

센서가 달린 실험용 인형, 각종 자동차 충돌시험에서 운전자 대신 가상의 사고를 당한 뒤 예상 상해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함. 자동차 한 대를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더미가 쓰러진다고 함

―「더미 가족」 전문

 

우리는 어떻게 시 속에 숨어 있는 존재자들을 만나게 될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언뜻언뜻 던져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구성된 시인의 이정표들 덕분이다. (이 세상에 알 수 없는 시어들을 늘어놓고 길을 잃게 만드는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로부터 영영 독자들의 손을 놓치고 미아가 된 시집들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마경덕 시인이 독자들에게 다리를 놓는 방식은, 이미지와 대화로 이루어진 장면과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응축과 긴장, 때로는 그 사이를 뚫고 나오는 반어와 냉소에 있다. 그러한 이정표들을 잘 따라가면, 독자들 누구나 훌륭한 술래가 되어, 여기저기 숨어 있던 존재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더미’인 ‘남자’ 즉 더미가족의 가장이다. ‘도무지 방어防禦를 모르는’, ‘억대가 넘는 몸값’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남자는 ‘복제인간을 만드신 위대한 아버지.’를 위해, ‘끔찍한 공포’를 잊고, ‘여유’롭게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유언처럼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이제 액셀을 밟고 벽을 향해 달려가면 되나요?’. 이 당찬 물음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파고든다면, 당신은 이정표를 따라 시인이 안내한 목적지까지 성공적으로 도달한 것이다.

 

 

움푹 파인 발자국이 골목을 걸어간다. 막 포장을 끝낸 질척한 골목을 오래전에 지나간, 발을 잃어버린 발자국. 딱딱한 콘크리트 발자국이 쉬지 않고 골목을 걸어간다. 구두가 운동화를 껴안고 큰 발이 작은 발을 업고 박성희 미용실, 월풀 빨래방, 현대 슈퍼를 돌아 나간다. 사라진 발을 기억하는 발자국들. 빈 발자국을 따라갔다. 어느 날, 찾아온 사랑은 나를 딛고 가버렸다. 버거운 영혼이 가벼운 영혼을 밟고 저벅저벅 앞만 보고 걸어가 버렸다.

 

누군가 길에 마음을 빠뜨리고 한참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골목은 발자국 흉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골목을 건너갔다」 전문

 

보들레르는 산문적인 시를 두고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의식의 아픔에 대해서 부드럽게 또 강직하게 적응하는 기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보들레르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시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유기적 결합은 좋은 시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 시의 산문적 형식은 '발'과 '발자국', '골목'과 '길'이라는 연속성과 질 맞아떨어진다. 줄글로 이어 쓴 행간 위에 발들이 놓여 있고, 죽 늘어선 시어들은 골목이 되고 길이 되어 준다. 이 시에서 ‘산문적’인 것들은 끝나지 않는 기다림,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흉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찍힌 시간의 발자국을 환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과거와 현재 속을 오가고 있을 발들이 머릿속에 단단한 발자국을 남기며 저벅저벅 지나다니고 있는 것만 같다.

자 그럼 이제 발자국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차례이다. 요즘은 대부분 아스팔트로 길을 포장하지만, 예전에는 시멘트로 대충 바른 길들이 많았다.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붉은 노끈으로 울타리를 쳐 놓기도 했었다, 개구쟁이 녀석들이 일부러 시멘트 길 위에 제 발 도장을 찍으며 킥킥거리거나, 가끔은 강아지나 고양이 등이 지나간 발자국이 화석처럼 남아 있기도 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몇 년 몇 월 며칠에 누가 썼다거나 하는 낙서들이 새겨진 곳도 많았다. ‘골목’은 어느 새 찾아보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는 ‘골목’에 관련된 기억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돗자리 위에서 몸을 말리며 누워 있던 붉은 고추들의 뒤척임, 가난한 집집마다 새어나오던,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한숨 소리 같은 것들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평면이라 인식되는 길은 이처럼 마르지 않은 시멘트 바닥 위를 걸었던 발자국들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길은 이제 더 이상 이차원의 형상이 아니다. 발자국과 함께하는 길은 시간으로 전환되고, 그 시간의 기억들은 다시 삼차원의 영상이 되어 우리의 머릿속을 떠돈다. ‘움푹 파인 발자국’들은 ‘발을 기억’한다. ‘마음을 빠뜨리고 한참을 찾으러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오늘도 ‘발자국’은 잃어버린 발을 기억하며 또 하루를 살아내는 중일 것이다. ‘흉터’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몸 안에 들인 흔적. 마음속에 깊은 누군가를 들여본 적이 있는 시인은, 지금 이 순간 ‘흉터를 가’진 어느 ‘골목’을 기약 없이 걷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 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묶는다.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허공에서 한 생애가 타버릴, 무채색의 가벼운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날아라 풍선」 전문

 

‘감춤’으로써 오히려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인 ‘알레고리(Allegory)’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의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egoria)’를 어원으로 한다. 이러한 방식은 시인이 독자들에게 숨겨진 존재자들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식의 일종이다. 시 속 알레고리는 시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특정한 부류의 집합으로 양분하고, 양극단의 한가운데에 서서 팽팽한 시적 긴장감과 균형을 유지하는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 시에서 ‘풍선’은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가’는 ‘새’로 변주된다. ‘순식간에 자루처럼 부풀어 오른’ ‘무채색의 가벼운 영혼’은 ‘수백 마리 새떼’가 되어 ‘첫 비행’에 나선다. 아이들이 날려 보내는 풍선은, 교문 앞에서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을 팔고 있는 ‘깡마른 노인’의 모습과 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본능처럼 약동하는 아이들의 무리와 이제는 삶을 다 알아버려서 더는 궁금할 것이 없어 보이는 노인. 그들이 만나는 ‘교문 앞’이 생의 먼 간극, 생의 양극단이 만나는 접점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비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은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하고 터져버릴 파멸을 향해 비상한다. 생에 대한 이러한 비극적 인식은 간극의 초월이면서 극단의 무화(無化)인 것이다.

 

 

만만한 밥, 씹기에 좋은

어머니, 나를 토해 내셨지

난 소화하기 힘든 밥이었네

 

모서리가 없는

굴리면 굴러가는 어머니

입이 없는 어머니

뜯어먹기 좋은 어머니

나 오랫동안 과식을 했네

 

나는 지상의 불온한 밥

 

콘돔러브호텔전화방사채업자노숙자일회용애인오팔팔

뺑소니차사기꾼소매치기원조교제인신매매퍽치기

 

불온한 밥으로 도시는 자라고

어머니 나를 먹고 시들었네

 

언젠가 내 무덤은 이렇게 말하겠지

오 이런,

이렇게 맛없고 질긴 밥은 첨이야.

―「불온한 밥」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불온한 밥’인 ‘나’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소화하기 힘든 밥’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늘 ‘만만한 밥’이다. ‘씹기에 좋은’, ‘모서리가 없’어 ‘굴리면 굴러’간다. 심지어 어머니는 ‘입’도 없다. 입이란 우리 신체 에서 욕망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어머니는 모두 입이 없거나, 발달하지 않았다. ‘나를 먹고’ 시들어가는 ‘어머니’와 ‘뜯어먹기 좋’게 차려진 ‘어머니’를 먹고 성장한 ‘나’는 일방적인 관계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죽은 모체를 뜯어 먹으며 성장하는 어린 치어들을 닮아 있다. 그러나 ‘어머니’를 먹고 자란 것들은, ‘맛없고 질기’다. 온 세상에는 어머니를 잡아 먹고 자란 ‘나’들이 세상을 활보하며 다닌다. ‘콘돔러브호텔전화방사채업자노숙자일회용애인오팔팔’, ‘뺑소니차사기꾼소매치기원조교제인신매매퍽치기’. 이 모든 밥들은 어머니를 먹고 자란,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밥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소화하기 힘든 밥’이었더라도, 화자의 존재는 분명 ‘어머니’를 살리는 또 하나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불온한 밥’은 없다. ‘이렇게 맛없고 질긴 밥은 첨’이라고 ‘무덤’이 투덜댈지라도.

 

 

흉년 든 그 해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

눈 오는 아침, 재첩을 사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언니와 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반 됫박 남은 호박씨를 까먹었다

종일 퍼붓는 눈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고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뒤란 대밭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쌀가루 같은 눈이 내려

가뭇없는 길

휘청, 발을 헛디딘 대숲은

한 무리 새떼를 날려보냈다.

―「그해 겨울」 전문

 

시에 있어서 ‘이미지(image)’는 더없이 중요한 개념이다. 시인은 화자를 둘러싼 바깥 세계를 관찰하고, 상상력을 통해 화자와 세계의 관계를 정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상력의 기반에 이미지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데이 루위스는 한 개의 형용사나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묘사적인 어구나 구절’도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으니, 14행의 이 짧은 시 한 편은, 이미지로 쌓아 올린 거대한 집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세상에 가난과 병처럼 끔찍한 것은 없을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서정주, “무등을 보며”, 현대공론 1954년 8월호)라고 말했지만, 또한 시인 조지훈은 병을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조지훈, “병에게”, 사상계 1968)는 존재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하루하루 밥을 먹고 생계를 이어나가는 범인들에게 가난과 병은 도무지 환영할 것이 못 된다.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가 ‘봉창’을 ‘여닫’으며, ‘잦은 기침‘을 토해내고 있다. ‘쌀가루 같은 눈’이 내리는 아침이다. ‘엄마’를 기다라며 ‘나’는 ‘언니’와 함께 ‘호박씨’를 까먹고 있다. ‘남은 호박씨’를 까먹으며, 어린 두 소녀는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는 막막한 세계를 흔드는,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눈을 짊어진 채 ‘발을 헛디딘 대숲’ 속에서, ‘한 무리 새떼’들이 날아오른다. ‘가뭇없는 길’을 떠나고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만큼 명징한 세계는 없다. 부모라는 울타리는 도토리 같은 꿈을 꾸며 성장하는 집이기도 하지만, 자칫 마구 꿈을 집어삼키는 비극의 세계가 되기도 한다.

시 속 어린 ‘나’와 ‘언니’는 ‘흉년’을 보낸 어느 겨울 아침, 쪽마루에 걸터앉아 있다. ‘황달을 앓던 아버지’의 노란 얼굴과 ‘퍼붓는 눈’, ‘가뭇없’이 날아가는 ‘한 무리의 새떼’를 바라보고 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아버지’의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그리고 ‘뒤란 대밭’에 ‘철퍼덕’하고 쌓은 눈무더기가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아이들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호박씨’를 까먹고 있지만, ‘재첩을 사러 간 / 엄마’를 기다리느라 자신들이 ‘호박씨’를 까먹고 있다는 것조차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자칫 영영 어두워질지도 모르는 세계의 공포를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떼’들은 ‘가뭇없는 길’을 떠나고 있고, 어린 두 자매는 호박씨를 까먹고 있다.

 

 

지루한 생이다 뿌리를 버리고 다시 몸통만으로 일어서다니,

 

한자리에 붙박인 평생의 불운을

누가 밧줄로 묶는가

 

죽어도 나무는 나무

갈매기 한 마리 말뚝에 비린 주둥이를 닦는다

 

생전에

새들의 의자 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온 내력이 전부였다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의 것,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했다

 

떠나가는 뒤통수나 보면서 또 외발로 늙어갈 것이다

 

― 「나무말뚝」 전문

 

 

 

시인이 드러내 보인 존재자들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는 너른 품을 열고 흐르는 어머니의 강이 있을 것이다. 열 달 동안 품은 생명을 이 세상에 내놓을 때부터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 험난한 생을 넘는 동안에도 우리들의 어머니들에게는 자식이 유일한 ‘정처(定處)’이며 ‘정처(情處)’이다.

시 속, ‘나무말뚝’의 ‘생’은 ‘지루’하다. 평생 줄기와 잎으로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던 ‘뿌리’를 버리고서도 죽을 수 없다. ‘다시 몸통만으로 일어서’서 다시 ‘한자리에 붙박’여 있어야 한다. 죽어서도 생을 끝낼 수 없는 ‘나무’는 다시 누군가에 의해 ‘밧줄’에 묶인다. ‘갈매기’의 ‘비린 주둥이’를 닦거나, ‘새들의 의자 노릇’을 하며 살아온 ‘나무’는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에 풀어주고는, 누군가에 의해 ‘밧줄’에 묶여 다시 생을 이어간다. ‘말뚝’처럼 박혀서 ‘새들’의 ‘떠나가는 뒤통수’나 바라 보면서, 생전에도 그랬듯이 ‘외발’로 서서 늙어가고만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하고 떠나는 것들을 바라보며 서 있는, 저 안쓰러운 ‘외발’은 누구의 것일까? 나무는 죽어도 나무여서, 뿌리를 버리고서도 스스로 말뚝이 되어 깊이 박혀 있다. ‘나무말뚝’의 외사랑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을 참 많이도 닮아 있다. 뿌리를 잃고 ‘나무말뚝’이 된 어머니가 온몸으로 ‘밧줄’을 껴안고, 여전히 나무인 채 서 있다. 어머니는 죽어도 어머니여서, 영원히 자식을 단단히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를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시를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 ‘들숨과 날숨’ 등으로 표현하였다. 시인이 창조한 리듬과 이미지는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이 되고, 시인과 독자는 서로 들숨과 날숨을 주고 받으며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결국 ‘떠남’으로 시작한 여행은 ‘귀향’으로 끝이 나지만, 시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시인이 제시한 피안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말은 자신의 것이면서 타인의 것이기도 하다. 마경덕 시인은 순간을 포착하고, 시의 언어로써 우리에게 피안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은 오히려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적절한 부력’을 다시금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즉 시인이 시 속에서 펼쳐보이는 피안의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차안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시 속의 시간은 결고 과거에만 귀속된 것이 아니며, 항상 현존해 있으면서 제 모습을 드러낼 순간을 위해 잔뜩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를 직면하는 순간 농민의 삶의 터전인 밭과 들, 습기를 머금은 대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부의 양식이 되었을 빵과 고단함 속에 녹아 있을 농부의 기쁨도 함께 맛보았다고 했다. 한 켤레의 허름한 구두가 아닌, 그 위에 꾸려지는 한 농부의 삶과 그 삶을 둘러산 세계를 마주하였던 것이다. 마경덕 시인도 고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인은 번뜩이는 직관으로부터 치밀하고 세심한 시어의 징검다리를 쌓으며 시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한 특유의 능력과 노력으로 완성된 시들은 존재자들을 비은폐성으로 이끌어내어 그것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독자들에게 열어 보인다. 우리는 마경덕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마침내 시인이 시 안에 정립(正立)해 놓은 존재자의 진리를 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우리의 삶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며, 그 작은 파문은 다시 타성에 젖은 우리의 차안을 출렁이는 거센 물결이 될 것이다.

 

[출처]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찾아서 -―마경덕 시인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 신원석|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