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대통밥/이정

에세이향기 2023. 2. 12. 08:17

 대통밥

        -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마디

        - 이정록


마디와 마디 사이에
두 가닥씩 칼금이 그어져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나무는
그 등고선의 기울기와 간격으로
하늘 높이 몸을 디민다

새가 대나무 꼭지에 앉는다
수많은 마디들이 새의 무게를 갖고 논다
또한 새떼의 수많은 뼈마디가
대나무를 흔들며 합창을 한다

바람의 마디와 하늘의 마디도
대밭, 둥근 방으로 몸을 퉁기며 노닌다

시끌벅적 앞다투는
댓이파리들의 노래 위에 눈이 쌓이면
대나무는 간혹 몸을 꺾는다
백설의 마디며 물의 마디를 모르는
이파리들의 고성방가들

대숲 속에는 마디를 모르는 것들이
바닥을 덮는다, 켜켜이
썩어가는 이파리에게 마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하얀 대뿌리, 그 잘디잔 말씀이 뻗어나간다

 

 

십오 촉

   - 최종천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오 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내 담장을 넘어와 바라볼 때마다
침을 삼키게 하는, 그러나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 촉은 될 것이다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필라멘트
이백이십짜리 전구를 백십에 꽂아 놓은 듯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떨어지지 않는
십오 촉의 긴장이 홍시를 켜 놓았다
그걸 따 먹고 싶은
홍시 같은 꼬마들의 얼굴도 켜져 있다

 

 


  책

         - 강희근

책 한 권은 한 마지기 논이다

물꼬로 물 흘러 들어가 한 마지기 다 채우고서야
논이 논인 것처럼

내 마음 책장으로 흘러 들어가 쪽쪽 헤집고
머금고 보듬다가 다시 넘쳐 돌아 나오고서야
책이 책인 것을

책은 책꽂이에서는 묵정논이다

마음이 흘러 들어갈 수 없는 딱딱이 의자에
앉아 있는 책,

마음이 흘러 들어가지 않는 책의 글자는
빼뿌쟁이거나 피
묵정논에 솟아오르는 잡풀인 것을

 

 

 폐가


         - 조말선      

 안채의 주인은 어둠이다 입구마다 봉인되었던 빛은 밀려나고 한때 문지방 너머로 쓸려나가던 어둠의 자물쇠가 비명을 지른 이후 집의 내력을 말하는 문짝이 떨어져 나간 방문의 검은 입 어둠의 검은 혀가 끊임없이 널름거린다



희망을 끓여내던 밥상에 두꺼운 먼지가 차려지고 둘러앉은 어둠은 말한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폐허 쪽이다 꿈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절망이 빠르게 교체되고 희망을 떠받치던 대들보는 오랜 골다공증에 허리가 휜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관절 구석구석 추억이 삐걱이는 저녁



폐허는 익는다 감나무 붉은 열매가 절망을 익힌다 추녀 아래 필라멘트 끊긴 백열등으로 더 이상 이승의 꿈은 송전되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부터 밀려난 어둠은 도처에 흘러넘친다 죽은 이들의 인광처럼 달개비 푸른 꽃 발광하는 몰락의 시간 으깨어지는 한 쪽 어깨로 달빛도 무겁다  

 

 

살쾡이의 눈
- 마쓰오 바쇼를 추억함

         우대식

푸른 겨울 밤 하늘,
냉골의 암자에서 흐린 술을 마시던 그대를 추억한다
댓돌에 가만히 얹혀 있을 한 짝 신발을 추억하는 것이다
모든 길은 걸어서 가야 한다
풍경이 울리는 마당가에서
늙은 물고기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얼어간다
無慾의 생이란 한낱 저 木漁와 같아
쓰리디쓰린 입술로 세상에 입을 맞추는 것
저 별의 빛이 내 가슴에 와닿기까지
얼마만큼 서늘한 공간을 날아와 고단한 몸을 투신하는가
형형한 해골 하나를 추억한다
이 겨울 밤,
거세하지 못한 내 생의 뿌리가 부끄럽다
혹 들판에 낱낱이 뿌져지는 하찮은 눈발이라도
제발 내 헛것에 감각을 불어 넣어다오
하여,
소용없음을 진각하게 해다오
꿈도 아닌 가난한 생의 저 밖을 헤매는
한 그루 겨울나무처럼
나, 여기
살쾡이 같았을 그대의 눈을 이 밤 추억하는 것이다

無慾 : 무욕

 

 

화목

              송정란

민박집 뒷방 툇마루 아래 가지런히 쟁여둔
장작을 바라본다
불을 품고 얌전히 누워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장작 사이 벌어진 틈새들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토해낸다 캄캄한 구멍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보인다
욕망의 마른 혓바닥들이 꿈틀거리며 한꺼번에
기어나올 것만 같다 손만 갖다대도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이다
제멋대로 몸뚱이를 굴릴 것이다
마음 속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연습을 하며
뼛속까지 타오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성냥개비 하나의 작은 불씨에도
우르르 몸을 내던질 것 같은 마음의 장작들,
멀리 서울을 떠나온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곧 진눈깨비가 쏟아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숲의 묵언

       - 고재종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생 맑게 씻어 내고 걸러 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 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속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숲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마음이란

    - 원성스님

마음이란 참 이상하지요.
나는 여기 있는데
천 리 밖을 나돌아다니지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극락도 만들고 지옥도 만들지요.

장마철도 아닌데
흐려졌다 맑아졌다.
부뚜막도 아닌데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온도계도 아닌데
높아졌다 낮아졌다.
고무줄도 아닌데
팽팽해졌다 늘어졌다.

몸은 하나인데
염주알처럼 많기도 하지요.

소를 몰듯 내 몸을 가만 놔두지 않게
채찍질하다가도
돼지를 보듯 내 몸을 살찌우게 하지요.

마음 문을 열면 온 세상
다 받아들이다가도
마음 문을 닫으면
바늘하나 꽂을 자리 없지요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와집 한 채/김명인  (0) 2023.02.15
겨울 나무에게로 / 황지우  (0) 2023.02.12
어떤 여행  (0) 2023.02.07
철로변 / 이길상  (1) 2023.02.06
실종/김혜영  (1) 2023.02.06