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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글쓰기 방법론: 쓰라고?/김서령(자유기고가)

에세이향기 2021. 8. 16. 07:26

글쓰기 방법론: 쓰라고?
김서령(자유기고가)

글을 써라. 어떻게? 그냥 써라. 아니 어떻게 그냥? 무조건 써라. 아니 어떻게 무조건?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건 시작이다. 도무지 뭘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할 때 무조건, 그냥 , 아무렇게나! 한 문장을 시작해버려라. 눈에 보이는 아무 단어나 우선 써 버려라. <전화기를 본다.> 이렇게! 그게 바로 오늘의 글감이다. 글감은 당신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가 당신이 원할 때 얌전하게 차곡차곡 순서대로 나타나 줄만큼 인심좋지가 않다. 되려 떠올리려 할수록 천리만리 도망가 버리는 심술쟁이다.

   뭘 쓸까? 막연히 살아온 모든 날을 뒤지면서 백날 엎드려 있어 봐도 떠오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책상 서랍을 다 뒤집어엎고 밀린 빨래를 다 치대서 널어도 뾰죽한 생각이라곤 단 한 개가 떠올라 주지 않는 절망, 아마 신물나게 경험한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물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잘하니까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라, 가 절대 아니다.) 첫 마디를 일단 써놓고 보라는 것은 글의 중요한 속성을 암시한다. 글이란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것이라는 미신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용하면 생각의 가닥을 잡기가 쉬울 것 같지만 깡그리 조용하기만 해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기 십상이다. 온통 헤집어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헤집는 것이 바로 아무렇게나 첫 문장을 쓰는 일이다.   이 첫 문장은 십중팔구 나중에는 지워진다. 지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원고지에 쓸 것도 아니고 아까운 종이를 찢을 필요도 없는 컴퓨터 글쓰기인데 망설일 게 무언가. 첫 문장은 그냥 생각을 퍼올리기 위한 마중물 같은 거다. 마중물이라는 이쁜 이름 아는가? 펌프물을 퍼올릴 때 그냥은 물이 길어지지 않으니 우선 물 한 바가지를 펌프 안에 부어줘야 순순히 아래물이 딸려 올라오는데 지하수를 마중가는 물이라고 누군가 멋진 인간이 그런 이름을 붙여 놨다.   글이란 미리 생각하고 나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글의 주술이다. <저 혼자 생명이 있어 앞 문장이 알아서 뒷문장을 끌고 간다.>-- 이건 소설가 신경숙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줍게 고백했던 말이다. 쓰는 사람은 그저 끌려가는 대로 연실을 풀듯 가만히 얼개를 쥐고 있기만 하면 된다. 하늘에 팽팽하게 연을 띄우듯 그 당김과 이끌림을 손아귀 힘으로 적적히 조절하며 뿌듯하게 차오르는 긴장과 쾌감을 음미하기만 하면 된다. 이럴 때 우리의 뇌하수체 시상하부는 엔돌핀과 도파민과 그에 준하는 강력한 호르몬을 품어낸다.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손에서 나온다. 쓰는 행위에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생각이다. 그러니 일단 첫 문장부터 써라. 물론 미리 구성을 완벽하게 해놓고 쓴다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래도 쓰는 중에 원래 구성과는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처음의 계획을 수정해서 기꺼이 글의 고집에 항복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글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첫 문장을 막연하게 써서는 안 된다. 삶은 허무하다, 느니 사랑은 영원을 지향한다, 느니 식이 돼서는 참된 시작이라고 할 수 없다.

   아주 구체적이고 자기가 잘 아는 내용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내부에 관념의 철사줄을 줄줄 뽑아올릴 용광로가 있다면 별 문제겠지만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해서는 철사 자체를 뽑아올리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렇게 관념으로 뭉쳐 있을 수가 없는 살아있는 생생한 생물인 것이다. 관념적 사변적 글쓰기가 한 때 대단해보이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젠 아무도 그런 것에 기죽지 않는다. 요컨대 살아있는 글쓰기가 돼야 한다. 살아있는 글쓰기란 구체적인 일상 속의 사물과 사건들에서 생각을 풀어내야 한다는 소리다.   <전화기를 본다.> 이 짧은 한 문장! 이 안에 사실은 장편소설 하나를 쓰고 남을 분량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 단어는 그냥 단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선택한 전화기라는, 눈앞에 보이는 이 물건은 제 뒤에 산더미 같은 얘기를 숨기고 저기 시침을 뗴고 놓여 있다. 그걸 내가 툭 건드리면 전화기는 저 홀로 생명을 얻어 발언하고 상상하고 춤을 춘다. 전화기에 관련된 온갖 기억들이 저 홀로 활개치게 내버려 둬라. 맨 첫 전화기. 벨이 울릴까 온종일 그 앞을 맴돌게 만들던 전화기, 깨어진 전화기, 잊었던 목소리가 난데없이 흘러나오던 전화기, 아무 말도 만들어지지 않던 전화기, 어둠 속에서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번호를 꾹꾹 눌러대던 전화기, 자판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전화기……. 내 인생의 온갖 전화기들이 서로 제가 먼저 나오려고 몸부침치면 서둘다 숨막히지 않게 찬찬히 그걸 조절해주기만 하면 된다.   전화기만 그런 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 다 마찬가지다. 산? 밥? 연필? 어느 것이든 내 삶이 거기 얽혀 별의 별 곡절을 이뤄내지 않은 게 어디 있나. 굳이 곡절만이 글감은 아니다. 곡절 아니라 덤덤한 기억이었더라도 같은 공간에 숨쉬고 살아온 시간 자체가 글감이다. 글쓸 꺼리가 없다는 건 빈 말이다. 자기 삶과 자기 생에 할 말이 하나도 없다고?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고 그런 인생 또한 없다……. 할 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글을 쓰기 싫다고 도망치려는 핑계일 뿐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글을 쉽게 쓰는 요령이 무언지 저절로 알게 됐을 것이다. 바로 할 말이 많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할 말이 많아진다는 건 그럼 뭔가? 관심이고 호기심이다. 관심과 호기심이 깊으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똑같은 현상 안에서도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들린다. 사과를 한 번 그림으로 그려본 사람들은 사과의 빛깔이 단순히 빨강만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노랑과 분홍과 연두빛이 거기 은은히 숨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빨강은 빨강만이 아니며 초록과 노랑이 섞여서 빨강이 더 완벽하게 완성되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그런 통찰이 바로 글을 쓰는 맛이고 읽는 맛이다.   요컨대 글을 잘 쓰려면 만사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전에 안 보이던 바로 그것을 기록하는 게 글이다. <터치 오브 사운드>라는 자연의 모든 소리를 따라가보는 다큐멘타리가 그토록 강렬했던 건 현미경 같은 눈으로 세상을 확대해서 들여다 봤기 때문이다. 그런 확대경이 아니면 보이지 않았을 숱한 신비와 매혹들-- 그게 우리 안의 감수성의 떨판을 흔든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바로 글쓸 꺼리(할 말)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 볼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 자신은 자신이니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다.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유일한 존재이고 뭐니뭐니해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유일하고 소중한 자신을, 남이라고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켜볼 것, 그런 눈을 뱃속에 하나 마련해두고 수시로 꺼내서 스스로를 점검할 것, 그 점검일지가 바로 최상의 글이다. 그리고 어쩌면 글쓰기의 핵심목표는 바로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써라. 그냥, 무조건 시작부터 해놓고 봐라. 내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잘 안다고 자신하는 것, 그걸로 일단 아주 간단한 첫문장을 만들어놓고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