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철로변 / 이길상

에세이향기 2023. 2. 6. 12:19

철로변 / 이길상

역사엔 톱밥난로가 홀로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다

저탄장 탄가루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아침을 여는 길은 객지를 떠돈다

막장에 들어가는 반딧불들, 날개를 떨구면

검은 산엔 절망의 삽날이 꽂힐 뿐이다

등록금 낼 때쯤이면 아이들은 학교가 불 꺼진 빈집 같다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잠 못 이루며 출렁이는 삶이 거품으로 올라올 때

그 빈 공간 메우자고 떠난 아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 소식 궁금할 때마다 강물은 말이 없고

고요와 적막에 남은 논밭마저 드러눕는다

갈대처럼 함께 모여 살던 이웃들은 흔들리고 있는가

갈기 선 바람이 불자 희망의 불이 꺼진

길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

떡잎 같던 시간이 뿌리를 거둔다

시린 눈발에 하늘도 허기진 달을 내건다

달처럼 텅텅 울리는 마음은 철로로 놓여 먼 길 떠났을까

거죽만 남은 풍경은 주저앉아 빈 밭을 키우고

세간은 더 야위어 간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좌판에 햇살 가득 찰 날이 올까

아버지가 오실 길에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

겨울 그놈의 겨울이 또 눈과 바람을 데리고

무쇠처럼 달려오고 있다

 

 

새벽 강구항 / 이영옥

강구항에는 그날 따라 해가 뜨지 않았다

골목 안에 숨어 있던 겨울 바람만이

받침 떨어진 여인숙 간판을 할퀴며 지나갔고

그때마다 낡은 간판 불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강구항의 불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것은 내가 먼 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항구에는

장기 숙박하고 있는 눅눅한 바람만이

여인숙 창문을 들락거렸고

털실 뭉치같은 안개에서도 비린내가 났다

커다란 전구를 매단 통발선 한 척이

색색의 깃발을 꽂고 항구로 들어왔다

잠을 못 잔 선주의 눈알만 붉어져 있었고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건져보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가 통발 한번 힘껏 던져두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도 강해지거나 무디어지지 않고

몸을 녹이려고 낯선 방에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이 빤히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접혀 있던 군용 담요를 펼치자

젊음을 탕진해버린 노름꾼 같은 야윈 화투짝들이

아직 냉기 돌고 있는 내 삶의 웃목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물러선 자리에 늙은 선주가 서 있고

주름이 깊게 패인 그가 빈래로 돌아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침묵에 길들여진 넙치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쭈그리고 앉아 아침해를 기다렸다

 

미원역 / 최 윤

 

태백을 넘어온 소식들이

쿨럭이며 해발 700여 미터의 고지를 오른다

눈(雪)처럼 소복해진 눈두덩을 비비며

꿈많은 이들의 고단함을 실어나르던 완행열차

충혈된 쇳소리 길게 울리며

숨가쁘게 올라온 산맥의 장대한 등뼈가 꿈틀거리고

차창 눈시린 계곡마다 성에꽃이 피고 진다

잠시 숨을 고르는지 둔탁한 앞발을 모으고 섰는 태백선

산굽이를 밀어내고 깊은 토혈을 뱉어내느라

기적소리 허기진 칭얼거림이 낮게 휘어진다

늙은 역무원이 고원에 서서 깃발을 흔든다

아득한 시공을 견디며 흩날리는

저 오래된 한 점 노숙의 별, 별들

그가 늙어가는 동안

검은 탄광은 잊혀진 풍경이 되었고

이제 누구도 막장인생을 말하지 않는다

뼈 아픈 시간들이 소복소복 쌓여있는 역사를 뒤로 한 채

잠시 정차했던 추억과 사연들

푸른 불빛을 삐걱이며 어디로 저어가는가

폭설이 내리고

자미원은 또 혼자 서 있다

 

굴진작업 / 정연수

길을 닦는다

캄캄한 날에도 길을 닦는다

캄캄하니까 밝은 세상 보자고 길을

나는 매일 전진한다지만

늘 앞을 턱턱 막아서는

길을 뚫는다

굶주려 지나온 세월보다 단단한 암벽

없이 사는 것보다 참기 힘든 외면의 눈길

앞을 막아도

길을 뚫는다

착암기로 한 구멍, 두 구멍, 세 구멍

힘든 세월만큼 수를 세어 천공하고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하여 귀를 막고

터져라 무저갱으로 가는 세월

가도 가도 끝없는 막장

길을 닦는다

가도 가도 캄캄한 굴.

현진건의 고향아리랑 / 정연수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두고두고 볼 강산은

골프장 스키장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사람구실 못할 사람은

정치인 경찰관 되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마지막 찾은 막장은

폐광에 규폐증 되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반반하고 푼돈 있으면

룸싸롱 카지노 가고요.

우타하나 / 정연수

저 촐싹대는 파도소리가 미치게 좋으니

이를 우타하나

달의 어두운 그림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를 우타하나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이 뜨거워

별들은 알고도 모른 체 눈만 끔벅끔벅

너를 보기만 해도 내 몸은 후끈

숲 속의 들꽃들은 속옷까지 벗어놓고

저 산 깊은 곳에서 신음하는 풀벌레소리에 잠 못 이루니

이를 우타하나.

광부 / 정연수

카우카소스 산꼭대기

봉화가 오르고

숲이 푸른 불꽃을 튀기는 동안

새의 부리에 간을 내어 준

그대 프로메테우스

지층의 떨림

새는 다시 폐를 향해 부리를 들이대고

카우카소스 산꼭대기서

검은 쥐 기어다니는 해저까지

전승되는 불의 신화

아직, 우리의 프로메테우스는 살아있다.

 

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 최일걸

 

 

굳이 방사선 연대측정법에 따른

지구 연대기 도표가 아니어도

겹겹의 지층을 이룬

반지하의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고생대 양치식물이 원시림을 구축한다

만약에 침묵의 석탄기 숲이 없었다면

빙하기보다 더 혹독한 오늘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적당한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생성된

흑갈색 가연성 암석이 이 밤을 덥히고 있지만

퇴적된 날들에 매몰된 일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광맥을 찾고 있다

꿈은 쉽게 채굴되지 않고

허기는 단속반처럼 기세등등한데

돌아누울 틈조차 없는 일가족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칼잠은 더욱더 날을 번득이며

무허가의 밤하늘에 무수히 칼금을 긋는다

어린 아들의 칭얼거림에도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일가족의 잠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연탄가스를 적당량 흡입하자

고요한 식물의 꿈이 되어

갱도보다 깊은 서로의 속을 헤아리며

겨울눈을 틔우려고 단단히 오므리고 있다

 

 

내 생에 탄광촌

 

도대체 수직 갱도는 주민들 가슴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던 걸까

미소만 빼고 모든 게 시커먼 탄광촌,

하얗다는 것만으로 이적 표현물이 되는 그곳에서

흰 눈마저도 귀순용사처럼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탄가루가 날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막장에서

아버지들이 산업역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땅벌 같은 아이들은 저마다 탄맥을 찾아 수직 하강했다

세상의 모든 레일은

오직 탄광으로 향할 거라고 믿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캄캄함에 익숙해졌다

갱도는 38선처럼 철통같았기에 자주 무너졌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들킨 것처럼 숨죽여야 했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는 속죄양이 되어

탄광촌을 떠나야 했다 마을에 남겨진 아이들은

떠난 아이에 대한 기억을 탄 더미에 파묻곤

시커멓게 흐르는 시냇물에 손을 씻었다

 

폐광 이후, 사람들은 흑백의 기억을 지우고

총천연색 삼차원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누구도 무너진 갱도에서 구출되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후미진 골목에서 연탄재를 만나면

들킨 것 같아 함부로 걷어찬다.

 

 

자위적 발포

 

몽정을 할까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대청마루에서 뒤척이다가

잠결에 귓속말로 들었다

엄마와 이모는 머리를 맞대고

봄밤의 정적을 깨물며 속삭였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탄알은 서늘한 등짝에 박혔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구멍 숭숭 뚫린 밤하늘을 끌어당겨

하얗게 질린 얼굴을 덮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내 시신을 찾아 헤매 다녔다

끝끝내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보다 진한 정액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희멀건 정액으로 얼룩진 팬티를

옷장 깊숙이 감췄으나

자꾸 발기하는 사타구니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끊임없이 나를 검열해야 했고

문득문득 불심검문에 걸려들었다

불순하게 발기하는 날들,

잔혹한 폭력을 상상하며 자위행위를 했다

자위적 발포인 양 정액을 쏟아내고

백기를 펄럭이듯 화장지로 훔치면

움츠러든 사타구니는 시무룩했지만

사정권에서 벗어난 것처럼 안심이었다

비릿한 생을 발칙하게 창밖에 내다 건

꽃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딱지치기

 

 

쉽게 접혀지지 않는 날들이었다

통일달리기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을

억지로 구겨 손바닥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바드득 어금니를 갈며 밤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밥상을 뒤집어엎는 일로 하루를 마감했다

나는 국물을 뒤집어쓴 채

달력에 남아 있는 날들을 몰래 들춰봤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재빨리 뜯어낸 달력이

딱지가 되어 빳빳하게 날을 세우면

나는 치기배처럼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세상은 거대한 정화조였다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불순물 같은 아이들은

쉽게 엉켜 정치판모양 딱지치기를 했다

도대체 무엇을 뒤집어엎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나가떨어지기 일쑤였고

허망하게 뜯겨나간 일기장은

배설의 흔적을 지웠다

위인전 책 표지를 뜯어 딱지로 접으며

내일을 기약해 보려 했지만

쌀자루까지 탐욕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도블록으로 일으켜 세운 세상

 

 

밤이 깊도록 사내는 보도블록을 깔고 있다

그의 길은 해체된 지 오래,

낮에 엉망이 된 보도블록을 파헤칠 때 사내는

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완강하게 버텨온 어깨를 허물 수밖에 없었다

들쭉날쭉한 보도블록은 행인들의 발을 잡아채기도 하고

밟을라치면 지뢰처럼 행인에게 물폭탄을 퍼붓기 일쑤,

조각조각 흩어진 날들을 짜 맞추는 사내의 손놀림은

꼼꼼하고 세심하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

끈끈한 온정을 덧바르고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는다

그는 길과 불화했던 걸음걸음을 되밟는다

보도블록을 땅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쳐서

그 잔해로 벌였던 투쟁의 날들,

이제 그는 자신이 허공에 내던져야 했던

젊은 날의 고뇌와 열정의 부스러기를 모아

걸음과 길의 합일점에 찾고 있다

사내의 어깨 위에서 밤하늘이 자꾸 칭얼거린다

누군가에겐 보도블록이 빛이 된다는 걸 알기에

그는 한 조각도 소홀함이 없이 모자이크한다

사내의 긴 궤적을 쫓아

별똥별이 급하게 밑줄을 그었다

 

사북역, 이름 없는 열차 / 정재돈

불빛이 죽어버린 탄광촌, 차츰 이름이 희미해져가는 열차가 있다

허름한 옷 입은 오후가 아쉬운 탄식을 쏟아내며 갱 입구로 나왔다 

닫힌 탄광의 문 앞에 서서 입은 옷을 벗으려 하는 햇살,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한때 헐벗은 적이 있지만 햇살은 연탄처럼 누더기 옷을 기워가며 입던 때를 잊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녹슨 철문 출입금지 푯말, 마치 외부와 단절하고 살아온 독거노인을 보는 것 같다 삭막한 오후의 하품이 갱 입구에 눌어붙었다

 

광부들의 땀 냄새 묻은 철로, 자식이 꿈이고 희망이었을 고된 삶의 현장, 생존의 끈으로 묶여있던 인차가 덩그러니 멈춰있다. 차츰 이름이 지워져 가는 열차들, 사북역 철로를 따라 가장들의 텁텁했던 한숨이 갱 입구까지 줄지어 앉아있다

 

만차의 꿈을 달리던 사북의 시간은 멈췄고 지난날 산업 전사들의 애끓는 숨소리도 멈춰있다. 나는 문득 갱 입구, 군데군데 남아있는 시커먼 흔적들에게 미안했다. 낡은 철로는 차츰 밤으로 향하고 희미한 달빛 속으로 마지막 석탄냄새가 풍겼다

 

광부들의 혼이 피어난 사북역, 그들의 애끓는 가슴앓이가 지천의 산에 애잔한 야생화로 피어났다. 갱도 안에 별처럼 아름답게 박힌 흔적들, 문득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석탄을 가득실고 나에게 깜냥깜냥 다가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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