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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

에세이향기 2023. 2. 7. 03:31

어떤 여행

아홉 번 태를 연 여인이

두 번 산고를 치른 여자를 근심한다

두 번 산고를 치른 여자는 

아홉 번 태를 연 여인을 근심한다

골다공증 약은 매일 아침 먹는지

지난봄 다친 허리는 안녕하신지

보청기를 끼고도 자꾸 엉뚱한 대답을 하는 여인에게

다른 여자는 퉁퉁증을 낸다

갓난쟁이가 볼거리 앓을 때 밀쳐 두었다고

그때 생긴 흉터로 평생 목 파진 옷은 입지 못한다고

철사 줄로 동여맨 간장독 같은 여인에게 성화를 부린다

잘 들리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떼며

늙은 여인은 졸리다고 하품을 한다

보조기를 푼 허리를 누에고치처럼 말고

검버섯 핀 손으로 염주를 굴린다

틀니를 꺼내 몽당 놋숟가락처럼 기운

입술을 달싹이며 금강경을 오물거린다

금세 늙고 어린 사십여 명 애물단지들을 불러내느라

여인의 잇몸이 물컹해진다

오늘의 말씀을 읽던

여자가 살짝 눈 흘기며 성경을 덮는다

 

바닷가 호텔의 어느 저녁, 두 여인은

뼛속에 새겨진 서로의 울음 무늬를 짚어내느라

뒤척이며 등을 돌린다

밤새 꿈속에서 모래집을 짓다 허문다

한 걸음 더 바다와 가까와진다

―「어떤 여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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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샌드 페인팅』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대구 출생으로 2003년 『시안』으로 등단을 하였고 시집으로는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가 있다. 시집을 펼쳐든 순간 대체적으로 긴 시들이 촘촘하게 자릴 잡은 지면 속으로 줄줄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는 난해하고 긴 시를 끝까지 읽지 못하는 좀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시인의 신간 『샌드 페인팅』은 쉬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중 「어떤 여행」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아홉 번 태를 연 여인과 두 번 산고를 치른 여자가 여행을 갔다. 두 여인은 모녀간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모녀는 동해안일지 남해안일지 아니면 해외일지도 모를 여행지의 호텔에서 한 방을 쓴다.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면서 그래서 서로의 울음무늬를 짚어내느라 뒤척이며 등을 돌리면서도 서로 닮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걸 안다. 둘은 서로를 염려해 주는 게 일상이다. 딸은 어머니에게 퉁퉁거리고 어머니는 귀가 나빠 못 알아듣는 척 시치미를 떼고 하품을 한다. 어머니가 염주를 돌리고 『금강경』을 오물거릴 때 딸은 『성경』을 펼쳐든다. 그렇게 여행지에서조차 서로를 팽팽한 가시거리 안에 놓고 보는 두 여인의 토닥거리는 소리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다가 “철사 줄로 동여맨 간장독 같은 여인”이란 대목에서 아홉 번 태를 연 여인의 생을 읽어버린 필자는 목이 콱 막혀 버린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어머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여리고 연약한 여인일지라도 어머니는 늘 위대하고 강하고 단단한 존재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속담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하였다. 

시인의 어머니 역시 아홉 번 태를 열어 낳은 자식들을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서 키워내셨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 아래 올곧게 자란 자녀와 그 자식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성장하여 사십여 명의 애물단지가 아닌 보물단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보물들이 이 세상 요소요소에 우뚝 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거라 추측해 본다. 한편으로는 앞에서 늘 퉁퉁거릴 수 있는 그런 어머니가 계신 시인이 필자는 무진장 부럽다. 

박수현 시인의 시어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뛰어난 상상력과 진솔함으로 독자를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는 흡인력이 있다. 그 탄탄한 언어의 유희로 끌어당기는 힘이 마치 처음 보는 바다 속 풍경처럼 깊고 신선하다. 한 편 한 편 읽어 내려가노라면 쉬운 듯 어느 한 편도 쉽게 쓰지 않았다.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바다와 가까워진다”라면서 생이 흐르는 물처럼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유연하고 순응하는 자세를 드러내는 시의 완숙미를 보여준다. 어림잡아 5~6년에 한 번씩 겪었을 것 같은 시인의 다음 산고가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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