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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춘풍추수(春風秋水)로 가는 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박양근

에세이향기 2022. 2. 10. 11:32

춘풍추수(春風秋水)로 가는 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박양근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진정한 여행>-나짐 히크메트- /터키의 시인 (1902-1963)

 

명문장의 종착지점은 있는가. 그것에 다다르면 순결한 영혼에 덕지덕지 붙은 굳은살을 벗겨지련만. 원래의 심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명문장으로 가는 길엔 종착점이 없다. 차가운 물로 세례 받은 듯, 따뜻한 물로 피로가 풀리는 듯한 문장이 어디엔가 있을 텐데. 그래서 작가정신은 항상 여행을 떠난다.

 

명문장은 어떤 것인가. 설명은 참 쉽다.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의 일상에 한 방 먹인다. 우리의 하루를 순식간에 다 잡아 버린다. 무덤에 묻힌 우리의 영육을 불러낸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아!"라는 신음을 지르게 하는 문장이 분명 있다. 그 문장은 한 자 한 자 필사할 가치가 있다. 또박또박 필사한 문장은 몇 해가 지나 마음 밭에 뿌려도 푸른 싹을 틔운다.

 

 

글은 여행이다. 마음의 여행이다. 하루에 한번쯤 글 여행을 혼자 즐기면 좋다. 늘 가고 싶어 했지만 아직 가지 못한 곳, 오래전에 간 곳도 한 번 더 가면 좋다. 아직 쓰지 못했다고, 한번 썼다고 그 소재나 언어를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글은 목적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곳에 다다르는가를 알려주는 방법이다. 글이 방법이라는 것, 그러므로 여행 목적지는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으나 여행 방법은 그대만이 가질 수 있다. 그대만의 글, 이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다.

 

이 글 참 괜찮다. 반짝반짝 한다. 그 순수한 반응에 반응하자. 그러면 인생을 깨우쳐주고 생각과 오감을 일깨우는 찬 물줄기가 등목 치는 듯한 전율을 전해준다. 찬연한 인식의 세계로 초대한다. 통(通)한 것이다. 통은 번갯불같이 몸을 태우는 고통과 희열을 동반할 때 진정한 통(通)을 이룬다.

 

충남 예산에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고택이 있다. 고택 기둥에는 선생의 학문정신을 일러주는 추사체 모본(模本)들이 기둥마다 붙어있다. 추사 선생이 남긴 정신 한 자락을 따르고 싶을 때 더없이 고마운 지침이다. 그건 아니지만 선생이 만년에 서울 봉은사에 머물면서 휘호(揮毫)한 유작으로 60 평생을 압축한 글이 있다.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이요,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이라.”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옳은 말이다. 글은 봄날 정취와 가을 풍경을 칭찬하지만 사실은 사람은 포용력을 지니고 문장은 정갈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중의법이다.

 

원래 이 말은 성리학(性理學)을 연 북송 시대의 정명도, 정이천 두 학자의 성품을 각각 칭송한 표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찍부터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당시의 시끌벅적한 조선 당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글과 몸을 지키려 한 결의가 담겨있다.

 

무릇 사람의 성품이 온유하면 능히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다. 부드러운 시문처럼 다감하게 껴안으면 산들바람에 실린 잎처럼 스스로 품 안으로 들어온다. 풍아(風雅)를 닮은 인격이라면 사람의 미세한 텔레파시에도 반응할 것이다. 그게 춘풍대아능용물의 정신이다.

 

추수(秋水)란 문장이 가을 물처럼 차고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을 찬물은 춘매의 기품과 같아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혼탁한 세상일수록 문장이 고고해야 한다는 것이 추수문장불염진이다. 마음은 봄바람, 글은 가을 물이라는 것이다.

 

 

추사 선생이 만일 이 두 구절을 고택 기둥에 주련(柱聯)으로 붙였으면 어땠을까. 필자는 선생이 마치 기둥을 자기 몸 삼아 문신 새기듯 붓을 내려 눌렀을 거라 상상했다. 할 말이 오죽 많았겠느냐만 이 14자로 소회를 달랬을 심정에 가슴 아팠다. 문장은 이렇게 쓰이는구나. 추사 선생은 능히 훌륭한 글에 다다랐으나 미련퉁이 글은 여전히 깜냥이구나 하는 회한도 덮쳐왔다.

 

춘풍추수는 현대수필이 지녀야 할 요체를 말하고 있다. 곧 산문가의 마음과 산문의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덕목과 미덕을 말한다. 덕목은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이 부드럽고 따스해야 한다는 것이고 미덕은 수필의 글이 맑고 고고하고 꼿꼿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유내강(外柔內剛) 인유문강(人柔文剛). 행함에 사(邪)와 사(私)가 끼면 문장은 박(薄)하고 난(亂)해진다. 생활의 능용(能容)과 글의 불요(不染)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고요한 수련을 통해 여물어진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말과 “춘풍추수”를 합쳐 생각하면서 글쓰기의 원리를 쉽게 설명해본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가 있지만 많이 읽지 않으면서 잘 쓰려하는 것은 욕심 이전에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만사 힘이 있어야 용을 쓸 수 있다. 글쓰기 근육을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쓰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셋째 소리 말로 말할 때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읽을 때 쉽게 읽히는 글이 막히는 글보다 더 잘 쓴 글임을 새겨야 한다.

 

넷째 왜 써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행위이므로 헛발질로는 좋은 글이 나오기 어렵다.

 

다섯째 몸으로 쓴다.

몸에 배이도록 하라는 뜻으로 몸에 익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이요,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을 이루었는가. 아니라면 아직 그대가 진정 원하는 글은 아직 쓰이지 않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여전히 좋은 문장으로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봄이 벌써 지나가니 봄바람 같은 글이 그리워지고

가을이 아직 멀리 있으니 가을물 같은 글이 그리워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